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형사과 강력팀 정정현 경위입니다."
새벽까지 일하느라 피곤함이 붙은 얼굴을 마스크 안에 숨기고 앞에 서있는 남자의 인상착의를 빠르게 살펴봅니다.
사복을 입은 젊은 남성.
이 더위에도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예의 바르게 신분증 목걸이를 걸고 온 그에게 못마땅했던 법의관 세현에게
"새벽 4시 47분에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습니다. 사건 현장이 인근 주민들 왕래가 잦은 곳이기도 하고 변사체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두 눈 가득 담기는 사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지만 이상하게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든 세현.
낯설지 않다고 느낀 이유는 장기를 다 들쑤시고 신경을 잡아 떼어 늘려놓은 이 변사체가 유독 의과대 본과 1학년 여름방학 때 지겹도록 본 해부용 시체와 닮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어리고 현명하던 때 비슷한 사체를 봤던 순간이 기억 위로 스멀스멀 떠오르게 된 세현은 뒷걸음질로 부검실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달립니다.
오래전 자신의 손에 목숨줄이 끊긴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벅찬데, 그가 다시 살인을 시작했다는 결론에 이르자 누가 목구멍 끝까지 빵을 집어넣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 page 33
물이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뜻의 용천.
이름 그대로 일급수 하천을 끼고 발전한 평화로운 도시에 첫 번째 사체가 발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연쇄 살인 사건.
사체를 재단하고 실로 꿰맨 이 사건을 언론은 '재단사 살인 사건'이라 부르며 떠들썩한데...
세현은 단번에 눈치챘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이 바로 과거 자신이 죽인 아빠 윤조균이라는 것을.
조균이 잡혀 살인자의 딸임이 밝혀지면 출세는커녕 법의관으로 일할 수도 없게 됨은 물론, 그전에 먼저 조균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경찰보다 먼저 그를 찾아 죽이기로 다짐합니다.
정현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 할수록 어릴 적 보았던 살인범을 떠올리게 되며 과거 미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조용하게 사건을 묻으려는 강력팀 팀원은 그런 정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정현 역시도 혼자서 사건 조사에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정현의 덤덤한 목소리에 세현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물어보세요."
"혹시 미제 사건에 대해 따로 숨기고 있는 정보가 있습니까?"
세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헛웃음을 쳤다. 그에게 숨기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저는 서 과장님 믿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저에게 먼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왜 절 의심하세요? 전 형사님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용서받겠다고 나대는 거 받아준 죄밖에 없는데." - page 243
오직 법의관 세현만이 정현에게 힘을 실어주는데 오히려 사건을 조사할수록 세현이 뭔가 숨기고 있으며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세현이 진범을 잡고 싶다 했던 그 말은 진심일까?
연쇄 살인 사건과 세현은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리고 세현은 과연 비밀을 들키지 않고 정현보다 빨리 조균을 찾아낼 수 있을까?
조금씩 좁혀오는 이들의 접점.
그 끝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죄책감을 가진 정현.
"경찰이 수사는 하겠지만, 이상하게 피해자가 계속 죽어도 범인은 잘 잡히지 않으니 기대하지 말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끝났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 page 159
21년 전 정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이 말.
그래서 더 범인을 잡고자 한 정현의 모습이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어릴 때부터 이미
나는 책임이 1그램도 들어있지 않은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을 참 좋아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 세진의 옷을 하나씩 빼앗아 껴입었다. - page 304 ~ 305
이런 생각이,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다니...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가면을 쓰고 그들의 감정이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이에게 우리는 '소시오패스'라 단언할 수 있을까?
먹먹히 남았습니다.
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며 풀어나간 이 소설.
그래서 더 숨 가쁘게 쫓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상화에선 얼마나 멋지게 그려질지 또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