거금을 들고 돌아 온 할매

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죽었다던 할매가 돌아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60억이라는 거금을 들고서...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

어찌 된 일인지 손주들은 다 할머니가 일제시대 말미 염병에 결려 돌아가신 걸로 만 알고 있었는데 아니란다.

멀쩡히 살아 계신 걸로도 모자라 그 할머니를 보자마자 평생을 점잖은 선비로만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육두문자가 난무하고 아버지와 고모 두 분 다 할머니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신다.

물론 그것도 할머니가 유산으로 내놓을 예정인 60억의 돈에 반대는 거품처럼 스러지고 이제는 서로가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기 바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차례 취업에 실패한 후 오랜 연인마저 떠나버리고 집에서 밥만 축내는 밥벌레 취급을 받고 있는 집안의 장손 동석이... 가장 돈이 필요할 것 같은 그 동석이 의외로 가장 냉정하게 상황을 관찰한다.

아버지는 되지도 않는 정치에 뜻을 둬 할머니의 유산이 필요하고 그런 무능한 아버지와 아들 때문에 생계를 책임지느라 하루하루가 고단한 엄마는 말할 필요 없이 돈이 필요하고 이혼 후 받은 건물 하나가 전부인 이쁘고 똑똑한 여동생 역시 계산을 튕기기 바쁘다.

여기에 결혼 후 제법 돈을 모은 고모와 그 식구들까지...

모두가 그 돈을 바라보고 일대 소동이 벌어지지만 할아버지만큼은 끝끝내 할머니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독립군 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있을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그 동료를 밀고하고 일본 군인과 눈이 맞아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가버린 과거가 있기 때문인데 할아버지의 피 끓는 분노에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는 할머니는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그런 적이 없다고... 왜 그때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냐고...

얼핏 보면 상황도 그렇고 인물들 면면이 평범한 사람 하나 없다.

자식까지 버리고 남자를 따라 떠난 걸로 되어있는 할머니도 오랫동안 한 남자를 사랑하다 도무지 발전하지도 벗어날려는 마음조차 없는 남자 동석을 버리고 그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랑 결혼한 나쁜 년 현애도 심지어는 집안의 생계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엄마조차도 알고 보면 매 맞는 아내였다.

첫눈에 반해 당시 시대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결혼을 위해 약까지 먹은 할아버지의 순정도 여자의 과거 따윈 상관없다고 쿨하게 친한 친구의 애인을 뺏어간 상우도 옳은 정의를 위해 직장도 때려치우고 바른길로 가고자 했던 아버지도 되는 일이 없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 앞에선 한없이 쪼그라들어 집에 와서 분풀이로 마누라를 때리고 큰소리치는 그런 비겁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밖에 나가선 점잖은 척 매너 있는 척하는 그들의 이중성이 할머니 제니에 의해서 아니 할머니가 주실 유산 60억에 의해 민낯이 공개된 것이다.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할머니 제니와 그런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며 나름대로 주판알을 튕기는 가족 각자의 모습이 흥미진진하고 유쾌하게 그려져 있지만 마냥 가볍기만 하지 않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는 모두가 힘들었겠지만 특히 여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이중성에 강력한 한방을 먹이는 사람이 요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애나 엄마 혹은 상미가 아닌 80이 넘은 할머니를 내세운 것도 거세게 반발할 남자를 위한 나름의 영리한 작전이 아닐까 싶다.

유쾌하면서도 화끈하고 감동도 주는 할매가 돌아왔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