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해용.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남전주고등학교졸업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통계학과졸업고려대학교 대학원 통계학과 석사(경제학) 및 이학박사한국전자통신연구소 전임연구원 역임성신여자대학교 자연대학장 및 대학원장 역임미국 워싱턴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 방문교수호주 맥커리대학(Macquarie University) 방문교수한국조사연구학회 회장 역임•현재 :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 P-1
바보 아저씨‘ 로 불릴 만큼내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아온이해용 교수의 인생 찬가! - P-1
2년 내리 대학에 낙방하고 하루짜리 거지 노릇을 하게 된 사연. 7년 동안 사귄 여자 친구에게 실연을 당하고 좌절한 내막, 30여 년 전 직장에서 만난 부인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가36편의 에세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P-1
포복절도할 표현과 구수한 입담에 빠져 정신없이 책을 읽다보면우리는 어느덧 이해용 교수의 낙천적인 인생관에 공감하는 자신을발견하게 된다. - P-1
특히 이 책은 고상하고 선비적이어야 한다는 우리 수필문학의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자유분방한 사고, 유머와 풍자가 어우러진글쓰기로 독자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수필의 새로운 가능성까지제시하고 있다. - P-1
요즘 나는 매일 애인을 만들며 산다. 어제는 산에 올라 돌 틈에 피어있는아름다운 들꽃에 반해 그 꽃을 애인으로 삼았다. 오늘은 깃털이 아름답고 어른엄지손가락만한 아름다운 산새에 반해 그 새를 애인으로 삼았다. 이렇게애인으로 삼다보니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내 애인이 되었다. "나는 바람둥이‘ 중에서 - P-1
그 당시 어머니는 한살배기 내 동생과 나를 화로 가에 앉혀놓고 동생머리를 빗어 주시며 늘 공부를 시켰다. 강의 내용은 누가 우리 집에 와서 "너네 아빠 어디 갔니?" 라고 물으면 "전주로 장사 갔어요." 라고 대답하라는 교육이었다. 그리곤 꼭 뒤를 이어 다짐하는 말이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지?" 라고 묻거든 "아니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교육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귀가 따갑도록 반복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이 우리 어머님께서 어린 내게 해주었던 이상한 교육이었다. 그 때 어머니의 교육을 잘 받은 덕분인지 모르지만 아버님은 6.25를 무사히 넘기시고 80세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 P-1
내가 자란 후에 당시를 회상하시던 어머님은 밥을 늦게 할 수 밖에없었던 이유를 말씀하셨다. 밥만 얼른 해서 김치에 간장하나 달랑 놓아 주면 빨리 해 주었을 텐데 귀한 자식에게 그런 밥상을 주고 싶지않으셨다고 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코끝이 찡해오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머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징얼대기만 했으니 그 당시 어머님은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어머님의 그 정성은 오늘날 우리 형제들이 건강한 육신과 올바른 정신으로소박한 꿈을 안고 살아가는 보통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이라 생각하며늘 감사하고 있다. 어머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 P-1
즐겨 먹었던 것은 산에 나는 고사리, 취, 더덕, 도라지와 들에 나는달래, 쑥, 미나리 같은 푸성귀였다. 간식거리로는 어름, 다래, 깨금 같은 산에서 나는 열매들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면 으뜸가는 건강식이었던 셈이다. 산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아침에 일어나 관솔(소나무에서 가지가 죽어 말라 붙어있는 것으로 약간의 기름기가 있어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음)을 따다가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울창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은 선녀들이 달밤에 내려와 목욕을하고 올라갈 정도로 깨끗했다. 개울에는 수세미로 닦아 놓은 듯한 바위가 널려 있었다. 바위 사이로는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고 물속에는붕어나 피라미, 불무테기(동사리라는 고기를 우리 고향에서 부르는이름), 메기, 뱀장어, 그리고 빠악 빠악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빠가사리(동자개) 등이 헤엄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이나 소나무껍질을 벗겨 연명하거나 개떡이나 꽁보리밥으로 춘궁기를 지냈다. - P-1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대였으니 공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학교를 다닌다 해도 대부분 초등학교를 나오면 진학을 포기하고생업에 종사하였다. 200여 명이 살던 우리 마을에도 한글을 읽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관공서에서 공문이오면 글을 아는 사람을 찾아가 묻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교와중학교가 우리 마을로부터 십리 정도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었다. 십리는 4킬로로 어린이들이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러니일기가 나쁜 날에는 결석을 자주 했다. - P-1
나도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학생을 가르치는 업에 종사하고 있다. 강단에 서다보면 어려움도 있고 서운한 일도 많다. 그 때마다 선생님을생각하며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대학생들이라 업어서 개울을 건널 일은 없지만 학생들이건너야 할 인생의 깊고 험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어 주려고 한다. 어떤 제자가, 언제 어느 곳에서 나를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기에나의 선생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세상 모든것을 사랑하자"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고 있다. 내가 사랑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도 아마 선생님의 크신 사랑에서 얻어진 것이라 믿고 있다. - P-1
간식거리는 잘사는 집 애들은 가끔 갱엿이나 깜밥(누룽지의 전라도사투리)을 자랑하며 먹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애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애들의 간식거리는 산과 들에 널려있는 자연이 주는 식품이 전부였다. 뗏장뿌리(잔디뿌리)나 칡뿌리를 캐어 껌처럼 씹어 단물을 빨아 먹거나, 찔레나무 새순을 꺾어 껍질을 벗기고연한 속을 염소처럼 씹어 먹거나, 삐비(들에 나는 억새 같은 풀의 꽃라 불리는 풀의 꽃대를 뽑아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때로는 보리나 밀을 서리해서 불에 구워 먹었다. 불에 구운 보리를 손바닥에 놓고 비벼서 후후 불면 보리 껍질은 날라가고 구운 보리알이 손바닥에 남게 되는데 이것을 먹었다. 보리를 구워 먹다 보면 새까만 끄름이 입술과 얼굴에 묻어 마치 식인종 도깨비 같았다. 이런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박장대소하고 떠들며 장난치고 지내던 일이 우리의 추억이 어린, 어린시절이었다. - P-1
아이스케키를 먹으면서 먹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애들을 향해 "세상에 가장 추한 놈이 남이 머 먹을 때 바라보는 놈이야" 라며 약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비위가 좋은 애들은 한입 얻어먹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기도 했다. 당시에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었다. 나 쪼꼼‘ (나 조끔만 주라는 약어)이라는 말이었다. 누가 맛있는것을 먹고 있으면 손을 벌려 나 쪼꼼! 하며 따라다녔다. 아이스케키의 환상적인 맛을 보지 못한 애들은 아이스케키 통에서 흘러나오는얼음 녹은 물을 손바닥으로 받아 그 시원함을 느끼며 대리 만족하는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 P-1
나는 요즘도 길을 가다가 뻔데기(번데기를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팔고 있는 가게를 그냥 지나가질 못한다. 구수한 냄새도 냄새지만 오돌오돌 씹히는 고소한 번데기 맛은 내 어린 시절의 피와 땀과 인내로점철된 추억이 깃든 맛이기 때문이다. - P-1
어쨌든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는 해야겠는데 오래 손 놓다시피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니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때 ‘3당 4락‘ 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루 4시간 자면 떨어지고 3시간 자면 붙는다는 말이었다. - P-1
그 다음 해 나는 재수라는 생활을 했다. 절망과 버림받음으로 느끼는 처절한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해 번듯한 학원에 다니지 못하고 작은 어머님 댁에서 공부를 했다. 공부가아니라 수도였고 현실도피였다. 자살이 왜 필요하며 절망이 죽음보다더 참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귀한 소득을 얻기도 했다. 일년 간의 방황의 끝은 역시 참담했다. 다시 시험에 낙방을 했다. 죽고싶었고 죽기 위해 제1한강교로 나가 보았다. 순간 강물에 어머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머님이 날더러 "이 못난 놈! 죽으려면 무엇을 못하겠느냐! 대학이 인생의 전부냐!" 하시는 것 같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발길이 사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1년 만 더 해보자며 독한 마음을 먹고 시작한 삼수는 오늘날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었다. 입대영장을 받아들고 막다른 골목에선 나는 죽기 살기로 주경야독 했다. 결과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K대 통계학과에 합격했다. 그 당시 통계학은 일반 사람들에게 잘알려진 학문이 아니었다. - P-1
대학을 두 번 실패하고 나니 산다는 것이 사치스러웠다. 나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공부 잘하는 아들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있었다. 그런 아들이 대학 그것도 두 번 씩이나 낙방을했으니 내 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식 잘못 둔 부모님 또한 얼굴들고 어디를 다니기 거북하셨던 것이 사실이었다. 낙방한 나는 시골집 구석진 작은 방에 틀어 박혀 죄수마냥 때가 되면 어머님이 넣어 주시는 밥만 축내고 있었다. 밥은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고 있었다. 죽음과 생의 기로에서 주사위를 하루에도 여러 번 던지며 지냈다.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다. 괴로움을 이기기 위하여 궁리 끝에 거지 노릇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인생에 실패하면최후로 거지 노릇 하면서 목숨을 연명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일찍 실습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 P-1
동냥을 마친 나는 마음을 다시 잡아 삼수를 하게 되었고, 노력 끝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동냥을 통해서 체득한 매우 값진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실망도 사치다. 두 번째는 ‘이 세상엔 사람이 못할 일은 없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다. 셋째는 ‘은혜는 입기는 쉬어도 갚기는 어렵다.‘우나에이 세 가지는 오늘날 나의 생활신조가 되었다. 그 때 내게 동냥을주셨던 분들께 아직도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아쉬운 대로 이렇게나마 그분들께 먼저 감사를 전하고 싶다. - P-1
문제는 학비였다.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돈 쓸 일은 자주 다가왔다. 수중에 돈은 떨어졌지, 갚아야 할 빚은 늘어가지,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먹느냐 굶느냐가 문제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밥집에 외상이 너무 많이 깔려 밥을 먹으러 가기가 미안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외상으로 몇 달을 살자니 밥집 아주머니뵙기가 죽을 맛이었다. 당시는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집에다 SOS를 쳐도 무소식이었다. 시골의 가족 생계도 어려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나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때 되면 어김없이 밥이 나오는 군대생활이 그리워졌다. 친구들에게사정을 말하기도 구차스러웠다. 이것저것 창피해서 한 끼 두끼 굶다보니 이틀 정도를 굶었다. 돈이 있어 다이어트를 하려고 굶었다면 영광일 것이나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 굶는다고 생각하니 내 인생이지만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이틀을 굶고 나니 장발장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배고픔을 참는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힘들었다. - P-1
이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대학교 삼학년이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체검사가 있었다. 나는 신체검사 결과 재검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X-Ray를 다시 찍어 결핵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것이었다. 재검 결과 오른쪽 폐에 결핵이 발견되었다. 청청 벽력같은일이었다. 그런 병이 내게 걸리다니 순간 하늘이 노랗고 땅이 꺼지는듯 했다. 담당의사 선생님께서는 당장 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그날부터 SM(Streptomycin)주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파스라는 먹는 약도 주시면서 빠지지 말고 시간 맞추어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죽는다고 겁을 주셨다. 겁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결핵으로 죽어갔다. 당시 만해도 결핵은 거의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젊음 하나 믿고 쉬지 않고 뛰다보니 건강은 돌 볼 겨를이 없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객지에 나와 먹는 것은 부실하고 일은 많았으니무쇠인들 배겨 냈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당장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아니면 휴학을 해야 되는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의사선생님께 휴학을 해야 되는지 아니면 학교를 다녀도 되는지를 물었다. 의사선생님은 치료를 하면 결핵은 전염되지 않으므로 학교에 다녀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핵은 소모성 병이므로 늘 잘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살라고 했다. - P-1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그렇듯이 국진이 할머니의 일과도 따님 하는일마다 시비를 걸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이었다. 담배는 강남 아홉 대였다. 친구도 없어 늘 혼자서 노시거나 좁은 집을 거니는 것이전부였다. 나는 가끔 월급을 받는 날이면 국진이 할머님께 담배를 사다드리거나 과자를 사다드리기도 했다. 작은 선물이지만 선물을 받으시면 국진이 할머님은 "간나 새끼 이런 건 뭐하러 사왔나" 하시면서아주 좋아하셨다. 처음에 국진이 할머님이 "간나 새끼"라고 하시는말씀이 듣기 거북했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친하고 사랑스러운 손아래사람에게 쓰는 말로 ‘좋은 갓난 아기처럼 예쁘다.‘는 의미로 쓰이고있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다. - P-1
식당에 들어서니 평생처음 받아본 진수성찬이 큰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기왕 주는 음식이니 잘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배도 조금고프던 차라 더욱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뼈있는 몇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속에서는 "어머니를 방망이로 때려 쫓아낸 딸은 이렇게 잘사는데 착한 동생은 왜 그렇게 못사는지 하나님도 공평치 못하다." 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진수성찬을 얻어먹은 죄로 부드럽게 얘기를 했다. "착한 사람이 꼭 잘 살라는 법은 없나 봐요? 착한 국진이 엄마는 어수도렵게 사는데 이모는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말이예요?" 이 말을 들은 국진이 이모가 나를 바라다보았다. 이렇게 국진이 이모댁에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은 나는 후식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 P-1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특수한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여행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만 해도 1년 미만의 해외출장은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부부가 동행할 수 없었다. 나는 1978년 5월 28일 결혼을 하고 그해 12월 유럽의 자그만한 나라 벨기에로 연수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야 벨기에라는 나라는 중북부 유럽에 위치한베네룩스 3개국 중에 하나이며 꽤 잘사는 나라이고 6.25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16개국 중 한나라라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P-1
유럽도 살기 좋다는 5월이 왔다. 마침 교육을 담당하던 BTM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교육을 강의 할 강사가 없다며 우리 3명을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연구소로 위탁 교육을 보냈다. 위탁 교육을 받기 위한 모든 비용은 연구소에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대우는 대단한 대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0대 초반의어린 사람이 매니지먼트자격으로 교육을 갔으니 BTM에서는 내가 한국 정부에 큰 빽이 있는 사람으로 오해했음직도 하다. 마드리드에서4주 교육 또한 BTM에서의 교육 못지않게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 세계적인 전자통신계의 유명한 까바예로 박사의 직접 교육과 대접을 받았으니 말이다. - P-1
카페를 나서며 돈을 지불하려고 1만 리라(그 당시 1만 리라는 우리돈으로 8천원 정도였다.)짜리 이탈리아 돈을 지불하니 종업원이 돈이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면서 그 돈을 가지고 위조지폐감별기로 가지고 갔다. 갔다 온 종업원은 그 돈이 가짜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확인해 보자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이태리 돈 50장을모두 확인하더니 20장 정도가 가짜 돈이라며 버리라고 했다. 여행하기 전에 먼저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이태리에 가면 사기꾼들이많다는 말을 익히 들어 의심을 하긴 했으나 이태리 땅에 들어서기도전인 모나코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어이가 없었다. 벨기에 은행이 설마 위폐를 주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앤트워프를 출발하면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은행에서 바꿔온 돈이 가짜라니 착한 마음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고 그네들이 진짜 돈이라고 판명해준 돈으로 커피 값을 지불하고 나왔다. - P-1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소렌토에서 바라 본 아름다운 경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산새나 들짐승들도 환경에 취해 영혼의 노래를 부를 것 같았다. - P-1
왜 똑같은계란인데 값이 틀리느냐고 우리말로 물었다. 영어도 통하지 않는데 우리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 어떻게 알았는지 1프랑짜리 계란은 메이드인 이태리이고, 3프랑짜리 계란은 메이드인스위스라고 했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고 있었다. 나는 자기 나라에서 생산한 계란까지도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구멍가게의 아저씨를 통해 오늘날 스위스가 왜 잘 살고있는지 수긍이 갔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은 백 마디 말보다 이렇게국민들이 느끼는 자긍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들의 자부심이 부러웠다. - P-1
"이왕에 교직을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한눈팔지 말고 사도로만 열심히 다니라고 하셨다." 은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사도가 고행의 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은사님의 사려 깊은 덕담을 듣고 돌아와 흥분된 마음으로 교단에 섰다. 교단에 서보니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인격과 지성 그리고 전문 지식인으로서 자격이 충분한가가 무엇보다 두려웠다. 내 자신이 나를 아무리 관대하게 평가해 봐도 훌륭한 교수로평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수업시간 마다 긴장의 연속이었고, 수업은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흥분되고 기쁜 일이었다. 대학 강단에 서는 일은 행복이었다. 보수가 없어도 강의를 할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동안 학생들이 나를 어떻게평가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나한테 배우고 나간 제자들이 사회에서 맡은 바 일을 충실히 감내하고 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오니 그것만으로 내게 위안이 될 뿐이었다. 하사실 내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큰 목적 중의 하나는, 배움이높고 지성과 지식을 겸비한 인격이 출중한 학자를 만나서 부족한 것을 많이 배우고, 나 자신이 나를 인정하는 그런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가난하지만 지성과 인격을 겸비한 겸손한 선비를 꿈꾸었다. - P-1
몇 년 전 산동네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동네 반상회를 다녀온집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반색을 하며 내게 "동네 꼬마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하고 물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묻는 말에 이런 싱거운 사람 봤나 하고 한편 생각해 보니 궁금해서 "뭐라 하는데?" 라며 물었다. 마누라는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동네 꼬마들이 당신더러 바보 아저씨라고 한대" 하면서 이 사이에 끼어있는 통깨 씹는 모습보다 더 고소한 웃음을지었다. "동네 꼬마들이 당신에게 인사만 하면 당신이 껌도 주고 과자도 준다며? 그래서 애들이 당신더러 바보 아저씨라고 한대, 동네 아줌마들도 다 알고 있다던데? - P-1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바보, 새치기 한 번 할 줄 모르는바보, 길거리에 휴지조각 하나 버릴 줄 모르는 바보, 한번 한 약속은목숨을 걸고 지키는 바보,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할 줄 모르는바보, 돈 안 생기는 일에 땀 흘리는 바보, 남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 P-1
용서를 비는 바보, 내 자랑 한번 못하는 바보, 미련할 정도로 법을 잘지키는 바보,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바보, 아부한번 못하는 바보,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바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즐거워하는 바보 이런 바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어느 곳에서 나와 같이 이 청명한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산동네에서 같이 살았던 용희, 호야, 병국이, 은지 등등 그 당시 나를 바보 아저씨라고 부르던 꼬마놈(?)들이 그립다. 그리고 그들에게 바란다. 곡식이 잘 익을 수 있게 해 달라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릴케의 시를 읽고, 별을 세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것까지도 사랑하겠노라는 우리의 영원한 시인 윤동주님의 서시를 읊으며, 폭군에 맞서 비폭력 무저항으로 조국 인도를 구한 간디의 정신을 본받아,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린 마음으로 더 큰 바보로 살아가 주기를 기대해 본다. - P-1
"교수님! 제가 교수님께 위선자라고 했는데 왜 저를 불러 혼내지 않으셨어요?" 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 내가 너를 혼내지? 네 말대로 나는 위선자야. 그럼 너는 위선자아니니? 그리고 나는 네가 다시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왜 너를 부르니." 그 말을 듣더니 혜선이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혜선아 너 잘못한것 아무것도 없어. 세상에 위선자 아닌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내 자신이 위선자 아니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단지 남보다 덜 위선을 떨면서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 네가 나한테 이런 쪽지 썼다고 내가 너를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날 그렇게봤으면 잘 못 본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일등 하기로 한 약속을 잊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이런 얘기를 나누고 난후 혜선이는 눈물을 거두고 안심한 모습으로 내 방을 나갔다 - P-1
후에 혜선이가 우리 집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학창시절에 자기가 교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그런 일을 했노라고 이실직고 했다고 했다. 선생님을 놀리다니. 이런 고얀놈을 봤나!! 그래 이게 제자를 사랑한 죄라면 죄이겠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놀림을 당할 수 있다. 오직 나의 소원은 내 제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건강한 모습으로 좋은 가정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 주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런 마음이 제자를 사랑하는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 P-1
"뭐예요?" 힘으로 들어가하고 물으니 은지 엄마가 주신 호박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며 바나나를 놓고 갔다. 지금은 바나나가 비싼 과일이 아니지만 그 때에는 바나나가 귀하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은지 엄마가 다녀간 후 조금 있다가 다시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리더니 이번에는 호야 엄마가 사과를한바구니 들고 왔다. 이어서 직장에 갔다 돌아온 병민이 엄마가 단감을 들고 찾아왔다. 김 사장님 댁에서도 빈대떡을 보내왔다. 우리의 의도는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대박이 난 것이다. 다음 날 오후에는 연세드신 할머님으로부터 호박 잘 먹었다는 극진한 인사도 받았다. 우리는 변변치 않은 호박 한 두개를 전했는데 그 호박은 여러 가지로 둔갑하여 값으로 치면 몇 배로 대박이 났다. 거기에다 덤으로 이 교수님댁에서 준 호박이 맛이 있어다는 인사와 인심 좋은 사람으로 동네 소문이 났으니 이만한 장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부부는 이 하찮은 일을 통해서 나눔이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주는 즐거움이 받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 P-1
(1) 자기 짝이 세상에서 제일임을 믿어라. (2) 사랑을 표현하라. (3) 항상 주의하라. (4) 다 이야기하라. (5) 잘못의 책임을 자기가 져라. (6) 칭찬하기를 잊지 마라. (7) 그날의 문제는 잠들기 전에 해결하라. (8) 부부만의시간을 가져라. (9) 함께 기도하라. (10)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라. 그 십계명은 그리스도 교인으로 이들의 사랑을 지켜주는 맹세였다. - P-1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 P-1
"큰 애는 얼마짜리예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주저함도 없이 "30만 원이에요."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글을 "둘째는 얼마짜리에요?" 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 "20만원짜리예요." 라고 대답을 했다. 나는 순간 아주머니가 애들을 상점에서 사가지고 가는 것으로 착각을 할 뻔했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도 "애가 30만원 20만원 이라니 무슨 말씀이에요?" 라고 물었다. 그러니 그 아주머니가 내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더니 "아저씨는 애 안 키워요?" - P-1
"아이고! 사장님! 잘 모르시는 구나. 30만원 20만원이라는 말은 애들 학원비 이야기예요." - P-1
나이 들어 마누라에게 책을 잡히면 늙은 말년이 순탄치 않다는 데, 이런 글을 썼다가 그런 빌미를 줄까 겁이 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답게 이야기 하지 못하면 천추에 한이 될 것 같아 천기를 누설하기로 했다. 이 세상에서 남자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두 여자를 대라면나는 당연히 한 분은 어머니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마누라라고 말할것이다.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 P-1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의 대 철학자 플라톤은 "사랑이란 가난과부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 당시에는 보완적 관계에 있는 상태를 사랑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역사학자 알 빈 토플러는 "사랑이란 죽음과 악 대신 삶과 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죽음을 막는 생명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처럼 대가들이내린 사랑에 대한 정의는 죽음과 삶, 생명 또는 힘과 연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한글 대사전을 펼쳐보니 "사랑이란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일 또는 그러한 마음이다."이라고적혀있었다. 몸과 마음을 바치는 희생적인 일을 사랑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사랑이 무엇인지 어설프게나마 알 것 같았다. - P-1
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체형이 다르듯 결국 행복도 제 눈에 안경일 수밖에 없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자가 있는 반면에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자도 있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불행하지 않는삶이 행복한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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