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출신 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주현'
식당 사장이지만 시비 거는 손님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에
"말도 이렇게 잘하면서 왜 못하는 척하냐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도 되는 거잖아. 왜 고모가 주방에서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는 건데."
엄마가 호호 웃는다.
"저 양반, 딱 봐도 깔보는 상대한테 한 소리 들으면 훨씬 더 심하게 꼬장 부리는 스타일이야. 좋게 좋게 하자는 말 모르니. 나쁘게 생각하면 주름진다. 이 나이에는 주름 하나하나가 다 돈인 거 알지." - page 11 ~ 12
그런 엄마가, 아니 이런 게 싫은 주현...
갖가지 말을 입속에 눌러 담은 채 엄마가 내온 우거지국밥 한 그릇을 먹으려던 찰나
고모가 커다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납니다.
"주현아, 이따 승윤이네 어머니 오시면 이거 전해 드려라."
"뭔데요?"
"한라봉. 항상 신세 지고 있으니까 감사 인사도 드리고." - page 14
사실 주현은 얼마 전부터 승윤네 부모님의 호의로 대치동 학원 주말 강의를 들으러 다닙니다.
처음 학원에 들어선 날 거의 기절할 뻔했는데...
강의실 전체에 새하얀 애들로만 채워져 있는 모습에 주현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동네 애들은 모두 '진짜' 한국인이고, 아빠들은 죄다 근사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집은 언제나 아파트다. 여기에 몇 번을 오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승윤 형이 돌연 낯설어졌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낯선 감각은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 page 17
한편 주현의 학교에는 이민 2세대 청소년이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주현과 동갑인 '요한'은 주현과 달리 목소리가 작고 소심합니다.
승윤의 비호 덕분에 무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지만 '동남아'라 부르는 게 불편한 주현은 승윤에게 항의해 보지만...
"하는 짓이 같아야 같은 대접을 해 주지, 노아가 요한이랑 같냐. 그래도 잘해 주려 노력하고 있긴 해."
"그런 별명을 붙이는 게 노력인가. 난 아니라고 보는데. 형도 호주 살면서 힘든 거 많았을 테니까, 이런저런 부분 생각해서 잘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승윤은 잠깐 아무 말도 않더니 단호한 어조로 으르렁댔다.
"야 인마,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너도 남아시아 할래?" - page 42 ~ 43
요한의 잘잘못을 떠나, 수많은 특징 중 가장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은 왜 그의 '존재'에 대한 것일까...?
주현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자신의 정체성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지만 요한의 문제로부터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었고
그래서 문학 과제에 스리랑카 내전을 다룬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소재로 제안하게 되고
이 소설로 친구들은 주현을 스리랑카 내전 사령관인 프라바카란에 빗대어 '반군 사령관'이라 부르며 치켜세웁니다.
장난스러운 선망의 눈길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주현...
게다가 승윤이 점점 과도한 것을 요구하면서 주현은 승윤과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반겨 줄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까?"
소설이 참... 묵직했습니다.
남을 가리킨 손가락 뒤 나머지 손가락이 가리킨 나에 대해...
책 제목처럼 '캐리커처'라는 의미에
내가 생각하기에 어딘가에 온전히 소속된다는 것은 캐리커처에 갇히지 않을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
캐릭터에 완전히 잡아먹히는 상황만 피할 수 있다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인정하건대 그때그때 캐리커처를 갈아 끼우는 능력은 인생살이를 돕는다. - page 81
모두가 저마다의 가면을 쓴 채...
누군가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 맨 얼굴을 보이려 한다면, 건방지다는 소리나 듣겠지.
왜 저만 이런 일을 당하나요? 불공평합니다.
너만 당하는 게 아니니까 가만히 있거라.
제가 더 심하게 당하는데요......
그런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내가 보기엔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나라 사람들은 소속감 없는 상태에 소속된 사람들 같다. 돈만 잘 벌면 되는 나라라는 건 그런 의미 같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려면 돈이라도 많아야 한다는 거다. 나는 그게 언제나 싫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 너한테 허락된 배역은 이것이고, 네가 넘어올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라며 세상 전체가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 page 82
'더불어 산다'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