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살아서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이어간 이름 없는 수많은 희생자 중의 한 분이었던,
그래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글로 풀고 싶었던 '진복'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 황사영 토굴에서
황사영이 쓴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비탄에 13,311자의 작은 글씨로 빽빽이 써 내려간 백서를 보고 전율을 느낀 진복은
'어떻게 이 토굴 속에서 육안으로도 보기 힘든 깨알 같은 글씨를 붓으로 써 내려갔을까?'
'황사영은 이 편지를 쓰면서 과연 이 편지가 북경의 주교를 통해서 로마의 교황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렇게 황사영의 발자취를 쫓아가게 됩니다.
1775년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황사영
1790년 16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자 정조가 기특하게 여겼고
"... 반드시 대과에 합격해서 짐을 도와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힘을 쏟아라. 네가 이십 세 되는 해에 내가 너를 다시 부르리라. 지금의 네 실력이라면 대과 합격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다. 이리 가까이 오라." - page 16
정약용 역시도
"전하께서 특별히 하명하시지 않았느냐? 나보다 똑똑한 우리 형님들도 계시니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page 17
며 그를 어여삐 여겼습니다.
그러다 황사영은 운명적으로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에게 반해 결혼을 하게 됩니다.
"낭자의 기도하는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선녀가 아니라 천사라고 합니다. 제 기도하는 모습이 천사와 같다고 하심은 과찬이십니다. 저는 아직 기도하는 방법도 자세히 모르고 외숙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는 것뿐입니다."
"외숙부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경주 이씨에 벽자 쓰시는 광암 이벽이온데 제 어머니의 남동생이옵니다."
"낭자의 외숙부님이 그 유명한 이벽 어른이신가요? 저도 함자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님의 실학사상을 이어오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천주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 page 23 ~ 24
이 또한 운명이었던 것일까...
처갓집의 영향을 받아 '천주학'을 접하게 된 황사영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 조선교회의 사정과 박해는 상상 그 이상의 끔찍함이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핍박하는 조선의 사정을 황사영이 시골의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말한 것이 있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성교회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혹독하고 잔학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당끼리의 당파싸움이 몹시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다른 당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를 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학, 성리학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천지간의 큰 괴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유하면 궁벽한 시골의 어린아이가 방 안에서만 자라 바깥사람을 못 보다가 우연히 낯선 손님을 만나면 반드시 깜짝 놀라 우는 것과 같습니다." - page 160
그리하여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어야 했고 그럼에도 지켜나가고자 했던 이들...
가슴이 아프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그 말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순교하지 않았지만, 순교자보다도 더 힘들게 살면서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복음을 전파한 이름 없는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page 54
그가 '백서'에 1785년 이후의 조선교회의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약전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하여 증언한 다음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담보할 방안을 언급하였는데 이것이 논란이 되어버렸으니...!
종주국인 청국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조선을 청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그도 아니면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수만 명을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선 조정을 굴복시키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것으로 정순황후 정권은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백서에서 청국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만 적은 가백서를 작성하여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나는 우리 교회도 문제가 많다고 봐. 아직도 황사영이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우리 후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황사영이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외세의 무력을 끌어들이는 폭력적 방법을 원한 것 때문에 천주교 내에서도 그를 순교자로 인정하고 로마에 시성 시복을 청하자는 데는 찬반이 갈려 있었는데 일반 신자들보다 성직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더 심했어.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순교자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공식적으로 황사영을 공경하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교회에서 반성하고 황사영을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어. 황사영은 순교자이기는 하나 백서 사건이 국가적 시각으로는 반역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시복 시성이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다가, 2013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선정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야." - page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