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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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1)물질에 대한 욕망, 2)근대화, 3)제국주의, 4)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의 갈등, 5)종교다.

유럽에서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아시아의 향신료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유럽 여러 국가들은 대항해시대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신대륙의 금과 은 그리고 식민지는 유럽 근대화의 동력이 된다.
근대화를 통해 얻은 힘은 서구 열강에 제국주의 열풍이 불게 하고 이 열풍의 주류는 자본주의로, 소외된 자들은 사회주의
그리고 극단적으로 파시즘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 흐름의 근본 바탕은 인간의 욕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앞세워 욕망을 숨기고 미화시키고 거룩한 대의명분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자기애, 그리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욕망은 인간을 점점 악한 광기에 휩쌓이게 한다.

세계사를 움직인 힘들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 입은 근대화를 넘어선 탈근대화시대의 도래.
신자본주의의 독주와 이를 통한 거대 기업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

지금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터이다. 겉보기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로 발발한 것같지만 그 이면을 보면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 이상 이념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기독교 국가들이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더 깊은 내면에는 구시대적인 제국주의의 단맛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기 위한 꼼수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이슬람의 테러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극소수의 원리주의자들이지만 그들의 테러를 미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슬람화된 국가들이 대부분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했던 서구 열강이 물러난 자리에 이슬람이 피어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이제 모두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면서 슈퍼맨에 가까운 힘을 가진 기계인간이 곧 탄생할 것이다. 또는 1980년대 영화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신기술를 스스로의 몸에 장착한 사피엔스이면서 사피엔스가 아닌 초사피엔스가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혜택(?)은 지금 세계를 보이지 않는 곳에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인 그들에게만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흐름이라면 대한민국의 소시민인 '나'의 미래는, 그리고 소시민의 아들, 딸인 내 자녀들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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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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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에는 더이상 무엇인가를 소유할 필요가 없다. 단지 접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물리적 시장이 사이버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물리적 시장은 방문해서 물건은 구입하지만 사이버 시장은 접속해서 서비스를 체험하는 것이다.
물리적 시장에서의 판매자와 구매자의 만남은 일회적이고 단골이 아닌 이상 흔적이 거의 남지 않지만 사이버 시장으로의 접속은 흔적이 남는다.
접속 일시와 구매상품 등등. 더구나 접속을 위해서는 공급자가 내건 조건에 맞는 개인 정보를 반드시 제공하여야 한다.
메일로, 핸드폰 메시지로 또는 우편으로 끊임없이 각종 상품에 대한 정보가 날아든다.
핸드폰은 정기적으로 특정 은행이나 보험회사로부터 전화가 온다.

인터넷서점 메인화면에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내가 최근 구매한 분야 책들을 소개한다.
나는 기업들에 완전 노출되어 있다.

요즘 '밴드'가 유행이다.
나도 몇개의 밴드에 가입 중이고, 그 중 몇개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2개의 직장 모임과 1개의 취미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 중이고 참여 계획 중인 종교단체 모임도 1개 있다.

요즘 세상은 끼리끼리 모여야 사는 세상이다. 
모이지 않으면 도태된다.
특히 사이버상 모임은 접속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물론 오프라인 모임도 초대받지 못하면 참여할 수 없다.

접속하지 못하는 자는 정보도 문화도 공유할 수 없고 정보화의 시대에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더불어 접속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는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조직사회의 생존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주위 모두가 어딘가 접속하기 위해서, 접속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글로벌리즘이 강조되는 현 시대에 눈에 보이는 제국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제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막강한 대기업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국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와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혹은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것이 상품이다. 
문어발씩 기업을 운영하는 대기업의 기저귀와 분유를 먹고 자라서 대기업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임종하고 대기업이 운영하는 상조회를 통해 안식을 맞는다.

지난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였다. 우리는 아무런 의문 없이 화이트데이니까 여자친구가 나에게 당연히 사탕을 사줘줄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화이트데이에 왜 건강에 좋지 않다고 평소 사먹지 않던 사탕을 평소의 몇 배의 돈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가?

결국 세상은 이윤추구를 위한 상업적 욕망에 변질되었다.
교육, 정치, 인간관계, 문화 등등 모든 요소에 상업적 동기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광고, 스마트폰, 게임 등등 하루종일 접하게 되는 순간순간 스쳐가는 아니면 깊숙히 참여하게 되는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돈이 함께 한다. 하루도 몇번씩 돈을 위해 접속을 하고 결제를 한다. 모든 관계가 상업적인 목적이 내재하고 있다.

사이버상 누군가와 끊임 없이 잡담을 나눈다. 네크워크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허하다. 남는 것이 없다. 진실한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진실한 관계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을 접촉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산을 알기 위해서는 사이버상 검색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진정 그 산을 알려면 그 산에 가서 그 산에 올라가봐야 한다.
쇠고기는 사이버상 사진으로 알수 있지만 진정한 쇠고기는 먹어봐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쇠고기를 사이버상으로만 보려고 한다. 쇠고기를 먹어보지 않고 쇠고기를 안다고 한다.

최근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있었다. 우리의 삶이 사이버로 이동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대세이다.
1993년 실버스타 스텔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영화 '데몰리션맨'이 개봉하였다.
내용 중에 여주인공 산드라 블록이 과거에서 미래로 온 스텔론에게 '섹스'를 하자고 제의한다.
... 그런데 미래는 신체적 접촉이 법으로 금지된 상태, 따라서 그 섹스라는 것이 '사이버상 섹스' 였고 피부가 접촉했던 과거에서 온 스텔론에게 이것은 '진정한 섹스'가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스텔론은 키스를 시작으로 '진정한 섹스'를 산드라 블록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균형이 필요한 시대이다. 물질적인 공간인가 사이버상의 공간인가가 양자 택일이 아니라 양자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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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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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법한 삶 가운데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을 정리해 두었다.
삶 속에서 누구나에게나 순간순간 일어나는 잡스러운 생각들이 저자에게는 상당히 특별했던 가 보다.
그래서인지 보통의 존재인 나에게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공감으로 다가온다. 
보통의 존재들이 그냥 넘어가는 잡스러움을 이렇게 끄집어낸 저자는 보통의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저자의 잡담들에 대해 나의 또다른 잡담들을 더해서 수다를 만들어 본다.

석원 왈 : 내가 정말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느 날 정열이 사라져버린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랑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제대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너무 빨리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종우 왈 : 맞다. 당신은 사랑에 대한 결론을 너무 쉽게 내리고 있다. 사랑은 순간적인 동물적 욕구로만 표현되어져서는 안된다. 동물적 욕구가 사라졌을 때 즉, 당신이 말하는 3개월의 떨림이 없어졌을 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어진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사막이 펼쳐질 때도 분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 속에서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 그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오아시스를 통한 갈증의 해소는 진정 사랑의 진정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만약 끊임없는 동물적인 흥분과 떨림만 지속된다면 결국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두의 육체와 감정을 고갈시킬 것이다.

석원 왈 : 과정이란 그 결과에 비하면 이토록 수고롭고 민망한 장면들이 많이도 연출되는 절차인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삶이 보기에 산뜻하고 간편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추함과 번거러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우 왈 :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청소년들은 화려한 조명 밑에서 모든 이들의 집중된 관심과 사랑속에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들에 열광하고, 성인들은 빌딩과 멋진 차와 옷을 가진 그들을 열망하고, 또는 TV 광고 속에 멋진 몸매들을 열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빛나는 자리에 가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길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쉽게 질투하고 비난한다. 
또 그들과 같이 되기 위해 일하기 보다는 로또를 사고 멋진 몸매를 위해 운동을 하기 보다는 살빼는 약을 먹는다. 물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공하는 이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이룬 것에는 '스스로 흘린 땀'이 없기 때문에 쉽게 잃게 된다.
빛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속에 있은 빛을 밝혀야 한다.

석원 왈 : 완벽한 비공개의 자유란 얼마나 갖기 어렵고 소중한지 공감할 것이다. 일탈이란,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타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의 집,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에서 언제든 가능한 것이다.
종우 왈 :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아무도 없는 나의 집에서의 소소한 일탈, 또는 직장 속에서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혼자만의 공간을 찾다가 결국 뛰어들어간 화장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중압감 가운데 살고 있다. 가정에서는 대출금, 자녀교육, 직장에서는 성과, 승진 등등 어디에서든 모든 것들이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어디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쉼을 얻을 수가 없다. 오직 개인적이고 사적공간이 필요하다. 최근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보는 눈'에서 벗어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성인 PC방이 여전히 유지되는가 보다. 캐캐한 냄새와 연기 속에 숨막힐 것 같지만 밀폐된 개인 공간이 허락되니까.

석원 왈 :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에게 이렇게 긴 역사도, 어떤 시공간의 차원에서는 그저 찰나에 불과한 순간밖에는 되지 않는다면서요. 이 작은 해파리의 운명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이토록 힘찬 움직임도 언젠간 정지하고 존재는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버리겠죠.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실밖에는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종우 왈 : 45억년의 지구나이에 비하면 겨우 100년 남짓 살아가는 인간의 생명은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그토록 찾아다녔나보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다닌 것은 진시황만이 아니다. 현대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찾아다니고 있고 또 사악한 존재들이 이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현시대의 각종 종교들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어찌보면 100년의 찰나의 순간이후 영원한 사후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망설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이것을 이용하는 사악한 마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약속하지만 실제 그들은 찰나의 100년의 순간조차도 엉망으로 만든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석원 왈 : 고통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대신 이렇듯 사막처럼 고요한 안식처를 갈망하게 하였다.
나는 오늘도 집이 아닌 다른 곳, 이를테면 시내 대형서점의 어는 한 귀퉁이에서야 비로소 안식을 찾곤 한다.
종우 왈 : 혹자는 창의적인 것은 게으름에서 나온다고 한다. 눈앞에 무엇인가 처리해야할 일이 끊임없이 줄을 서 있다면 그것 이외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 너무 게을러져서 잠이 들어버리면 어쩔까? 그리고 깨어나지 않는다면... 지금 거리에 게으름에 빠져 노숙을 선택하지 분들도 있다. 게으름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고통으로 인해 몰아치는 폭풍우는 무엇인가 틀을 깨는 새로운 것이 일어나게 한다. 때로는 다 부서진 폐허를 만들어 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잠들수 있는 게으름을 나는 희망한다. 창조적이지 않으면 어떤가? 그냥 잠들면 어떤가? 다만 100년의 찰나같은 인생이라도 그냥 평안히 지내고 싶다.

석원 왈 :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으로 타인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우 왈 : 당연히 그렇수 밖에... 사람은 자기애로 충만한 존재이다. 아무리 이타적인 감정을 가지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이타적인 감정이 자기애를 극복할 수는 없다. 결국 자기애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고 결국 자기의 입장과 시각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입장도 시각도 결국 자기만의 것이 아닌가?

석원 왈 : 이제 나는 너에게서 완벽히 자유롭다고 말하는 순간, 깨닫는다. 결코 아직도 그럴수 없음을.
종우 왈 :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어떤 문제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졌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는 인간이 무엇인가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타락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완벽히 극복했다고 하는 그 부분에서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석원 왈 : "모든 게 쇼였어."
종우 왈 : 영화 '트루먼 쇼'처럼 고통스러운 내 인생이 그냥 '쇼'로 판명되었으면 좋겠다. 

비슷하다. 생각도 고민하는 것도... 성격도 비슷한 것같다. 나하고.
나도 보통의 존재여서일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까? 그래서 베스트셀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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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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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표회나 경연대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물러난 경험을 한두번씩은 보통 가지고 있다.
본디 자신의 실력이 상당함에도 왠지 주위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이고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여서 강한 열등감에 휩쌓이고 움추려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을 보여주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연약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때 주위 사람들의 기대란 결국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열등감에서 나오는 환상에 불과하다. '저기 저 대단한 사람들을 봐.  저 사람들에 비하면 당신은 너무 초라해서 우리가 기대할 것이 없어.'


상당히 오래 전에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다른 사람들의 지나가는 이야기에 흔들리게 하지 말라"라는 주제의 책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간에 무심코 던지 한마디에 흔들리거나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타인의 과제와 자신의 과제의 분리하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눈치를 보면서 내 인생을 흘려보낼수는 없는 것이다.
나 자신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부모라고 할지라도 내 자신의 인생에 나보다 더 진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직장에서 만나는 혹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야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당당해질 권리가 있고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현재를 당당하게 살기 위한 '용기'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과거와의 단절은 과거를 없는 듯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실패로 인한 주눅든 감정의 흐름을 끊으라는 것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의 감정이 현재의 또다른 실패의 연결고리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있다.
노아가 살던 세상은 죄악으로 완전히 물든다. 하나님은 이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시작할 계획을 하시며 노아를 통해 방주를 준비하신다.
대홍수 이후 세상의 물든 죄악은 사라지고 노아와 방주의 동물들이 새롭게 세상을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작은 프로젝트의 실패나 시험에 떨어져 낙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다시 지금 이 시점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실패는 단지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그 자리에 낙심하고 주저앉아 멈출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테니까.


아무리 내 삶이 실패로 이루어진 종합세트라 하더라도 항상 노아의 방주처럼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의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먼저 고민하고 지나갈 것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자신의 인생관이 정립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과제에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의 인생관이 정립될 때까지 과제수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인생관 정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물론 부모의 인생관을 자녀에게 심어서는 안되겠지만 자녀가 스스로 인생관을 잘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부모의 과제이다.
어렵게 가진 미움받을 용기로 무책임한 방임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 교리 중 '회개'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삶을 살다가 다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뚜렷한 인생관이 있다면 그리고 목표가 있다면 비록 실패한 삶이라 할지라도 다시 성공적인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뿔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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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결정적 논고 -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 049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9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 책세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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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의 대립에 대한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르는 이슬람 철학자이다.

처음부터 철학이 신학과 대립한 것은 아니다. 대립이 없었다기 보다는 신학의 힘에 억눌려 지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같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철학이 신학과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해 주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신학을 비합리적인 분야로 전락된 반면 철학은 이성에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로 과학의 발달로 인한 시대적 부흥에 함께 편승한다.

이제 철학은 신학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함부로 무너트릴 수 없는 범주의 것이다.
과학도 철학도 인간의 이성으로 여전히 해답을 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을 신학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과학의 발달하면 할 수록 인간의 이성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던 부분들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서 신학이 도리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저자 아베로에스는 1126~1198년에 활동하던 이슬람 철학자로서 당시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한 철학은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해 한창 미움을 받고 있었다.

저자는 이슬람의 <꾸란>이 철학을 금하지 않았고 도리어 철학을 활용해 신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할 수 있으며, 나아가 <꾸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오직 논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지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사유는 결국 사유 당시의 철학자의 지식과 인성, 그리고 시대적 환경과 분위기 등 개인적, 시대적, 지역적 환경의 범주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이해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믿지 못하던 당시 중세의 시대적 분위기는 (물론 현대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지만) 신학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중세 암흑기를 깨트리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근대화를 이끌게 되지만......

45억년의 지구 역사 중 현대의 과학이 확립된 것은 불과 200~300년 상간이고 지금도 계속 발달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지고 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천동설을 주장하였다.
세상은 언제든 개벽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도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는 관념들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우리의 머리 속을 가득 채운 관념들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인지한 상태' 또는 '그렇게 하기로 정한 규칙'에 가깝다.

창조주가 하늘과 땅과 인간과 동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누가 온전히 긍정하거나 온전히 부정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사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보이지 않는 것,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지구가 탄생한 것은 약 45억년 전이다. 
지구상 생명체가 나타난 것은 약 38억년 전이다.
지구상 호모사피엔스나 나타난 것은 약 20만년 전이다.
지구상 호모사피엔스가 과학적 성과를 거둔 것은 약 300년 전부터이다.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전 44억 9,980만년 동안 이 지구에 무슨 일 있었는지 누가 알수 있을까?
겨우 300년의 성과로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는 인간들은 어쩌면 또다시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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