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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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책을 읽고 꼬박꼬박 기록하리라는 결심을 할때 우연히 알게된 <독서일기>의 장정일은 내게 퍽이나 인상깊은 독서가였다. 알베르토 망구엘, 요네하라 마리, 다치바나 타카시, 우리나라의 문학비평가 김현, 로쟈 이현우 등등 독서가로 이름난 사람들은 많지만 책과 독서에 관한 기이한 에피소드와 무려 7권이나 되는 <독서일기>의 전적을 가진 장정일은 단연 나를 사로잡았다. 아니, 좀 더 제대로 설명해보면, 독서를 결심할 당시 그의 <공부>라는 책을 통해 깨닫게 된 '독서의 목적'과 그것을 위해 실천해가는 그의 행적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부>에서 장정일은 사회를 향한 자신의 방향과 주관을 뚜렷히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책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던 그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더욱 친숙해지더니 이번에는 <독서일기> 8권에 해당하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으로 다시 돌아왔다. '독서일기'라는 제목을 가지고 60세까지 20권의 독서일기를 발간하려던 계획(나는 서문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매우 놀랐다)을 바꿔 책 제목에도, 내용에도 많은 변화를 주어 발간한 것이다. 이전 독서일기가 말그대로 '일기'라는 형식을 빈 개인적인 글들이었다면 이번에는 보다 나누는 글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독서로 다져진 자신의 생각들이 곳곳에 배어있는, 한마디로 하고싶은 소리 다 하는 글들이 눈에 띄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순수 서평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기본으로 문단, 문화, 출판사 등에 대한 비판을 담았기에 칼럼같기도 하고, 문학 비평같은 면도 있으며, 때로는 두 세가지 책을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에 대해 초점을 모아간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는 그의 팬들이 기대했던 장정일만의 날선 글들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베스트셀러였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비평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 분분했던 글이기에 유심히 읽어봤는데, 굳이 '병신인증'같은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는가 싶지만 작가의 안목으로 작품의 구조와 내재된 의도를 뜯어본 평가였기에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독서가 장정일의 모습을 담은 부분들도 눈에 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을 비롯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책은 죽었다> 등 일련의 서평을 통해 자신의 독서법을 집중적으로 피력하고 있으며, 다른 서평에서도 책을 만난 사연이나 아껴두고 보는 이유, 초판 개정판 비교에 대한 이야기를 등장시키며 독서가로서의 시시콜콜하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독서법'을 표방하며 한 권을 통째로 동원한 책들보다 이 짤막한 서평들이 훨씬 마음에 든다. 

장정일은 '책은 현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한다. 그리고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p.11)"라는 그의 말에 매우 동의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소말리아의 '여성할례'나 인도의 '불가촉천민'의 실상, 이슬람 이민자의 '히잡논쟁'같은 더 넓은 세계의 현실을 이 책에서 만나고 그가 선행하여 선 가장자리 사잇길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 정말 뜻깊었다. 하지만 또다른 저서 <공부>에서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하고' 그 다음에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어줄 젊은 독자들이...'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봐야지'하고 발심(發心)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여기서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해 다시금 진지해진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독서가 장정일이 어떤 책을 감명깊게 읽었고, 어떤 책을 좋지않게 평가했는가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혹은 그의 정치색이 어떻고 비판들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보다는, 중학교때부터 다져온 독서력으로 역사, 사회, 경제,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현실'에 무언가 일조하겠다는 신념을 펼친 지식인의 선례로 여기고 독서의 목적을 돌아보는 계기로 사용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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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0월 예술/대중문화 부문의 도서들을 살펴보니 예술, 미술분야의 도서들이 강세다. 물론, 이 분야들은 이전부터 신간들의 등장이 활발했던 분야이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기타 분야들의 신간은 너무 전문적이거나 약소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지난 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추천도서였던 <춤의 유혹>도 상당히 관심이 갔지만 7월 출간도서였고, 굵직한 저자인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비롯 각종 건축관련 도서들 역시 8월 출간으로 추천할 수 없어 아쉬웠다. 

음악 분야의 <재즈 문화사>는 단순한 재즈의 역사가 아닌 '문화사'라는 점에서, 그리고 귀에 익숙한 이원희라는 저자 때문에 관심이 가긴 했지만 477페이지에 달하는 음악 이야기를 읽기엔 나의 기본 소양이 무리일 것 같아 바라보기만 했고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한국대표희곡강론> 역시 마찬가지였다(이건 531페이지나 되더라...). 영화 분야의 <영화는 역사다>도 눈에 들어왔던 책인데, 이 책은 영화보다는 역사에 더 중점을 둔 것같아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이번달에는 예술, 미술분야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10월에는 특히 시각디자인 분야와 관련된 도서들이 눈에 뜨인다. 예술일반에 대한 책들도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끼고 있는 것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이미지와 관련된 디자인, 미술, 사진에 대한 책들을 위주로 추천도서를 선정해 보았다. 


거의 국민도서로 여겨지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이 오랜만에 대작을 시도한 것 같아 매우 기대된다.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전면 칼라로 되어있어 우리나라 유물과 미술품들을 실물에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설레인다. 이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흑백인데다 학술적인 느낌이 많아 친근하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한국미술사 강의>는 그림책을 보듯 즐기며 설명과 대조해 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 생각된다. 책소개를 보니 '소파에 앉아 편히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되어있는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대중을 고려하고 쓴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난 저서보다 밀도가 덜할수도 있다는 생각할 수도 있어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픈 욕구가 강해진다. 어찌됐건, 이 분야에선 몇 안되는 독보적인 학자의 저서라 이달의 가장 주목할만한 예술/대중문화 서적이라 여겨도 무방할 것 같다. 

 

 

<디자인의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하라 켄야의 저서이다. 제목부터 특이하고 은근히 도발적인 이 책은 제목보다 더 독특한 디자인 철학과 실험의 결과물들이 담겨있어 읽는 사람을 경탄하게 한다.

출판사평을 잠시 살펴보면, "저자 켄야는 2004년도부터 무사시노 미술대학 기초디자인학과 소속의 4년생들과 함께 Ex-formation에 대한 수업 활동을 해왔다....『알몸 Ex-formation』의 Ex-formation은 그간 하라 켄야가 지속적으로 통찰해왔던 리디자인의 일종이다.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 역시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미지화시켜 그 본질을 찾아내고 그 근원을 재음미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재인식한다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책의 내용을 들어 쉽게 풀어보자면, 아기의 발가벗은 몸에 꽃, 실크, 콘크리트, 이끼 등을 입혀 새롭게 만들어 본다든지, 만화에 옷을 입고 등장한 소녀들을 모두 알몸으로 다시 그리며 그들 사이의 묘한 공감대를 찾아보는 일들이 이 책속에서 벌어진다. 제목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디자인의 결과물이 실려있는 책의 실제 내용을 보면 정말 기발하고도 재미있다.  

<비주얼 컬처>는 국내 최초로'비주얼 컬처'의 담론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비주얼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라고 종종 말하지만 실상 비주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호한 가운데 임의적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말하는 비주얼의 의미는 무엇인지, 비주얼로 이뤄진 문화의 세계는 어떻게 대중과 호흡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싶었고, 입문서를 목적으로 쓰여져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하고 싶다. 또한 이 책은 예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친근한 패션, 제품 디자인, 팝뮤직, 가상현실 등을 다양한 종류와 레벨의 문화를 분석하고 있어 '비주얼'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 전반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아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비평서이다. 테크놀로지로 인해 실험적이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 그래픽 디자인의 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가장 수월하게 대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매체라고 말하는 저자의 설명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고, 개정판이기에 이전의 내용들이 수정, 보완되었을 것으로 기대되어 주저없이 선택했다.

이 책은 그래픽 디자인의 결과물들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6개의 키워드(기원, 해체, 전유, 테크노, 저자성, 대립)를 설명하고 있어 포스트모던이 스며든 시각세계의 현주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무엇보다도 '소비'와 연관되는 분야이기에 그래픽 디자인의 나아갈 길을 묻고 있어 미래의 소비문화와 시각의 관계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예전에 사진작가 김홍희의 <나는 사진이다>라는 포토에세이에 푹 빠진적이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이미지속에 담긴 자신의 감정들을 보드라운 언어로 써내려간 그 책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깊은 공감을 맛보고 싶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인생은 무엇인지,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삶의 의미를 들추거나 나이를 부여잡고 말하는 여타 어느 에세이보다 더 진하고 강한 이미지가 그 의미를 말해줄 것이다.

 

 

 



이상 추천한 5권의 책 중 인연이 닿는 책이 있기를 소망하며, 이를 통해 시각의 세계를 탐닉하는 황홀한 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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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010년의 3/4가 채워졌다. 
쿼터로 치면 삼사분기가 되는 시기니 이쯤 한번 그동안의 독서미션을 돌아봐야지.

7월부터 지금까지 15권을 읽었다. 하반기 최대 목표를 50권으로 잡았는데, 역시...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그래도 최소 목표치인 20권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다행. 어쨋든, 올 하반기에는 권수를 채우는 것보다는 읽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둬야할 것 같다.

그나저나 아주 치명적인(?) 계획차질이 생겼다.
얼마전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을 집어든 순간 ’헉!’하고 떠오른 생각이...!
원래 장정일의 <공부>를 비롯 몇몇 서평, 독서에 관한 책들은 내년 1월에 읽을 예정이었다. 올해 안으로 가지고 있던 책들과 먼저 읽을 책들을 정리하고 새해의 다짐삼아 테마로 읽을 계획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오히려 12월에 읽고 서재정리를 한 매듭 짓는 것이 더 올바른 계획이었던 것이다. 결국, 올해에 예정했던 책들 중 몇 권을 빼고(흑...털기로 한 옛날 마케팅/경제서적은 언제 끝을 볼까?)  부랴부랴 서평집들로 교체를 했다. 처음에 계획한 50권을 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12월만큼은여유있게 몇권의 서평집들로 마무리했음 좋겠다.

그럼, 다시 9월의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번달은 다독은 못되지만 읽은 책들이 모두 좋아서 흡족하다. 아직 <감응의 건축>의 서평을 쓰지 못해 좀 안타깝지만 같은 저자의 <사람, 건축, 도시>를 구입하는 바람에 나중에 이 책의 서평을 쓸 때 함께 쓰기로 했다. 그리고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1/3가량 읽었는데, 이 책 역시 <88만원세대>과 함께 마무리하고 서평을 써야겠다. 

 
***  책과 뒷 이야기 ***

이달에 처음 읽은 책은 <나는 치명적이다>이다. 사실 이 책은 헌책방에서 샀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만 불우한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녹록치 않은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에서 경계를 넘어섰다 말하는 부제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불우한 예술가가 어디 여성뿐이겠는가? 또한 그들의 나이도 제각기다. 부유해서 유학간 사람도 있었고, 여성으로서 크게 억압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여성이라는 것만으로 작업실을 잉태의 현장으로, 미술가를 어머니로 일반화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게다가 미술계에서도 ’경계’라는 단어가 종종 사용되며 그 의미는 이 책에서의 의미와 좀 다른 느낌이다.

<사랑받을 권리>는 그간 읽었던 심리학 서적에서 의문스러웠던 점을 좀 더 줌인할 수 있어 좋았다. 거의 워크북 스타일이지만 기존 심리학 서적에서 미흡했던 자아와의 대화부분이 많이 보강되어 있어 어떤 점을 포인트로 대화를 풀어나갈지 참고가 된다. 그리고 성격상 심리 테라피 분야에 더 가까운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욕망의 코드>는 소비심리에 관해 참 재미있는 부분들을 많이 알려주었다. 기존 소비자심리에서 말하는 것에서 한 층 더 나아간 느낌이었는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좀 매끄럽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니까...너무 많은 이야기를 일일히 설명하고 반증하면서 굽이굽이 끌고나간다고나 할까? 그리고 너무 많은 브랜드와 지엽적인 브랜드 설명들이 등장해서 그것을 뚫고 이야기의 초점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진작부터 읽고나서 마무리로 중요한 부분만 다시 읽었다.  일단 책의 논리적 전개와 구성은 맘에 들었지만 정치쪽은 잘 몰라 ’공동체주의자’라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볼 때 뭔가 놓친것이 있나?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책만 봐서는 공동체주의가 딱히 나쁜 것 같아보이진 않지만...) 그리고 후속작으로 <도덕, 정치를 말하다>가 곧 출판될 것이다(샌델의 저서는 아니고 촘스키의 제자였던 조지 레이코프임). 이 책만큼 주목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책도 궁금하다.

이번달은 사실상 4권의 책을 읽은 것이라 생각하고 베스트를 뽑아야 하므로 딱 1권만 선택해야겠다. 근데, 읽은 책들이 꽤 맘에 들어 한권만 꼽기는 뭐하지만 책의 기획이나 구성이나 번역, 모든 면에서 탄탄했던 <정의란 무엇인가>가를 9월의 베스트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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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코드 - 우리를 소비하게 만드는 '필요' 그 이상의 무엇
롭 워커 지음, 김미옥 옮김 / 비즈니스맵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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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의 소비자들은 매우 영리하다. 아직도 일각에서는 충동구매나 과시형 소비, 과소비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광고의 홍수에 면역이 된듯 나름대로의 가치관와 노하우를 발휘하여 구매유혹의 함정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덕분에 마케터들을 더욱 분주해진다. 가격과 품질이 더이상 소구점으로 작용하지 않는 시장의 현실 속에서 기발한 디자인과 광고, 각종 차별화와 틈새시장의 공략을 시도해 보지만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고 히트상품을 만들어 내기란 쉽지않다.

그런데 <욕망의 코드>를 보면 위와같은 생각에 전환을 가져오는 몇가지 묘한 풍경들이 발견된다. 무슨 음료인지, 왜 사야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별다른 광고조차 하지않고 열렸던 레드불의 카이트보드(익스트림 스포츠의 일종) 이벤트, 절대로 캐릭터에 특성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헬로키티, 사양길에 있던 브랜드라 광고를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저소득층의 지지로 매출이 급상승했던 맥주 PBR(팝스트 블루리본), 본업도 부업도 아닌데다 보수없이 소정의 선물만 받으면서도 열심히 입소문을 내고 보고서까지 작성하는 매직피플 등등. 이들은 기존 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머케팅'이라 부른다. 

'모호한murky'과 '마케팅marketing'의 합성어인 머케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번째는 일상생활과 브랜딩 채널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고도로 세련된 마케터들의 전략에 관한 것이다.(p.15)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이다. 머케팅이 의미하는 것 가운데 나머지 절반은 대화의 소비자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소비자와 소비되는 물건 사이의 관계, 즉 내가 머케팅이라 일컫는 관계는...허심탄회한 공모관계로 발전하고 있다.(p.16~17)


따라서 머케팅에서는 종전의 매스마케팅 시절에 성행했던 상의하달식 수동적인 구매방식을 뛰어넘어 하의상달의 구매, 즉 소비자의 개성과 의지를 반영되는 방식의 시장이 성립된다.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언급한 PBR맥주인데, 저가인 탓에 학생들이나 노동자계층에서 인기를 얻고 급기야는 '저항브랜드'로 대표되며 오히려 소비자가 기업을 살린 사례가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풀뿌리의 힘'이라 표현했는데, 이처럼 소비자가 의지를 가지고 마케팅에 참여하는 것은 '소비자 시대'의 참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시사하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끌어내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머케팅의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비밀이 소비자가 가진 '욕망의 코드'에 머케팅이 부합하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개인으로 느끼기를 원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느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욕망 코드다. (p.49)

헬로키티에게는 처음부터 부여된 키티만의 스토리가 없다. 이에 더해 입도 없다. 그래서 무표정해 보이며,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개인적으로 헬로키티에 대해 '키티는 음침해'라는 표현까지 들어봤다.) 즉, 여기에는 투사가능성이 있어 한 소비자의 키티는 그가 부여한 개인적인 스토리를 갖는다. 반면, PBR맥주나 힙합패션, 매직피플은 집단의 일부가 되고픈 욕구, 특히 주류집단이 아닌 다양하고 특별한 집단의 일부가 되고자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주류집단에 반하는 흐름은 특히 청소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미래의 청소년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머케팅의 사례를 만들어갈지 사뭇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욕망의 코드>는 머케팅에서 풀뿌리의 힘을 '발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진정한 윤리적 소비의 의미에 '적용'하는데까지 이야기를 확장해 나간다 . 현재 우리는 '녹색혁명', '지속가능성' 등을 표방하는 제품의 구매에 윤리적 소비의 의미를 두지만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일부 주동적인 소비자들의 목소리일 뿐이며, 한편으로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보상으로 사치품 소비가 늘어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대신 머케팅 시대의 진정한 풀뿌리의 힘, 즉 소비자 혁명의 징후로서 DIY 자영업체와 같은 수공예 운동을 제시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소규모 자영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운동이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했다.
손수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하고 대중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행위는 그야말로 정치적이다.(p.331)


물론 수공예 운동은 아직 대량생산과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대책이 없다. 이점은 분명 약점이고 실망스러운점이긴 하지만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대화와 소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무척 흥미롭고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동안 최선이라 생각했던 합리적인 소비를 넘어 윤리적인 소비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된 점이 매우 뜻깊었다.

향후 머케팅이 어떻게 성숙해갈지, 또 우리는 그러한 시장 속에서 소비자로만 남을 것인지 풀뿌리의 힘을 발휘하는 생산자, 혹은 입소문 에이전트가 될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우리를 둘러싼 물건들의 의미와 가치가 전적으로 우리로부터 흘러나간 것이지 우리가 그들을 통해 부여받는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기며, 현대 소비자문화를 올바로 향유할 정체성의 힘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린 다음에야 세상이 우리를 규정할 것이다.
브랜드가 우리를 규정했던 것과 달리 우리가 브랜드를 규정했다.(p.358)
- 척 디(퍼블릭에너미/리드 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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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을 권리 - 상처 입은 나를 치유하는 심리학 프레임
일레인 N. 아론 지음, 고빛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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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획안, 별로 신경써서 한 거 아니야’, ’교수님 편견이 워낙 심해서 내 논문을 낮게 평가한 거야’, ’난 상관없어 너 원하는 대로 해’, '난 오직 최고의 배우가 되는 것에 내 생을 다 바칠 거야',  ’학벌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 바닥에서 30년 터줏대감인 나는 못 따라오지’, ’나는 저렇게 아무한테나 달라붙는 사람 싫더라’

이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평범한 말 속에 담긴 심리를 이 책에 따라 분석해보면 각각 ’최소화하기’, ’외부 요인 탓하기’, ’경쟁에서 빠지기’, ’과도하게 성취하기’, ’부풀리기’, ’투사하기’ 라는 6가지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방어기제’란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심리적 수단으로 여타 심리학 서적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친숙한 개념이지만, <사랑받을 권리>는 이것을 테스트와 사례 중심으로 심층 분석하여 최종적으로 ’못난 나’에서 ’사랑받는 나’에 이르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각종 방어기제에 의존하는 자아(自我)인 ’못난 나’는 원제 <The Undervalued Self>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저평가된 자아’ 정도로 직역할 수 있으며,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나 열등감이 심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의식하지는 못해도) 스스로 자신이 못났다고 여기기 때문에 늘 인간관계 속에서 ’순위매기기’에 열중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오는 친밀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더불어 친밀감과 친구의 숫자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렇게 늘상 순위를 매기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속에서라도 이 ’못난 나’가 높여지길 원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진짜 못난 모습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숨겨진 ’못난 나’의 다양한 모습들을 확인해보고, 해결책으로 제시된 ‘능동적 상상법’을 참고하여 ’관계맺기’를 배워간다면 보다 바람직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사랑받을 권리>는 ’못난 나’에 관한 새로운 심리학적 관점을 주장하거나 기존 학설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어기제의 돌파에 중점을 둔 점, ’성인아이’라는 개념과 원가족(자신이 태어난 가족)을 중심으로 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trauma, 심리적 외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 외부요인인 트라우마와 함께 타고난 본성도 ’못난 나’에 작용한다는 것을 포괄한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한 ‘능동적 상상법’에 있어 1차에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2차 방어벽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이 무척 고무적이다.

저자는 1차, 2차 방어벽을 각각 ‘내면의 비판자’, ‘보호자-학대자’라고 부른다. ‘내면의 비판자’는 트라우마로 인해 형성된 자신에 대한 부정적 관점의 목소리이다(예> 넌 파티 때 사회를 맡기엔 너무 말주변이 없잖아? 괜히 실수해서 창피만 당할 거야). 이 내면의 비판자와는 ’관계맺기’의 대화법을 연습함으로써 서로 화해하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더 큰 장애물인 ‘보호자-학대자’의 벽을 뚫어야 한다. ‘보호자-학대자’는 단순한 관계맺기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기나긴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된다. 게임이나 도박, 술 등의 중독이나 헛된 욕망과 같은 것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보호자-학대자의 모습인데, 처음에는 보호자로서 달콤하게 유혹했다가 나중엔 벗어나지 못하도록 희망과 의지를 꺾는다.

이처럼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온전히 사랑받는 자아로 회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나를 기분좋게 만드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을 것이다. 마치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사랑하는 여인 실비아의 눈동자를 푯대 삼아 기획자의 품을 떠났던 것처럼, 사람에게는 아련히 사랑스러웠던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고 자신의 감옥을 탈출할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를 기분좋게 만드는 사람’을 떠올려보는 것은 ’순위매기기’에서 ’관계맺기’로 가는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면 당신에게는 이미 사랑받을 권리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랑받을 권리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권리와 의무가 함께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권리를 요구해야 할 첫번째 상대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받을 의무는 자신의 ’못난 나’를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재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나아가자. 이렇게 나를 올바로 알아가려는 노력이 지속될 때 내 마음은 컵에 담긴 물에서 넓은 호수만큼 성장하며, 한 두 방울의 검은 잉크쯤은 품어내고 맑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을 수 없는 부당함과 억울함, 타인들의 상처까지 감당할 수 있는 너른 바다에 이르기도 한다. 따라서 사랑받을 권리의 회복은 개인의 행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위대함에 이르는 첫 걸음임을 기억하며, 이 책의 가치를 충분히 만끽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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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0-10-1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는데 글로 나타내는 수준은 이렇게 다르군요!
훌륭한 리뷰입니다. 추천, thanks to까지 꾸~욱~~~

탄하 2010-10-18 22:35   좋아요 0 | URL
top님, 추천과 칭찬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인데 어여삐 봐주셔서 너무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