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다. 예수님은 인생이 죽는 빵 대신 죽지 않는 영원한 빵을 먹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님이라는 빵을 먹고, 그 빵을 먹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모두 들을 수 있습니다.
보는 것뿐 아니라 듣는 세계가 열려야 합니다.
한국인은 들음을 통한 영적 각성에 익숙한 민족입니다. 우리 신화를 보면 종(鐘)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습니다.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나면 종소리로 알려 주는 자명고가 있었고, 종을 치면 "에밀레" 울어서 아이를 집어넣어 만들었나 의심하게 하는 에밀레종도 있습니다.
사회 복지의 핵심은 사람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입니다.
뭔가를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밥을먹으면서 감사할 줄 알게 하는 것이 교회에서 해야 할 진정한 복지의 시작입니다.
하는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싹쓸이하지 말고 남의 먹을 것도 남겨 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처음으로
프랑스어는 동사 ‘듣다‘가 ‘이해하다‘와 같은 단어예요.
예수님은 유다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같이 먹는 것은 용서한다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은 유다에게 "나가서 해야 할 바를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히려유다를 동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지 말 걸 그랬구나" 하며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배신자까지 헤아리시는예수님은 이 잔칫상에서 가장 외로운 분이셨습니다.
먹는 것은 먹는 대상을 없어지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우리말도 이해하다‘는 ‘듣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빵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빵만 안겨 주면 다 만족할 줄로 압니다. 하지만 빵은 기본일 뿐이고,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보는 것은 내가 보려고 하면 보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은들으려 해도 안 들리고, 안 들으려 해도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자신을 위한 걸음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내어 주는 걸음이었습니다. 지금은 공생의 시대가 싹트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상생의 구조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원리가 상생의 원리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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