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서정시
리훙웨이 지음, 한수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어떻게 안 죽을 수 있나?라는 인류 이후 누구나 꿈꿔왔지만 이뤄질 수 없었던 영생, 불멸의 꿈을 이루고자 한 이가 또 한 사람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이라 불렀으며 그는 나라를 가지진 않았으나 나라를 가졌을 뿐 아니라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사람들 개개인의 의식을 모아서 단체로 교제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앱을 통해 엄청난 인기와 부를 구축해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제국을 만들어냈다.
무에서 유의 창조는 많은 사람들을 그의 의견에 동조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다 의식 결정체를 이식해 언제 어디서 건 원하는 누구와도 연결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해냈다.
이는 반대로 누구라도 원하면 나의 의식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를 열었던 왕이 누군가의 죽음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그 사람은 20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로 결정된 위원왕후였으며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충분히 누군가의 의심을 불러올만했다.
더군다나 위원왕후는 죽기 직전 친구라 할 수 있는 리푸레이에게 `이렇게 단절한다. 잘 지내길`이라는 이상한 글을 메일로 보내왔고 그 메일을 받은 리푸레이가 그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왕후의 유품에서 그가 남긴 글과 같은 글귀가 쓰인 종이를 발견하지만 그 글이 쓰인 건 2029년도였고 이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위원왕후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걸까?
위원왕후의 과거를 조사하다 왕과 그가 한때 잡지를 창간하는 데 힘을 모았을 뿐 아니라 마음이 잘 맞는 영혼의 파트너와 같은 관계였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그의 죽음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리푸레이는 왕이 이제껏 걸어온 길과 추구해왔던 것을 조사하다 마침내 왕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혀낸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수 있는 길
그렇다. 왕은 인간의 영생을 원하고 그걸 위해 많은 연구를 해왔으며 위원왕후의 죽음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인간의 영생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에게 영생이란 결국 인간 개개인을 나누는 분별을 없애 너와 나라는 구별이 없으면 인류라는 개체에게 생과 사는 의미가 없어지고 이는 곧 영원함을 나타내므로 영생할 수 있다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이를 위해선 사람들 사이에서 분별을 없애야 하는데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문자의 소멸이라는 방식이었다.
모든 문자를 소멸하는 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문자를 없애고 특정한 단어의 반복 사용으로 문자에 제한을 둠으로써 결국에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문자만 사용하게 되면 이는 모든 인류의 동일화에 도움이 되고 이는 인간의 불멸에 필수적이다.
그런 그와 시를 쓰고 글을 쓰는 리원왕후의 대립은 어쩌면 당연하고 왕후의 결정은 왕의 오만한 행동에 대한 반발의 결과일수도 있음을 밝혀내는 리플레이
이제 이 모든 수수께끼를 푼 리푸레이에게 왕은 최후의 선택을 요구한다.
인간의 불멸이라는 것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음을 사람들 대부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불멸이란 당연히 육체의 불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정신 혹은 의식의 불멸이라는 다른 시각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왕과 서정시는 솔직히 읽기에 녹록지 않은 작품이다.
내용도 심오하지만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한자어, 그리고 철학적인 내용들은 장벽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걸 넘으면 마치 매트릭스가 보여준 미래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흥미롭다.
누군가에 의해서 조정될 수도 있는 의식, 누구나 쉽게 조작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선한 의미라고 하지만 원하는 바를 위해서 한 방향으로 조정하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이를 받아들일 뿐 만 아니라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세상은 살기엔 편리할지 몰라도 인간이 가지고 고유의 개성과 다름에서 오는 다양성은 사라진다. 이런 걸 보면 지금 현재의 모습과 큰 괴리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느새 누군가의 의도로 대중의 의견이 방향성을 잃어버리거나 무작정 한 방향으로 끌려가는 걸 느꼈을 때가 많은데 이런 세상이 바로 왕과 같은 사람이 원했던 세상이랑 뭐가 다른가
왕이 자신의 후계자는 비록 인류의 영생이라는 목표를 위해 문자를 소멸하지만 인간 개개인의 감정이 아닌 인류의 깊이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는 서정을 이해하는 사람... 즉, 그런 문자와 문학을 없애기 위해서 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일견 설득력이 있어 더 무섭게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왕과 서정시는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조금은 두려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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