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불필요한 선입견이나 기대심리에 간섭받지 않고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죠. 선입견이나 기대심리를 대신하는 것은 호기심.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독서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편안한 관계맺음의 시작일 겁니다.
<늑대의 문장>은 생경한 작품들로 채워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는 용감하게도 전통적인 방식의 이야기를 포기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로 이야기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웁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작품은 줄거리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고, 읽고 난 후 독자의 머리 속에 남는 것은 낯선 이미지들과 만났던 기억뿐입니다. 마치 <안달루시아의 개>같은 전위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솔직히 두 세 차례 끝까지 읽기를 포기할까 생각했을 만큼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서두르지 않고 읽었습니다. 낯선 이미지를 섬세하게 더듬어내는 탄탄하고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문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문장도 허투로 풀어놓지 않으려는 젊은 작가의 끈기가 엿보였고, 이는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일 겁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종종 과욕으로 비춰질 때가 있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의 불쑥 튀어나와 쫓아가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의심도 해보았습니다. 사실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기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작가는 단편 하나 써내는 것도 버겁고 버겁지 않았을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심을 불식시킬 만큼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섬세한 문장을 아름다웠습니다.
재미있는 책읽기였지만 작가에 대한 판단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싶습니다. 작가를 파악하기에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은 턱없이 부족하고, 작가가 만든 세계를 조망하기에도 불충분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든 세계는 아직 미완이기에 더욱 쉽지 않습니다. 아홉 편의 단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일궈낸 일정부분의 성취, 그리고 기대와 우려가 섞인 조심스러운 전망이 고작일 것입니다.
여하튼 젊은 작가 김유진의 첫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분을 책 말미에 실린 한 평론가의 ‘해설’이 잡쳐놓았습니다. 책장을 덮은 뒷맛이 영 안 좋아요. 무슨 소린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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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소설은 태생적으로 대중과 소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택한 글쓰기의 방식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 성과는 두고봐야할 겁니다. 그런데 이 소설집 말미에 실린 문학평론가의 글은 스스로 소통을 거부하는 해설이고, 독자와 작품의 소통마저 방해하는 무책임한 해설이었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해설인가요?
잘난척하기 바쁜 이 평론가는 젊은 작가의 소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합니다. 20여 페이지의 지면 가운데 대부분을 지라르와 켐벨의 이론을 이야기하는데 낭비하고 있으니까요. 지라르와 켐벨의 이론을 들먹거린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야기한 ‘희생물’과 ‘신화적 비방’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도 아닐 뿐더러, 독자가 김유진의 작품에 다가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점은 지라르를 언급하고, 켐벨을 예로 들기 위해 작품의 팔과 다리를 싹둑싹둑 잘라버리기도 하고, 정작 작가의 작품이 뒷전으로 밀리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비교적 후반기에 발표된 <낙타여행>이나 <고요>같이 작풍의 변화가 감지되는 작품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고, 나머지 작품마저도 신화 어쩌구, 고대생물 어쩌구, 폭력 어쩌구... 하는 숲이 아닌 나무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소설집의 주인은 작가이고, 작품집의 해설은 작품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합니다. 앞서 언급한 젊은 작가가 낸 첫 소설집의 성과와 전망이 해설에 어울릴 것이고, 이것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에게 필요한 해설일 겁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지라르와 켐벨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거든 딴 동네로 가십시오. 제발! 20여 페이지의 짧은 지면은 작가가 어렵게 잉태한 아홉 편의 단편들만 꼼꼼히 짚어내도 모자랍니다.
점입가경인 것은 정작 작가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심도 깊게 추적하지 않던 평론가는 해설의 말미에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합니다.
김유진이라는 작가가 고결해지고 믿음직스러워지는 이유, 그것은 그가 목소리의 무력함, 말하기의 무력함,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무력함을 이와 같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p.282)
무슨 강아지 밥그릇에서 개밥 튀어 나오는 소리입니까? 앞서 네댓 줄 언급한 라캉과 루카치를 근거로 이런 소리를 한 건가요? 소설이라는 장르는 무력하지도 않을뿐더러, 작가도 역시 그렇게 이해하지 않을 겁니다. 대체 소설이라는 장르를 무력하다고 믿는 작가가 소설을 쓰는 원동력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작품의 주인을 이선으로 제쳐놓은 주제에 작가를 칭찬하기 위해 ‘고결’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남용하지 마십시오. 입에 발린 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한동안 우리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독자와 소통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자의식 과잉의 작가와 지식의 일방통행만을 강요하는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리그가 지겨웠던 것 같습니다.
강요는 곧 폭력입니다. 평론가님, 소통을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는 말아주세요. 당신들의 그런 태도가 독자들을 읽기도 편하고 씹기도 부담 없는 해외문학을 내모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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