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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ㅣ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백발의 노인에게도 젊은 날의 아침이슬같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원로 가곡 작곡가들 탐방기사를 쓸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일모레 팔순을 넘보는 나이에도 프레쉬한 연애를 꿈꾼다고 말했다. 20대의 나이였던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팔순의 노인들에게 현실의 사랑이 어렵다면 과거 청춘의 풋풋하고 아련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린다고 무슨 흠이 될까. 북독일 출신의 작가 지그프리드 렌츠가 2008년에 내놓은 노벨라 <침묵의 시간>도 그런 청춘의 사랑에 관한 기억이다. 1926년생이니 작가의 나이 현재 84세다.
열아홉살 소년(아니 청년)에게 영어 선생님 슈텔라에 대한 기억은 평생의 가슴속 고이 간직할 영원한 사랑이 되었다. 발트 해를 낀 작은 어촌 마을 학교를 배경으로 한 크리스티안 소년의 이야기는 줄줄 눈물 흘리게하는 슬픈 연애소설이 아니었다. 슈텔라 선생님의 장례식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중편은 소설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한번도 호흡을 멈추지 않는다. 19세 감수성 풍만한 소년은 사랑했던 아마 사랑이라고 여겼던 그 깨끗한 마음의 상태를 한번도 흐트리지 않고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그는 도저히 짧았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얘기하면서 허튼 순간으로 낭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상의 여선생과 연하의 남학생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금지된 사랑이고 신성한 학교에서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내내 독자들은 그가 설익은 사랑으로 선생님을 자살하게 했다든가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부모속을 썩였다든가 학교로부터 비난과 퇴학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든가 하는 상투적인 사건을 상상할 수 없다. 그저 사랑하는 선생님을 잃은 그의 마음을 보듬어주지 못해 답답할 뿐이고 장례식에 조사를 읽지 못하겠다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픈 생각으로 가득찰 뿐이다.
가끔씩 반 높임체의 어투를 써서 우리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고 다시 장례식과 선생님과의 추억을 오가며 별빛같은 청춘의 아픔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전체 이야기속에서 선생님과 함께 갑판위에 서 있던 나머지 한명이 누구였을까, 선생님에게 크리스티안이 아닌 미래를 약속한 남성이 있었을까, 그래서 슈텔라선생님은 괴로울 수 밖에 없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크리스티안의 입을 통해 듣는 청춘의 사랑이야기는 거기까지다. 슈텔라선생님은 크리스티안의 눈에 비친 그대로가 더욱 아름답고 영원성을 가지니까.
핀란드에서 배를 타고 발트해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에게 있다. 덴마크에 도착하기 전에 아마 북독일의 해안을 지나쳤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이 가슴앓이를 했던 그 어촌마을도 어디쯤엔가 있었을 것이다. 울음도 채 나오지 못하는 그의 아린 가슴을 지그시 붙잡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발트 해의 한 마을을 눈앞에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