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라이터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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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서관에서 닉 혼비의 <피버피치>가 스포츠서가, 그것도 축구분야에 꼽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어이없는 분류가 오히려 닉 혼비에게 어울리는 거 같아 키득거렸다. 닉 혼비라면, ‘우스꽝스럽지만 불만 없음!’, 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스포츠라이터>는 장편소설이라는 문구가 책표지에 버젓이 인쇄되어 있기에 <피버피치>같은 황당한 대접을 받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제목이 풍기는 명백한 뉘앙스로 인해 누구처럼 생각없는 독자는 분명히 스포츠에 관한 신나는 소설로 오해할거다. 그러나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깨닫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는 ‘스포츠’ 소설이 아니다. <스포츠라이터>는 ‘라이터’인 한 남자에 관한 쓸쓸하고 서늘한 소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소설을 쓴 리처드 포드라는 정말 글을 ‘개잘쓰는’ 작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스포츠라이터>를 퍽이나 오랫동안 읽었다. 몇 주가 걸렸는지 모른다. 초반 80페이지 가량은 아마 세 번쯤 읽었을 거다. 지루하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출몰한다. 인물들의 사연을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며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멘탈붕괴 직전이다. 겉으로는 부족한 거 없이 멀쩡하게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 들. 하지만 속은 균열 그 자체다. 이런 지경이니 술술 책장을 넘기며 폭주하는 즐거운 독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작품이 진정 무서운 것은 ‘희망없음’과 ‘멘붕’을 이야기하는 태도다. 앞서 말했지만 주인공은 모두 먹고 살만하다. 그러니까 그냥 사는 건 문제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분명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남은 인생도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여태껏 고수해온 삶의 태도가 그들을 붕괴직전으로 몰고 갔다는 거다. 꼰대가 된 그들은 이것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다. 아니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기껏해야 애써 멀쩡한 척 연기하며 버티거나, 머리통에 총알을 박고 자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들이 좀비처럼 시시때때로 출몰하니 애초에 훈훈함과는 삼만 광년 떨어져있을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해봤다. 레이먼드 카버가 장편소설을 쓴다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을까? 그만큼 <스포츠라이터>는 미국적이다. 부활절, 대도시, 중산층 거주지역의 풍경은 너무 미국적이라 낯설고 또 낯설다. 특히나 뉴저지, 뉴욕, 디트로이트 등 동북부 도시의 봄풍경을 내가 어찌 생생히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인공의 상처와 어리석음에 크게 공감하는 순간 ‘미국소설’ <스포츠라이터>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스타인벡과 피츠제럴드, 셀린저, 필립 로스 등을 언급하며 미국소설 어쩌구저쩌구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 번쩍-!!!했기에 집어치운다. 이건 내가 오늘 내린 결정 중 가장 현명한 결정인 거 같다.)

 

어리석음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스포츠라이터>를 읽으며 느낀 건데, 인물의 어리석음은 독자를 사로잡는 가장 큰 무기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려보면, 주인공들은 대개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에 꼭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만다. 그 결과 주인공은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다. 파국, 파멸, 파탄, 파경, 파산... 이 모든 것은 어리석은 결정을 한 주인공의 몫이다. 퍼뜩 떠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위대한 개츠비>가 그렇고..., 영화 <레슬러>가 그랬고..., 드라마 <로스트>가 그러하며..., 챈들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어리석은 자에 대한 연민은 분명히 독자와 관객을 사로잡는 비급이었던 것 같다.(적어도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일지라도 말이다.) 더욱 슬픈 것은, 본인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는 점이고, 그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거다.(아, 문득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싶다. 어리석음의 종결자로 불릴 만한 인물로 누가 있던가?)

 

리처드 포드는 퓰리처상 수상작가다. 수상작은 <스포츠라이터>의 후속작 <독립기념일>이란다.(<스포츠라이터>는 제목을 ‘부활절’로 달아도 무방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오지게 미국적이라 정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읽고 싶다. 편집자님 역자님 들이시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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