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장은 1800년 후반에 태어난 한국화 거장들을
일제강점기 전통 한국화의 맥을 잇고자 고군분투했던 오세창, 고희동, 이상범, 안중식 등의 이야기를
2장은 예술혼 하나로 시대와 개인의 불운을 이겨낸 화가들을
물감을 입으로 씻어가며 붓을 놓지 않았던 박생광, 어둠 속 불상을 그린 전화황 등의 이야기를
3장은 새로운 예술의 길을 개척한 이들을
김종영의 조각, 유강열의 공예, 천경자의 독자적 회화 세계 등의 이야기를
4장은 세계로 뻗어 나간 화가들을
파리 예술계에 입성한 남관, '살롱 드 메'를 밟고 유럽에서 한국의 정신을 전파한 이응노 등의 이야기를
총 23명의 작가 이야기가 묵직한 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리곤 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예술가들이 느꼈던 불안감, 연약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그럼에도 꿋꿋이 나아갔던 불꽃같은 예술혼에
몸과 마음이 벅찼다고 할까...
나의 나약함에, 어리숙함에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이 깊었던 '박생광' 화가.
1904년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난 박생광.
진주고등농림학교 재학 시절, 그가 그림에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일본인 교사가 그의 일본 유학을 도왔고
도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던 오치아이 로후의 신임을 받아, 그의 화숙에서 조교로도 일했습니다.
이중섭, 김환기 등이 활동했던 자유미술가협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간혹 조선에 다녀가긴 했지만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본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그.
해방 후 귀국했지만 사회적으로 일본색을 탈피해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채색화 자체가 죄악시되었던 탓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74년 70세의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본에 가 3년간 수련과 제작 활동에 집중하고 돌아와 드디어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게 됩니다.
1977년 서울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후원자를 얻게 되었고
"죽기 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나를 도와달라."
한국의 오방색인 황·청·백·적·흑이 화면을 가득 뒤덮은,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불교와 무속을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 존경하고 사랑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았는데...
박생광은 불교, 무속, 민속(탈, 장승, 민화)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한국의 기층문화를 탐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층문화란 아무리 새로운 사상이 들어와도 저변에 깔려 변하지 않는 '민초'의 자생적 문화를 가리킨다. 한국의 민초는 온갖 애증과 고통을 안은 채 아주 단순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 헛되이 죽지 않게 해달라, 억울하지 않게 해달라...... 무언가 대단히 잘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액운을 물리치는 데 만족한다.
한국의 기층문화에는 애통함과 어리숙함과 염원이 뒤범벅되어 있지만, 또한 뭔지 모를 장엄함과 강인한 저력이 숨 쉬고 있다. 그래서 박생광의 작품은 집에 걸기에는 너무 기가 세고 무섭게 느껴진다. 왜 그렇게 센 그림을 그리냐는 질문에, 박생광은 "후학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 찾아내고 새로운 색채와 기법으로 표현하여, 이를 후대에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졌다. - page 120 ~ 121
1984년 7월에 후두암 판정을 받게 된 그.
아마도 후두암에 걸린 이유가 늘 입으로 빨아서 뱉어낸 경면주사 때문일 것이라 하는데...
물감을 아끼기 위해 입안에서 살살 물감을 빨아낸 후 물감 접시에 조심스레 뱉어 다시 사용했는데
물감을 아껴가며 후세에 보여주고자 했던 그림...
왜 그동안 몰랐던 것일까......
157센티미터의 키에 40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던 '소인'
그의 마지막 작품 <노적도>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