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동급생>은 프레드 울만 (Fred Uhlman 1901~1985) 의 중편소설이다. 작가는 독일 출생이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후 독일을 떠나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영국에 정착한 화가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971년 노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7년 재출간되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동급생>은 1930년대 초 독일 서남부 슈투트가르트를 배경으로 유대인 소년과 독일 귀족 소년 사이의 순수하면서도 낭만적인 우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유대인 의사의 아들인 한스 슈바르츠는 16살로, 어느 날 그가 다니는 학교에 귀족 집안의 소년이 전학을 온다. 그의 이름은 콘라딘 폰 호엔펠스. 그는 한스가 이상형으로 꿈꾸던 바로 그런 친구였다. 한스는 '그의 당당한 자세, 예의 바름, 우아함, 잘생긴 용모에 끌렸'고, 친해지기 위해 서서히 다가간다. 


한스의 뜻대로 두 소년은 친구가 되어 함께 기차 여행도 하며 시도 읊고, 삶과 종교에 대한 진지한 대화도 나누며 둘만의 우정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듯 보이던 이들의 우정도 시대를 뒤덮고 있는 광기 앞에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스가 처음에 콘라딘을 보고 강하게 끌린 것은 그가 '우리 역사의 일부'인 호엔펠스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명문가가 배출한 인물들을 한스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이 바로 자신의 나라 독일을 빛낸 인물들이었기에 한스는 그들의 후손인 콘라딘과 그토록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한스의 아버지는 합리적인 인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에게서 동시에 존경 받는 평판 좋은 의사'이다. 그는 동화된 유대인으로서 시온주의자를 혐오한다. 이스라엘이 2천년이나 지난 지금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탈리아인들이 로마 시대에 한 때 독일을 점령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짓'(p.82)이라고 생각한다. 


한스와 한스 가족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혈통만 유대인일뿐 그들은 조국인 독일을 사랑하고 독일을 위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독일의 국민이다.

그러나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이 알던 세계가 아니며 그것은 한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토록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와의 반짝이던 우정도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빛을 잃어가고 한스와 콘라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평온하던 시절 한스와 콘라딘은 매일같이 고민하며 이야기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야 이 잘 안 되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p.70)


이 책의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은 두 소년이 함께 나누던 이런 고민들을 떠올리게 하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만든다. 영어 제목인 <Reunion> 처럼 이들이 다시 만나 이야기 나누는 그 내밀하면서도 소중한 순간들이 보고 싶어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3-26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얇은데 참 울컥한 작품이죠. 전 이 책 다 읽고 팔아야지 했었는데 아직 갖고 있네요. ㅎㅎㅎ

coolcat329 2021-03-27 06:59   좋아요 0 | URL
네...가슴이 미어진다는게 이런 상황이 아닌가 싶어요. 참...ㅠㅠ

han22598 2021-03-30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작년에 읽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아마도 앞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책들...참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coolcat329 2021-03-30 13:31   좋아요 0 | URL
읽으셨군요...맞아요. 이 책의 처음과 끝은 참...잊을 수 없네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마가렛 애트우드의 <증언들>과 함께 2019년 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작품으로, 흑인 최초의 부커상 수상이라는 점에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저자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1959년, 영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백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흑인으로 지내며, '1982년 연극학교를 졸업하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한계로 연극 활동에 제약이 따르자 직접 흑인 여성 극단을 창립하고 흑인 페미니즘 문화 운동을 벌였다.'(p.630 역자해설)


작가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이 소설은 고국을 떠나 영국에 정착한 흑인 여성들의 삶을 다각도로 보여줌으로써,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영국 흑인여성의 삶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린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함께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소설에는 총 12명의 흑인 여성이 등장한다. 10대부터 90대 노인까지, 각각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온 12명 흑인 여성의 삶을 한 챕터씩 레즈비언 연극 연출가 앰마를 시작으로 다채롭게 보여준다. 12명의 여성은 혈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한 다리 건너 연결되어 있기도 하며,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친구, 동료로 서로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어 재미있다. 


'자신을 따돌리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여성, 상처 속에서도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 앞만 보고 나아가는 여성,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주 노동자로 열심히 사는 여성,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위해 열심히 사는 여성,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지만 당당히 자신의 얼굴을 드는 여성 등 사연이 없는 인생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주체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12명 개인의 역사이지만 이들의 삶은 전체 흑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큰 그림으로도 다가온다. 

각기 다른 12개의 이야기를 연결해가며 숨가쁘게 읽다보면 어느새 에필로그에 다다르는데, 12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24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도 많고, 🌟5개니까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서점에서 두께 보고 놀라서 망설였어요ㅋ)

coolcat329 2021-03-24 20:12   좋아요 3 | URL
저는 이 책 읽고 저의 무지와 편견에 놀랐어요. 젠더프리라는 것도 처음 알았구요. 페미니즘이란게 단어 몇개로 정의내릴 수 있는것도 아니고 수많은 개개인에 따라 페미니즘의 얼굴도 변하는 거더라구요. 같은 레즈비언끼리도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엄마와 딸도 다르고, 레즈비언 커플들 사이에서도 상하지배 관계가 나타나고 등등... 제가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들이 있더라구요. 제가 너무 우물안 개구리 같았어요. 꼭 읽어보세요. 새파랑님 추진력이 또 대단하시죠~~😅

새파랑 2021-03-24 20:29   좋아요 1 | URL
많이 느낄 수 있는 책인가 봅니다. 추진력은 없지만...꼭 읽어보겠습니다~!

얄라알라 2021-03-24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한달음에 읽던 때의 감동이 리뷰읽으니 되살아 나네요. 버나딘 에바리스토 작가님, 대화할 때도 에너지가 엄청 나시더라고요^^ 역자 해설 페이지가 630쪽 넘어가야 있었군...정말 길었던 책이군..^^ 하면서 또 읽고 싶어지네요

coolcat329 2021-03-24 21:47   좋아요 2 | URL
작가 인터뷰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얄라님도 이 책 좋으셨군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1-03-24 2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 저는 소설에서 캐릭터들이 자기표현력 강렬하고 매력적이어서 작가도 어느 정도 비슷하겠거니 하고 막연히 상상했는데, 패션니스타에 바디 랭귀지의 자신감에....홀딱 반했어요^^

coolcat329 2021-03-24 22:21   좋아요 3 | URL
저 방금 얄라님 글 들어가서 에바리스토 인터뷰 보고 왔습니다. 사진보다 훨씬 젊고 세련되고 부드러워 보여요. 목소리도 지성미가 흐르고 당당하고...외모보고 혼자 판단했던 제 생각이 또 틀렸네요...ㅠ

얄라알라 2021-03-24 22: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coolcat님도 그렇게 보셨네요. 패션, 색감 정말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지 않나요. 저는 역으로 한살 한 살 올라갈수록 좋아하던 색을 다 버리고 무채색으로 가는데 에바리스토 작가님 의상, 헤어밴드까지....매력 뿜뿜이시더라고요^^

scott 2021-03-25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리뷰 읽으니 더더욱 구매욕이 ❣️
[페미니즘이란게 단어 몇개로 정의내릴 수 있는것도 아니고 수많은 개개인에 따라 페미니즘의 얼굴도 변하는 거]
이말씀에 동감 ~~
우리 사회가 아직도 넘 무지 합니다
꾸준히 읽고 또 읽으며 배워야 ~*

coolcat329 2021-03-25 12:27   좋아요 3 | URL
네,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무지한 사람이었는데 이번에 이 책 읽으며 책 열심히 읽자~또 느꼈습니다. 🥲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는 1995년 발표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4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탄압이 심해지자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 뇌샤텔에 머물게 된다. 난민 신분으로 시계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하면서도 헝가리어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당시를 <문맹>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문맹> (p.89,90)


<어제>의 주인공 토비아스도 시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낯선 나라의 말로 글을 쓴다.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과거를 가슴에 묻은채, 그는 타국에서 상도르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도둑이며 거지이며 창녀였다.'(p.27)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은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훅하고 내 가슴에 꽂힌다. 

이 소설은 150페이지쯤 되는 짧은 소설로 작가의 글이 늘 그렇듯이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가 낯선 타국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공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살던 그 시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망명자들이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보고 술집의 종업원은 토비아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네 외국인들은 맨날 조의금을 걷고 맨날 장례식을 하는군요."(p.63)


또 이런 대화. 


"나, 안 죽었어?

"네가 왜 죽어?"

"가스를 열어놓았는데."

"일주일 전부터 가스가 끊겼어. 돈을 내지 않았거든. 전기료도 마찬가지야. 그것도 곧 끊기겠지."

(p.127)


이 세상은 이들에게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은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은 '집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 '끝이 없는, 넓고 곧은 길'이다. 

낯선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p.121)


이들의 삶에 다른 대안은 없다. 꿈과 희망은 '현재'의 걸림돌일 뿐이다. 

오히려 꿈을 내려놓는 순간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 거야." (p.145)


사랑을 모르고,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기에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삶, 그래도 신조차 필요없는 삶...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망명자, 이방인의 삶이다. 


역시나 내 눈앞에 예고없이 불쑥 나타난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쓸쓸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p.149) 


작가가 되고자 한 그의 꿈, 한 여인을 향한 애절한 사랑은 그저 '어제'일 뿐이다.

그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22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건 다른 표지군요(구판절판~)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네요 ㅋ어제와 오늘 표현이 좋네요 (150페이지라니 바로 끌립니다^^)

coolcat329 2021-03-22 11:47   좋아요 3 | URL
네~저는 개정판 못 구해서 구판 겨우 구해 읽었습니다. 책은 얇은데 내용은 참...여운이 짙습니다~~

청아 2021-03-22 1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체 이야기로 인해 마지막 문장이 너무 강하게 와닿았어요!
잘 정리해 주셔서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scott 2021-03-23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이문장속에 작가 아고타의 사상이 응축 되어 있네요 감동이 두배 살아남 !!

coolcat329 2021-03-23 11:55   좋아요 1 | URL
담담하지만 많은 것들이 응축된 문장...저도 같은 느낌입니다.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맹>은 '자전적 이야기'로서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을 특유의 깔끔하고 절제된 언어로 보여준다. 

그녀는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4살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쓰기를 좋아했던 영특한 소녀였다. 어린 동생에게 넌 주어온 아이라며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인생에서 찾아보기 힘든 행복한 모습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찾아온 시기는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과 헤어져 낯선 도시의 기숙사에 들어간 후부터라고 한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소녀 시절, 작가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p.34)


<문맹>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이야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작가가 스위스로 망명하면서 자신의 모국어를 상실하고, 일 외에는 할 일도 어떤 희망도 없는 삶 속에서 오로지 다시 글을 쓰기 위해 '미지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는 그 험난한 여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 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p.52)


스위스 난민 생활 5년 후 그녀는 학교에 나가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동안은 말만 했을 뿐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읽지 않고 5년을 살았는지 그녀는 이상하다. 

2년 후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 수료증'을 받은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 프랑스어로 글은 못 쓰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p.112)이라고 다짐한다.  


낯선 타국에서의 삶은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막'과도 같은 삶이었지만, 그녀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말로 글쓰기도 힘든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끝까지 썼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이 짧은 '자전적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비장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p.11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21 15: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무살이 넘어서 자유를 준 국가 언어를 배우면서 전쟁으로 인한 충격과 상실에서 멈춰버린 자아가 치열하게 쓰고 또 썼다는것 자체가 인간 승리인것 같아요. 5년동안 스위스에 준 공장에서 일만 했다고 학교는 그후 난민 공동체 도움으로 다녔다고 하네요.

coolcat329 2021-03-21 16:01   좋아요 3 | URL
아 난민공동체 도움으로 공부한거군요. 저는 5년 동안 공장에서 번 돈으로 드디어 학교 들어간 줄 알았어요.
네...정말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바람돌이 2021-03-2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언어로 읽는 것도 난감한데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책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천재여야 하는걸까요? 가끔 사람들의 이런 능력은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 아고다 크리스토프는 저에게는 정말 강렬한 작가인데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겟네요. 오늘도 좋은 책을 한 권 보관함에 넣어가니 알라딘 서재 마실 성공입니다. ^^

coolcat329 2021-03-22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어로 글 쓰는 것도 힘듭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 쓰는 작가들 정말 천재입니다. 나보코프, 쿤데라, 콘라드...이 분들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430)


이 작품은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3부작 소설이다. 

1부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6, 1988,1991년, 2~3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각기 독립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작품이 동시에 번역되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나오게 되었는데, 1부와 2, 3부는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나 세 작품이 내용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부 2차 세계대전부터 2부 구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3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현재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부는 대도시에 살던 쌍둥이 소년이 전쟁을 피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 K라는 소도시(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시작한다. 

처음 보는 손자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포악한 할머니와 생활하며, 전쟁이 가져다 준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 형제는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한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주먹으로 때리고 급기야 혁대로 서로의 알몸을 갈기며, 할머니가 소리 지르면 차라리 때려달라고 할 정도로 폭력에 익숙해진다. 또한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하고, 굶주림에 익숙해지기 위해 단식연습, 구걸,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 더 나아가 생명을 죽이는 잔혹연습까지 하며 모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죽일 게 있으면 저희를 불러주세요. 이제부터 죽이는 일은 저희 몫이에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 짓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엉?"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저희는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에요." (p.62)


소년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 폭력으로 응징하기에 동네 아이들에게도 '미친놈들'로 통한다. 누군가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한치 망설임없이 죽여주기까지 하는데, 쌍둥이에겐 그것이 살인이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일을 해줬을 뿐이다. 


1부는 쌍둥이들의 이런 여러 에피소드들로 구성, 전개되는데,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문체와 충격적인 내용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짧은 장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잔혹 동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런 과장되고 자극적인 우화는 참담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이 어린 것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을지를 알게 해주기에, 나는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인간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이런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작가는 1부에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1부 <비밀 노트>에서는 그 어떤 고유명사도 나오지 않는 반면, 2, 3부에서는 쌍둥이를 비롯해 모든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1부가 단순한 우화 형식인데 반해 2, 3부는 1부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감정은 묘사되지 않지만 내용은 보통 소설의 형식으로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는다.


이 책은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말을 아껴야 할 듯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5분도 안되서 몸 속으로 강렬하게 흡수되었던 1부의 이야기만 살짝 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삶은 결코 쉽지 않아.' 였다. 그렇다. 그 어떤 슬픈 소설도 인생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인 슬픔과 고통을 능가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 (p.430)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3-20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하다가 제목보고 ‘에그머니나!‘했습니다ㅋㅋㅋ잔혹동화며 그로테스크한 것도 더없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덕분에 정리가 잘되었어요!😊

coolcat329 2021-03-20 11:51   좋아요 3 | URL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ㅎ그냥 읽어보세요~~이 말만 맴돌았어요. 빈약한 글인데 쬐금이나마 정리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3-2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이게 더 좋네요 (게다가 양장~!)
아직 읽기시작 안했는데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1-03-20 13:5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에곤 쉴레 표지로 사셨죠? 기대하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얄라알라 2021-03-20 14: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유명사를 배제한 글쓰기의 이유는, 저런 고통과 폭력이 누구나의 이야기이자 경험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coolcat님의 멋진 리뷰 읽으며 혼자 궁금해해봅니다

coolcat329 2021-03-20 16:39   좋아요 1 | URL
네~저도 얄라님 의견에 동감이에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 작가가 고유명사없이 우화 스타일로 쓴거같아요. 리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