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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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마치 이미지와 감각이 지배하는 거대한 테마파크와도 같다.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화려한 광고 포스터를 휘감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부지런히 mp3와 게임에 감각을 몰입한 채 목적지까지의 시간을 향유한다. 북적거리는 도시의 한복판을 무심히 걷고 있어도 '맛보세요'와 '써보세요'라는 상냥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뜻하지 않은 다양한 체험이벤트를 제공하며, 도시 역시 시시때때로 행사를 벌여 때론 대형 스크린으로, 때론 불꽃놀이로 꿈과 환상의 감각제국을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손안에 쥔 작은 모바일폰은 자신의 뜻대로 조작할 수 있는 이미지와 감각의 결정체이다. 욕구를 느끼자마자 버튼 하나만 누르면 동영상이든 트위터든 즉각 접속되고, 화면 속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포착 즉시 신경중추를 타고 전달된다.

이처럼 현란한 이미지와 감각의 일상 속에서 반대로 텍스트와 이성을 들춰낸다는 것은 매우 건조하고 지루한 작업처럼 느껴진다. 즉,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흥미롭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그 내용이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시(詩)'와 '철학'에 관한 것이라면 감탄보다는 한숨이 절로 나올 듯하다. 그런데 이 책은 막막하기 그지없는 시와 철학을 함께 엮고 여기에 '즐거움'이라 덧붙이고 있으니 먼저 그 '즐거움'의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라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보는 사람입니다.(p.17)

저자가 설명하기를, 시란 시인이 경험한 물속이기에 가장 주관적인 것 같지만 누구나 그 물에 들어간다면 같은 경험을 하게되므로 가장 보편적일 수 있고, 철학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물이기에 가장 보편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상 철학자가 만든 특정한 그물(특정한 물고기를 위한)이므로 오히려 가장 주관적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시와 철학, 보편과 주관이 결합한 시너지를 통해 낯선 세계에 빠져도 보고 실체들을 끌어내 확인할 수 있으니 한 세계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즐거움이 따르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가 가슴속에 품은 이성복의 글귀,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를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은 21쌍의 현대 시인과 철학자를 통해 우리의 무뎌진 감성(감각이 아닌)에 날을 세우고 허약해진 이성에 근육을 보탠다.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 아닌 다중의 논리를,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사유는 곧 의무라는 판단을,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 소비의 원리를,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을...이렇게 21개의 주제를 따라 차근차근 시와 철학의 교집합 세계에 빠져들다보면 인간의 본성과 욕망, 생과 사, 사회의 현상들과 타인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눈은 더이상 감각에 이끌려가는 무의지적 시선이 아닌, 나와 타자를 포함한 세상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의지적 시선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21쌍의 시인과 철학자 중 가장 특별한 한 쌍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바로 시인 김준태와 철학자 박동환인데, 다른 쌍들이 모두 우리 시인과 서양 철학자들로 구성된데 반해 이 쌍만은 우리 시인과 우리 철학자로 짝지워져 있다. 두 사람을 통해 풀어나가는 '도시 너머에서 발견한 희망', 그리고 '한국적 사유'라는 마지막 주제를 보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 단순한 철학 입문서나 에세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불어 '철학적 시 읽기'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할지를 일깨우는 목적 의식이 발견된다. 이 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으로서의 광주'에 반해 '구조로서의 광주'가 아직 살아 있음과 도시 변두리에 씨를 심는 행동으로 희망을 말하는 시인의 의지가, 중국과 미국의 철학을 관망하고 모방만했던 제삼자에서 벗어나 우리 사유속에 흐르는 생명체의 근원적 논리를 되새기자는 철학자의 방향성이 매우 인상깊었던 장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논리가 문명의 붕괴로 사라질지라도 우리의 집요한 생명력만은 살아남을 것이라 주장하는 박동환, 이와 연결되는 "흙과 서로의 몸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으로 생명체 사이의 연결을 역설하는 김태준, 이 두 사람은 다시금 '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21번째의 시인과 철학자에 따르면, 우리의 도시는 여전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전수해 준 문명으로 북적대고 있다. 그리고 맨 처음 언급한 이미지와 감각으로 가득한 세상도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를 떠올리며 이 감각의 제국에 틈새를 만들고 씨앗을 심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력이 도시의 틈새에 심겨질 때 그 뿌리와 잎이 자라고 종국에는 은근한 힘으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다. 그날은 우리가 틈새 속에 침잠하고 충분한 양분과 수분을 끌어모으는 시간 속에서 탄생할 것이며, 시와 철학은 양분과 수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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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정신>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예술의 정신
로버트 헨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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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계의 정신적 지주라 일컫는 로버트 헨리와 예술의 정신이라는 엄숙한 주제 앞에서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쩐지 황진이를 떠올렸다. 그것도, 조선시대 명기로 이름을 날린 역사적 인물 황진이가 아닌 TV 드라마 <황진이>이다. 사실 <황진이>는 화려한 캐스팅과 의상, 가무와 같은 볼거리며 기녀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에 눈길을 끌었지만 사실 예술의 경지와 예술혼에 대한 해석이 매우 돋보이는 드라마였다. 조청단지를 쏟아 붓고, 줄타기를 배워가며 완전함을 추구했던 열정이나 기술과 전통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감정을 이입하는 창조적인 발상, 여학의 행수(기녀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의 대표자 자리) 자리에 연연해 경쟁하지 않고 오직 완벽한 춤을 구하는 순수한 이상, 자연에게 묻고, 사람살이에 묻는 겸허하고 소박한 자세, 그리고 종국에는 장단에 맞추는 춤사위가 아니라 음악으로 하여금 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살아있는 예술혼의 획득까지... 만일 <예술의 정신>에서 로버트 헨리가 진심을 담아 후학에게 전하려 했던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황진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에서부터 <황진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까닭은 이 책이 가진 내용과 분위기를 좀 더 쉽게 공감했으면 하는 의도에서이다. 막연히 '예술의 정신'이라고 하면 상당히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심오한 철학이나 이를 수 없는 경지처럼 들리기도 하며, 예술에 의한 사회 운동(movement)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는 '예술'과 '정신'이라는 단어의 심도로 인해 갖을 수 있는 선입견일 뿐 저자의 진정한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예술의 정신>은 로버트 헨리의 강의나 그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기고문 등을 정리해서 모은 글들로 다정하고 세심하며 실질적이고도 본이 되는 생각과 격려가 가득하다. 저자가 화가이기에 미술학도들에게 해당되는 스트로크, 드로잉, 초상화에 관한 구체적인 조언들도 종종 눈에 띄이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예술인들, 더 나아가 꿈을 가진 청년들이 참고해도 좋을 투명한 사색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예술의 정신>을 보다 잘 이해하고 읽기 위해서는 로버트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로버트 헨리는 20세기 초 미국 사실주의를 주도한 화가로 펜실베이니아의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했고, 마네(Manet)와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영향을 받아 도시의 정경이나 인물을 주로 그렸다. 또한 1907년 뉴욕의 화가들이 보수적인 전시정책에 항의하여 만든 에이트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업적과 활동을 놓고 보면 그의 글에서 프랑스 에콜데보자르의 전통과 기품 어린 생각들이 흐르고,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소탈한 자세, 생활에서 체득되는 예술적 감흥들이 한껏 뭍어나는 것이 더욱 드러난다.

                                                   - 로버트 헨리의 사진(좌)과 그의 작품들 -


'예술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되는 글들은 따뜻한 온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물론 그가 자신의 학생들을 위해 쓴 글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90년전 어떤 스승으로부터의 조언이 마치 나의 선생님이나 선배로부터 듣는 것처럼 친근감 마저 느껴지는 까닭은 이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삶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무엇을 위한 예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가르침에 목말라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화가는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술가로서의 덕목, 세상을 보는 방법, 비평, 예술가로서의 성공 여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도(正道)와 순수, 인간으로서의 예술가가 무엇인지 돌이켜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예술의 정신>은 이후에도 스승이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고 힘을 얻을 정신적 후원자로 삼아야 겠다 생각해 본다.

개성없는 기법은 아무리 정교해도 사소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연구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사소하다.
예술의 크기는 곧 인간성의 크기이다. 예술의 위대함은 예술가의 개성의 위대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p.255)


* 사진출처 : http://artria.net/150043356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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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똑똑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미술은 똑똑하다 - 오스본의 만화 미술론 카툰 클래식 13
댄 스터지스.리차드 오스본 지음, 나탈리 터너 그림, 신성림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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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특히 현대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이것도 미술이 될 수 있을까'라든지 '이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와 같은 생각이 앞서 흡족하고 여유롭게 감상하기란 수월치 않다. 그래서 흔히 전문가들은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거예요."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지만 실상 이것은 어느정도 미술에 대한 식견이 있을 때에나 해당될 법한 조언이지 순전히 개인적 감흥이나 연상작용에만 의존해 감상할 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작품 하나 감상하는 것에 식견의 유무차이로 '마음에 달려있는' 해석을 차별받는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 준다.

미술은 당신이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p.12)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미술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기호나 주관, 미적으로 아름다와야 한다는 선입견, 상업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에 대한 혼돈을 지양해야 할 대표적인 미술이론으로 꼽고 있는데, 이 중 가장 빈번한 미술이론에 대한 오해는 바로 '자신의 기호나 주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기호와 주관으로 미술을 감상하게 된 까닭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미술을 접하는 동기가 여가생활의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이고, 넓게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술에 대한 관념과 급격하게 보급된 현대 미술의 실상에서 빚어지는 격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은 역사상 인류와 함께 성장해 온 가장 큰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알타미라나 라코스 동굴벽화로부터 시작해 고대 그리스 시대, 르네상스를 거쳐 번성하고 이후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한층 더 심화된 미술은 한 두권의 책이나 주말의 갤러리 관람으로 쉽게 이해될만한 만만한 학문은 아닌 것이다.

물론 미술이 처음부터 이렇게 대단한 지식을 요구하는 학문은 아니였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에 비춰볼 때 기술자나 장인정도였던 시절을 거쳐 점차 노하우에 따른 문서가 생겼고 아카데믹한 요소들을 인정받아 학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에 가세해 모더니즘 속에서 추상화가 탄생하고 점점 철학적 요소와 실험성이 강해지면서 점차 수반된 이론들이 다양해지고 견고해진 것이다. 그래서 미술에 '이론'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어쩐지 유화물감 뭍은 허름한 작업복 보다는 말쑥한 양복처럼 격식있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미술은 똑똑하다>는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는 미술이론이 양복을 벗어버리고 '만화'라는 요소를 통해 보다 친근한 청바지 차림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미술이론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간다. 시대에 따른 미술과 미(美)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그러한 생각을 유발시킨 철학자나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꼼꼼히 챙긴 것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큰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여기에는 개념어 사전을 떠올리게 할만큼 상당히 많은 현대 학자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포함되는데, 아마도 입문서를 통해 이렇게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미술이론이 진화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미술가들의 능력란 단지 자유로운 발상이나 순간적인 영감과 관계된 창의력만이 아닌듯 하다. 이론이란 자신의 이상와 신념을 반영하는 것인만큼 그것을 발전시키고 또다시 그 틀을 깨는 과정은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아우르는 부단한 지적 노력의 결과였다. 이제 미술은 눈에 들어온대로 보는 것이 아닌 생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날 아름답게 봐주세요'라는 수동적인 미술이 아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어?'라는 도발적인 미술과 함께 하려면 미술만큼 똑똑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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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도시 - 사진으로 읽는 도시의 인문학
이영준 지음 / 안그라픽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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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초조한가? 도시의 초조함을 따라 그 발상지로 거슬러 올라가보니 '에녹'이 있었다. '에녹'은 동생을 죽이고 추방당한 카인이 '떠돌아다님'을 뜻하는 '놋'이라는 땅에 정착해 만든 성이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을 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며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곳, 방랑의 운명이 각인된 땅에서 태어나 방랑자의 아들의 이름을 얻고 그 운명을 이기기 위해 문명으로 무장했던 곳, 바로 그곳이 도시의 시작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본향을 떠난 자의 한과 생존에 대한 초조함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이것은 현대 도시에도 무의식적으로 계승되어 테크놀러지와 함께 더욱 급박한 박동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초조한 도시를 실감나게 묘사한 예로는 갓프레이 레지오 감독의 영화 를 들 수 있다. 'Koyaanisqatsi'란 호피족 인디언의 언어로 '균형잃은 삶(Life out of balance)'을 의미하는데, 87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음울한 저음으로 반복되는 이 단어(이 영화는 대사없이 음악과 영상으로만 제작되었다)는 탐욕으로 광폭하게 발달한 거대도시에 불길한 경고음으로 작용한다. 도로에 줄지은 자동차의 물결, 초고층 빌딩들의 경쟁적인 스카이라인, 자연에 황량함을 가하는 풍력발전기들의 도열, 공장 컨베이어에 실린 규격화된 제품들, 지하철 요금기를 통과하는 기계적인 사람들의 움직임... 생활인이 아닌 관람자로서의 도시인들은 'Koyaanisqatsi'라는 음울한 주문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도시가 재로 붕괴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된다. 어쩌면 도시를 그렇게 만들어왔던 공범자의 심리가 죄책감으로 작용했을지도...

하지만 <초조한 도시>는 똑같은 유형의 도시를 대면하면서도 보다 긍정적인 자세로 도시를 탐닉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리타니 고진에게서 힌트를 얻은 '괄호에 넣기'인데 이는 쉽게 말해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을 의식에서 제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적 태도는 대상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그로부터 받게 되는 다양한 반응을 괄호에 넣는 것 그 자체로부터 쾌를 얻고 있다.(p.17)


저자가 도시에서 괄호 안에 넣고 싶은 것은 바로 일상의 '초조한' 모습들이다. 이 책의 제목이 <초조한 도시>인 것도 말 그대로 '초조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조한'을 괄호에 넣었을 때 드러나는 새롭고도 비일상적인 도시의 미학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괄호에 넣기'의 목적은 단순히 도시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라보고 즐기기 위함은 아니다. 이것은 급변하는 도시에 안타까움을 가졌던 저자가 사라져가는 도시의 피사체를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선택한 방편이며 피사체가 남기고 간 시대의 메시지를 극명하게 기리고자 하는 온정 어린 시선이다. 따라서 '기호의 제국', '밀도와 고도', '콘크리트의 격'을 따라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여정은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적 산책이라기 보다는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적 산책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 같다.

- 기호의 제국
도시에는 수많은 기호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처럼 간판의 위세가 막강한 도시에서는 글씨가 곧 기호의 전부인 것처럼 간주되기 쉽지만 사실 기호라는 것은 교통 표지판처럼 그대로 읽어야 할 것부터 풍경의 맥락에 의한 상징, 은유, 모순 등 숨겨진 것에 이르기까지 도시가 가진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간판 밀집지역에서 크기나 글씨체로 드러나는 글씨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 교회와 증권사들의 간격을 압축해(망원렌즈로 바라봤다) '물신의 가호를 받은 종교'라는 과장어법을 적용하는 것 등은 도시의 기호를 해석하는 신선한 방식이다. 특히 급격하고도 잦은 변화를 겪는 우리의 도시에는 여러 층의 시간들이 혼재하기에 '기호의 제국'에 소개된 이미지들은 보다 풍부한 기호를 함축하며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고도와 밀도
밀도와 고도는 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가 날로 확산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밀도와 고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심한 밀도와 고도를 비집고 들어가는 인문학적 사유들은 상당히 유연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매끈한 공간과 주름진 공간', '되기(becoming)'의 의미를 의왕시 재개발 지구의 사진 한 장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부분은 가장 돋보이는 인문학적 해석이였다. 이밖에도 저자는 고딕의 욕망을 초월한 현대 건물의 고도, 교통량의 수평적 밀도에 의해 퇴색되가는 랜드마크로서의 자연의 고도, '삭막미'라는 경지로 승화된 철골의 밀도와 리듬 등 다양한 풍경을 통해 일반적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을 독특한 생각들과 함께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 콘크리트의 격
적어도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디자인하기 전까지 콘크리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싸고, 거칠며, 삭막한' 도시의 재료였다. 아름다움 보다는 기능과 공법에 충실한 고가도로나 질식할 만큼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눈에 띄게 많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콘크리트는 격을 가진다. 콘크리트를 도시의 옷이라 생각했을 때 기존에 자리잡은 이미지가 길거리표 옷이였다면 책 속에서 제시하는 이미지는 명품 브랜드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마치 신전을 떠받치듯 우아한 고가도로의 기둥들과 도로 곡선을 따라 살포시 하강하는 자동차 한대, 80년대 군사시설의 향수(?)가 어린 아파트 벽면, 콘크리트의 힘과 질감, 빛을 통한 아름다움...너무 흔해 쉽게 지나치기 쉬운 장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관찰력과 콘크리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빛을 포착한 솜씨가 대단하다.


<초조한 도시>는 모든 도시에 여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 밀집도시라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일종의 숨구멍을 찾으려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고, 거대 공간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숨구멍의 밀도도 높아진다는 긍정적 논리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획일적이고 빽빽한 아파트촌에서도 다양성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 혼란스럽고 아찔한 변전소에서도 복잡계의 체계를 발견하는 것에는 긍정적인 온기가 따른다. 비록 수천년 전부터 물려받은 생존에의 두려움이 언제나 요동친다 할지라도 도시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면 용감하게 초조함을 괄호속에 넣어버리는 시도가 우리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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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빵 한솔 마음씨앗 그림책 2
백희나 글.사진 / 한솔수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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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빗길에 젖을 신발과 옷자락 걱정부터 지하철에서 맞부딪칠 다른 사람들의 젖은 우산, 그리고 혹시나 우산을 잊고 귀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이런 저런 불쾌한 생각들을 앞세우다 보면 괜스레 빗소리도 거슬리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고만 싶다.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 다른가보다. 아이들도 빗물에 젖어가며 학교에 가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알록달록 예쁜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는 일과 물 웅덩이를 첨벙첨벙 걷는 일, 이웃집 홈통을 타고 내려온 빗물 폭포를 괜스레 손으로 건드리는 일처럼 평소에 할 수 없는 신기한 놀이감에 이내 불편한 마음을 툭툭 털어낸다.

<구름빵>은 이렇게 비오는 날에도 뽀송뽀송하게 남아있는 아이들 마음 한 조각을 구름에 담아 마법으로 풀어놓는다. 꼬마 형제들이 비오는 날 아침 발견한 구름 한 조각은 아직 젖지 않은 아이들의 꿈이다. 아이들의 꿈을 현명하게 다루는 것은 엄마의 몫일까?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늘의 요리'보다 명쾌하게 구름 조각으로 빵을 만든다. 이 장면은 실제 요리책처럼 표현한 아이디어가 매우 돗보이는데, 아마도 아이들이 구름빵을 진짜 만들수 있을거라 믿는 까닭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진짜 구름빵은 못 만들어도 비오는 날 아이들과 함께 구수한 빵을 굽는 것도 좋으리라!). 


꼬마 형제들의 동심에 엄마의 사랑과 지혜가 더해져 막강 파워 날아오르기 묘약으로 탄생한 구름빵! 구름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붕~ 날아오른 꼬마 형제와 ’그것봐, 엄마표 구름빵 대단하지?’라고 말하는 듯 천연덕스러운 엄마의 표정 때문에 정말 이 장면에 홀딱 반해버렸다. 날기에 대한 환상을 접어버린지 오래된 어른도 날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구치는데, 어린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이야기 속의 꼬마 형제들은 참으로 착하고 영리한 아이들이다. 구름빵을 맛있게 먹고 나더니 이번엔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에게 아침 식사를!’이라는 특명을 받은 것처럼 용맹하게 하늘을 날아올라 전기줄을 가로질러 두 눈의 레이더를 한껏 드높이고는 콩나물 시루 버스속의 아빠를 찾는다. 늘 일하느라 바쁘고 가족들과 함께하기 힘든 아빠들이 뭉클해 할 장면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엄마’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구름빵 만들기’ 부분과 ’아빠’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구름빵 배달하기’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의 무사안전을 확인하듯 아빠의 무사출근을 확인하는 아이들.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과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이 기특하다.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개어오는 하늘 아래 다정히 앉아 또 다시 구름빵을 나눠먹는 꼬마 형제들...서서히 밝아오는 하늘과 꼬마 형제의 초롱한 눈망울이 너무나 깜찍하고 귀여워 꼭 껴안아 주고 싶다.


<구름빵>은 짧은 이야기 속에 많은 의미들을 녹여내고 있는 정말 대단한 책이다. 물론 아이들 책이 대부분 짧지만 짧은 내용 속에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담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스한 가족 사랑과 상상력, 그리고 긴박감과 예측불허의 스토리까지 모두 갖춘 이 책은 비오는 우울한 날 아이와 함께 읽으며 다시금 유쾌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특별한 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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