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의 속명은 강수남이었다. - page 20
그녀는 커서 스님이 되어야지, 하고 늘 이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꿈을 꾸곤 하던 때에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편지를 보내온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모두 그녀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얼마 전부터 늘 죽음을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 그녀를 자기 마음속에 품으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편지를 보내온 주인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웃집에 하숙을 하는,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이는 두어 살 위였고 건강 때문에 한 해 쉬고, 또 한 해 쉬고...
그런 그가 결국 오랜 지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수남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만류에도 청정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석 달 동안 행자 생활 끝에 진성이라는 법명을 받고 은선스님을 모시게 되지만 은선스님은 진성에게
"이제는 스님들도 외전을 공부해야 한다. 수도는 산에서만 하는 게 아니야.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라."
...
"잘 봐라. 저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한 오라기도 없느냐?"
...
"이것이 숙제다. 네가 네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할 숙제......"
화두를 내리며 외지로 나가 대학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순녀
어머니, 오빠와 살아온 그녀는 스님인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지만 그 스님은
"느이 아버지한테 가면 너도 실패한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한테는 각기 다른 몫이 있다. 너한테는 네 갈 길이 있고, 느이 아버지한테는 느이 아버지가 가야 할 길이 있다." - page 95
이 말을 남기곤 다시 떠나 버립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뜨거운 덩어리가 꿈틀 일어서게 되는데...
대학 입학시험에 실패한 오빠가 자원 입대를 한 지 며칠 뒤 순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에게서 그 스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나선 차에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순녀는 평생 그의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현종과 순녀 사이를 가리키는 헛소문이 떠돌아 현종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순녀의 가슴에는 깊고 큰 구덩이가 패이게 됩니다.
진성은 절을 떠나 은선 스님의 뜻에 따라 대학 생활을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우종남이라는 남학생이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니는 겁니다.
방학 때 청정암에 돌아온 진성은 이제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가 박현우라는 남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 이를 계기로 절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며 그녀를 비웃습니다.
하지만 진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순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순녀와 박현우 사이에 아기가 생기지만 박현우가 어딘가에 아기를 버리고 그녀를 떠나자, 순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 환자를 수송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는 죽게 되자 순녀는 다시 절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뭇거뭇해진 살갗과 눈자위와 볼에 앉은 검은 그늘이 진 은선 스님.
은선 스님은 열반하기 전 효정과 정선 스님에게, 몸소 체험하여 법도를 깨달은 청화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과 함께 순녀를 부탁하게 되고 순녀에게 한 아기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 알려주고 열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고 순녀는 버려진 아기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 확신하고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ㅇ에게서 아이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튿날, 낙도를 향해 떠난 순녀.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반야심경>의 주문이 떠올랐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고해 건너 저 진여의 언덕으로 가자. 부디 이 뜻대로 이루어지리다. 물보라 저쪽으로 연잎 같은 섬 한 개와 흰 구름 한 장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 높은 그곳은 어디에 있을까. 순녀는 혀끝을 아릿하게 아파 오도록 물었다. 그 아픔으로 말미암아 눈에 물이 괴었다. 섬과 구름과 파도와 물보라가 눈물 속에 굴절되었다. 그녀는 쾌속선의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page 425
숨이 턱! 하니 막혔습니다.
'연꽃'과도 같았던 삶.
순탄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우리네 모습.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이 질문에 대한 깨달음...
'달마 스님의 얼굴에는 왜 수염이 없느냐?' 얽매임으로부터 놓여나서 삶의 실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있고, 떠남과 머무름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놓여나라는 것이다. 선이 선 아니고 악이 악 아니면,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인 것이며, 마침내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우리의 실존 그 자체만 있는 것이다. - page 391
이 문장이 큰 울림으로 남았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려졌었습니다.
작가님이 인물에 대해 섬세히 묘사하였기에 보다 몰입하며 읽었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이 영화화되었다니 얼마나 멋진 작품이었을까!
뛰어난 감독님과 배우의 활약이 담긴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