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를 보자 흥분되었습니다.

아마도 피부일 테고...

그 사이는 피가 슬쩍 비치는...!

무엇보다 이 소설은 출간 전임에도 이례적으로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작가분이 경찰행정학을 전공하며 공부한 범죄 전문 지식을 책 속에 녹여내 생생한 현장감을 극대화했고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섬세한 묘사는 마치 진짜 범죄 현장에 와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게 했다고 하니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 않을까?!

"아빠는 사람을 죽이는

연쇄 살인마였고

나는 그 시체를 치우는 딸이었다."

먼저 사냥하지 않으면

그놈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메스를 든 사냥꾼



"안녕하세요. 형사과 강력팀 정정현 경위입니다."

새벽까지 일하느라 피곤함이 붙은 얼굴을 마스크 안에 숨기고 앞에 서있는 남자의 인상착의를 빠르게 살펴봅니다.

사복을 입은 젊은 남성.

이 더위에도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예의 바르게 신분증 목걸이를 걸고 온 그에게 못마땅했던 법의관 세현에게

"새벽 4시 47분에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습니다. 사건 현장이 인근 주민들 왕래가 잦은 곳이기도 하고 변사체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두 눈 가득 담기는 사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지만 이상하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든 세현.

낯설지 않다고 느낀 이유는 장기를 다 들쑤시고 신경을 잡아 떼어 늘려놓은 이 변사체가 유독 의과대 본과 1학년 여름방학 때 지겹도록 본 해부용 시체와 닮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어리고 현명하던 때 비슷한 사체를 봤던 순간이 기억 위로 스멀스멀 떠오르게 된 세현은 뒷걸음질로 부검실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달립니다.

오래전 자신의 손에 목숨줄이 끊긴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벅찬데, 그가 다시 살인을 시작했다는 결론에 이르자 누가 목구멍 끝까지 빵을 집어넣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 page 33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뜻의 용천.

이름 그대로 일급수 하천을 끼고 발전한 평화로운 도시에 첫 번째 사체가 발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쇄 살인 사건.

사체를 재단하고 실로 꿰맨 이 사건을 언론은 '재단사 살인 사건'이라 부르며 떠들썩한데...

세현은 단번에 눈치챘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이 바로 과거 자신이 죽인 아빠 윤조균이라는 것을.

조균이 잡혀 살인자의 딸임이 밝혀지면 출세는커녕 법의관으로 일할 수도 없게 됨은 물론, 그전에 먼저 조균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경찰보다 먼저 그를 찾아 죽이기로 다짐합니다.

정현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 할수록 어릴 적 보았던 살인범을 떠올리게 되며 과거 미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조용하게 사건을 묻으려는 강력팀 팀원은 그런 정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정현 역시도 혼자서 사건 조사에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정현의 덤덤한 목소리에 세현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물어보세요."

"혹시 미제 사건에 대해 따로 숨기고 있는 정보가 있습니까?"

세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헛웃음을 쳤다. 그에게 숨기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저는 서 과장님 믿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저에게 먼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왜 절 의심하세요? 전 형사님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용서받겠다고 나대는 거 받아준 죄밖에 없는데." - page 243

오직 법의관 세현만이 정현에게 힘을 실어주는데 오히려 사건을 조사할수록 세현이 뭔가 숨기고 있으며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세현이 진범을 잡고 싶다 했던 그 말은 진심일까?

연쇄 살인 사건과 세현은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리고 세현은 과연 비밀을 들키지 않고 정현보다 빨리 조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조금씩 좁혀오는 이들의 접점.

그 끝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죄책감을 가진 정현.

"경찰이 수사는 하겠지만, 이상하게 피해자가 계속 죽어도 범인은 잘 잡히지 않으니 기대하지 말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끝났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 page 159

21년 전 정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이 말.

그래서 더 범인을 잡고자 한 정현의 모습이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어릴 때부터 이미

나는 책임이 1그램도 들어있지 않은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을 참 좋아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 세진의 옷을 하나씩 빼앗아 껴입었다. - page 304 ~ 305

이런 생각이,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다니...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가면을 쓰고 그들의 감정이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이에게 우리는 '소시오패스'라 단언할 수 있을까?

먹먹히 남았습니다.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며 풀어나간 이 소설.

그래서 더 숨 가쁘게 쫓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상화에선 얼마나 멋지게 그려질지 또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르부아 에두아르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이혼했다 프랑스 책벌레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 전 프랑스 책벌레이자 지구최강 오지랖 남편을 둔 한국 욕쟁이(?) 부인이 미치지 않기 위해 쓴 '남편 보고서'를 읽었었습니다.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다.

다만 내가 '미친놈'과 결혼했을 뿐."

이보다 더 책벌레인 사람은 못 보았었고 무엇보다 이주영 작가님의 유머러스한 문체에 한껏 빠져들어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봄에 이들의 여행기를 읽었었습니다.

『여행선언문』

전작에 '지구 최강 오지라퍼 이동서점'이었다면 이번엔 한 발짝 더 나아가 '여행에 미친 지구 최강 오지라퍼 이동서점'이었던 그.

그럼에도 이 둘이 삶의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헤쳐가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역시나 최강의 부부라 여기고 있었는데...

어?!

순간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기필코' 그와 이혼했다는 그녀.

놀라움은 잠시 뒤로하고 또다시 펼쳐질 유쾌한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속 사정을 알아보려 합니다.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여행선언문》을 잇는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가슴 뭉클한 프랑스 책벌레 완결결정판

"팔자가 더 세지고 있다. 기분이 좋다.

삶을 풍요롭게 누릴 능력도 세졌으니까."

오르부아 에두아르



아주 사소한 일조차 그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도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모든 걸 알아서 해 주면서 조금씩 무기력해진 그녀.

현실적인 생활 감각이 없어지면서 사고의 흐름조차 뿌연 안갯속에 묻히는 듯...

'나는 과연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에두아르가 말을 건넵니다.

"너와 함께 살면서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아. 너는 나의 우울을 치료해주었어. 그런데 이번엔 네가 우울해진 것 같아. 나의 우울이 네게 갔나 봐. 정말 미안해..." - page 74

그렇게 이혼을 결정한 후 점점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게 된 그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혼'에 대한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누구나 삶에서 겪을 수도 있는 일 중의 하나일뿐인데 말이죠.

그래서 그녀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변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꾸고자 이혼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향한 엄마의 말.

"내 뱃속에서 어떻게 이런 또라이가 나왔지?"

그렇게 '또라이' 본연으로 돌아온 이주영의 한결 더 유쾌하고 다정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이혼은 결혼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다!'

전작들을 읽었기에 읽으면서 '맞아!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그 무엇보다 이혼을 하게 됨으로써 '관계란 끊어버리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 것'임을 증명해 보이는 이 둘의 요상한 로맨스는 결국 '나'라는 주체로 돌아옴으로써 느낄 수 있는 감정 그 이상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

남편은 별것 아닌 일로도 창피하고 짜증스러운 존재다. 남사친과 애인과 남편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남편인데도 말이다. 이 소중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창피함과 짜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남편을 남사친이나 애인으로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혼부터 하고 봐야 한다. 이혼이 장난이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았다 하겠지만, 나는 지금 정색하고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 page 90

평소 같으면 복장이 터져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라고 했을 테지만 이젠 서로 웃음을 건넬 수 있는 여유를.

이는 아마도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스스로 더 단단해지고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면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내가 내게 소중해지면,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에게 더 다정해질 수 있음에...

11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는 이혼 파티는 3개월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주영이 한국에 돌아가기 전 한번이라도 더 보자 파티'는 눈물과 위로 대신 유쾌한 웃음과 축복으로 가득하였는데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별에 대한 예의와 품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놓았을까요? 지금 내 옆에는 미소처럼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오는 모든 단어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 왜?

그녀의 말소리는 내게 후회라는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그녀 안에 본질적인 것이 남아 있다는 연약한 확신을 던집니다. 삶이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줍니다. - <우영에 대하여 by 에두아르> 중에서

좋은 사람과 행복해 보이는 그녀.

저 역시도 그녀가 '참 부럽다...'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의 주체성을 추구해야 함을...

나에 대한 예의를 위해 지금의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사리와 대나무 토토의 그림책
마리 티비 지음, 제레미 파예 그림, 이세진 옮김 / 토토북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이 그림책이 끌렸던 건 아름다운 그림체로였습니다.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수채 삽화.

그다음으로 눈을 돌리니 제목이 조금 특이했습니다.

고사리?

대나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갈피를 잡지 못했기에 더 끌렸던 이 책.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지 바로 펼쳐보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어쩌면 지금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고사리와 대나무



어느 지혜로운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두 아들을 부릅니다.

형에게는 '고사리' 씨앗을,

동생에게는 '대나무' 씨앗을

주면서

"이 씨앗을 심고 가꾸며 나를 기억해 주렴."

마지막 말을 남기곤 숨을 거두게 됩니다.

두 아들은 정성껏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기를 기다립니다.



형의 고사리 씨앗은 곧 싹을 틔우고 쑥쑥 자랐지만 동생의 대나무 씨앗은 몇 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동생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동생을 놀리고 비웃었습니다.

"네 씨앗은 이미 죽었어. 너희 아버지처럼 말이야."

그래도 동생은

"나는 포기하지 않아."

하며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 년째가 된 어느 날 아침.

동생은 늘 그랬듯이 대나무 씨앗을 심은 자리를 보러 숲으로 가니 어?!

그 작고 여린 싹이 돋아난 게 아니겠어요?



마침내 고사리와 대나무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숲을 이루자, 아버지는 형제의 꿈속에 나타나 중요한 말을 해 줍니다.

동생에게

"네가 묵묵히 버틴 시간은 바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단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뿌리가 대나무를 굳건히 세워 주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들들에게

"대나무와 고사리는 서로 다르단다. 그렇지만 모두 필요하지.

둘 다 이 숲을 멋지게 만들어 주거든. 인생의 어떤 날도 아쉬워하지 말아라.

좋은 날은 너희를 행복하게 하고, 힘든 날은 너희에게 경험을 준단다.

인생에는 둘 다 있어야만 하는 거야."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필요한 인생의 '고사리와 대나무'.

빠르게 번성하지만 따가운 햇볕에 쉽게 시들어버리는 '고사리'

싹이 트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뿌리를 내리면 단단하고 튼튼하게 자라는 '대나무'

'인생'이라는 숲을 가꾸기 위해선 싱그럽고 무성하게 퍼지는 고사리처럼 밝은 날도 필요하고, 인내의 시간을 거쳐 싹을 틔우는 대나무처럼 힘들지만 견뎌야 하는 날도 필요함을 보여준 그들.

이 묵직한 울림은 아이보다 저에게 와닿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저에게 인내해야 하는 날이 있기에 좋은 날은 더 행복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일러준 대나무 씨앗을 심은 동생.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이 한마디가 괜스레 울컥하였습니다.

아직 아이에게는 크게 와닿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곁에 이 책을 놓아주며 언젠간 그 의미를 알게 될 때 큰 울림을 받길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방거리 수사대 : 한양풍문기의 진실 사계절 아동문고 110
고재현 지음, 인디고 그림 / 사계절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책 읽는 것을, 특히나 글 밥이 많은 것에는 아직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추리' 이야기에는 몰입하며 글을 읽어가는 모습에 아이의 취향을 고려해 추리 동화를 찾아 읽곤 합니다.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아이 역시도 눈이 초롱거리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곤 먼저 읽는...

내가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하하핫;;;

읽고 나서 다음 권도 읽고 싶다는 아이.

얼마나 재밌길래 그러는지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한양 책방거리에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

그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 떠난 아이들의 가슴 뛰는 활약!

책방거리 수사대: 한양풍문기의 진실



동지는 급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툭 튀어나온 둥근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뺨은 한껏 더 붉어졌다. 아씨의 심부름을 나온 것이지만, 마님 몰래 집을 빠져 나온지 오래였다. 더구나 마님이 싫어하는 이야기책을 빌렸으니 마님에게 들키면 잔소리로 모자라 회초리까지 맞을지도 몰랐다. - page 7

광통 지전의 연이 아씨, 연이와 자매처럼 자란 동지.

세책점에 갈 때마다 누군가 이미 빌려서 번번이 헛걸음했던 『장화홍련전』을 드디어 빌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씨, 이것 좀 보세요. 책에 뭔가 있어요."



책 안쪽에 '한양풍문기'라는 제목이 쓰인 종이가 풀칠하여 붙어 있었습니다.

오월 스무아흐레. 낙산 아랫동네에 사는 최씨 성을 가진 여인과 한 가족이 사라지다. 한밤중에 과부 여인과 다섯 아이가 손과 손을 잡고 모두 사라지다.

야밤에 일가족이 사라졌다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달은 비난의 댓글이 가득하였습니다.

동지는 실제로 그 가족을 마주한 적이 있고 소문의 대상이 자신이 본 이들이 맞다면, 거짓 소문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씨, 이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제가 직접 알아봐야겠어요! 찾아가 볼래요!"

그리하여 소문의 진실 여부를 밝혀내겠다 마음먹은 동지.

하지만 연이 아씨가 자신과 함께 나서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라니요, 아씨! 이건 아씨 같은 여자가 나설 일이 아니에요."

"나 같은 건 뭐고, 여자는 뭐야? 너도 여자면서."

"아씨와 저는 다르지요!"

"너와 내가 다르다고? 난 한 번도 널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어."

"아씨,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건......"

...

"진실을 알아내는 데는 남자도 여자도, 양반도 하인도 상관없는 거야. 더욱이 이 아이들, 네가 아는 아이들이잖아. 너도 궁금하잖아." - page 40 ~ 42

동지는 남장한 연이와 함께 세책점이 그득한 책방거리부터 한양풍문기에 나온 수표교 등 곳곳을 수소문해 나서게 되고 억울하게 죽는 이들이 없게 하려는 포졸 두태와 양반집 도령 윤휘를 만나게 되는데...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는 연대의 장, 책방거리 수사대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연이'라는 인물로부터 시대가 규정한 성별, 신분적 한계에 맞서 거짓을 진실의 목소리로 뒤엎는 용기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인 저도 배울 점이었습니다.

"이게 정말 다입니까?

"낭자가 나서라고 해서 포도청에 재수사를 당부했어요. 사건을 은폐하라고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지요. 이것이 조선이고, 이것이 양반 사회입니다."

"이런 현실이 마음에 드십니까?"

윤휘는 연이의 질문에 말문이 탁 막혔다. - page 124

또한 이 사건은 '소문'을 퍼트린 자, '소문'에 입을 얹은 자, '소문'을 감춘 자 모두로부터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일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에 가담한 가해자와 방관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음을, 특히나 사건의 진상과는 관계없이 무지한 댓글로 진실을 흐리는 현실은 현재 우리에게서도 겪었던 일들이기에 쉬이 넘어갈 수 없었고 아이에게 그 어떤 말보다 큰 경각심을 일깨워줄 수 있었습니다.

"어디 말해 보시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오?"

"댓글을 모두 읽었으면 알 것 아닙니까? 도령이 얻고자 하는 것은 얻었을지 몰라도, 사람들은 최 여인을 업신여겼습니다. 모조리 무시했습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라도, 아니 죽은 사람이기에 변명 한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쏟아진 말을 도령은 어떻게 주워 담을 생각이었습니까?" - page 88 ~ 89

깊은 울림을 주었던 이 소설.

정말 아이들이 꼭 한 번은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마지막에 또 다른 책에서 '한양풍문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하루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저 역시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다른 현대미술 - 진짜 예술가와 가짜 가치들
뱅자맹 올리벤느 지음, 김정인 옮김 / 크루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현대미술 전시회를 가 보면...

뭐라고 할까...

고명한 비평가들이 극찬을 하는데 저는 도통 이해도 안 되고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현대미술은 챙겨보지 않곤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감상이 무척이나 일반적이며, 나아가 전혀 잘못된 게 아니라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저자는 단 한 명도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이건 우리에게 현대미술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현대미술에 있다'

라며 남모를 고충으로 여겼던 저에게 짜릿한 통쾌함을 선사했던 그.

그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현대미술의 사기를

참아야 하는 걸까?

새로운 20세기 미술사 찾아가기

또 다른 현대미술



고전 예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흔쾌히 즐기는 이른바 대중예술-영화를 감상하고, 소설이나 만화를 읽으며, TV 시리즈를 보고, 노래를 듣는-을 보면 이들은 현실을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세계의 숨은 일면과 아름다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어떤가?

세계와 무관한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것(예컨대 커다란 사각형이나 줄무늬), 아름답지 않은 것(소변기, 잘린 성기),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것(통조림, 벽에 붙인 바나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미술을 싫어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현대미술의 옹호자들은 현대미술에 '좋은 부분도 좋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그에 대해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럼 역사의 판단이 좀 더 쉬워지도록, 지금부터 현대미술의 좋지 않은 부분을 가려 보면 어떨까.

저자는 이 책에 작품의 감상과 예술가의 가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논의하고(어떤 작품이 나에게 감동적이라면 그것이 인상주의 작품이든 고전 작품이든 무슨 아무 상관인가?), 고전 예술 양식은 마이너 예술을 피난처로 삼았으며 오늘날 이들이 누리는 성공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아울러 20세기 미술사의 신화를 이루는 '토템'인 뒤샹, 피카소, 개념미술 등의 의미를 다시 살피고, 이들이 생각만큼 견고하지도, 생각만큼 공식적인 역사를 지지하지도 않음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피카소나 모네처럼 자신들의 이름이 걸린 아방가르드 운동보다 훨씬 오래 예술계에 남아 계속 활동했던 이들,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시 고전 예술 양식으로 되돌아온 이들, 어떠한 아방가르드나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긴 이들을 하나씩 지적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공식적인 미술사가 거짓임을 선언하고, 새로운 20세기 미술사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역사에서 예술적 가치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미술사는 하나의 최종 목표를 향해 점차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계속해서 변모해 가는 과정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화가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계보, 화가들이 동시대 후계자들의 작품에서 보았던 계보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철학자나 비평가가 아닌, 예술가들이 직접 쓴 역사를. - page 54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 미술서라 접근했다가 큰코다쳤습니다.

유독 많았던 QR코드는 몰입의 순간을 방해하였었고 '프랑스'에 대해 잘 몰랐기에 이해가 어려웠고 저자의 이야기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낯선 인물과 작품은 그야말로 멘붕이 왔었습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 그의 주장에 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조국이기에 더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었으며 예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비평가나 역사학자가 아닌, 예술가들 스스로가 찬양하고 수집했던 선대 예술가들, 그리고 그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시금 사랑하고 찬미했던 후대 예술가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 - page 113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저자는 단순 '예술'에서만 그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해 준 점이었습니다.

나는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는 역사가 최종 심판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진짜와 가짜,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시대마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우린 최소한 그런 선택이 어떤 변화를 불러오리라 믿고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니 그렇게 하자. - page 156

현대미술의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신격화에 일침을 가했던 이 책.

'진짜' 20세기 미술사를 구성하는 이들을 알려주었던 이 책.

그렇기에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