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나를 위해 웃다>의 젊은 작가는 분명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며 가볍고 씩씩합니다. 일감이 그래요. 그래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나를 위해 웃다>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모두 그렇습니다. 일감이 그래요. 독자들 또한 그녀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게 느낍니다. 덕분에 책읽기는 한층 수월해집니다.
때론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작가의 목소리가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에 따라 종종 다르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무게’가 필요이상으로 희석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식의 ‘무게’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 아쉬웠고, 후자의 경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한 작품 한 작품 읽을수록 작가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나머지 종국에는 아쉬움이 익숙해짐으로 슬며시 변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가 빠졌네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 작가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하지만 절대로 선을 넘지 않습니다. 매우 단하하고 정제되어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입니다. 생각해보면 절제된 목소리는 ‘밝고 경쾌하고 가볍고 씩씩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또 한번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무튼 작가의 목소리는 맞보기를 하듯 양쪽을 모두 엿봅니다. 작가의 목소리가 가볍지만 전혀 경박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저래 작가의 목소리는 가벼운 충돌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 중 하나가 이미지의 여백이고요. 술술 읽히는 가운데도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그려보게 하는 힘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은 큽니다. 젊은 작가다운 감수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그간 우리 소설들이 주로 다뤄왔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아쉽고도 아쉬웠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맴도는데 말이죠.
덧붙임.
피츠제럴드의 단편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경우’를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 ‘나를 위해 웃다’가 무척 좋았습니다.
궁금증.
<나를 위해 웃다>는 작가의 첫 소설집입니다. 그런데 해설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이 언급되는 단편 ‘스톤피시는 어디로 갔을까?’는 왜 수록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