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라..

제목이 좀 선정적(?)이다.

저으기 걱정을 했지만,

몇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괜찮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로 해 본다. ^^;






남극탐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 되는 것들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블리자드(귀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듯. ㅋ)라고 하는 것으로,

맹렬한 눈보라를 말한다.

눈보라니 만큼 당연히 차가운 바람.

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초속 14m를 가볍게 돌파한다.

일단 블리자드가 심해지기 시작하면,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탐험을 중지하고 서둘러 텐트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나마 텐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텐트가 순식간에 눈으로 덮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자체의 무게도 엄청나다.

계속 눈을 치워내지 않으면 텐트가 무너지는 것도 잠시.






두 번째로 위험한 것은 크랙, 혹은 크레바스이다.

이것은 본래 같은 현상인데,

크랙보다 크레바스가 훨씬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킨다.

크랙은, 한 마디로 얼음의 균열이다.

약 30m 정도 까지의 균열을 크랙이라고 부르고,

그 이상의 것을 크레바스라고 하는데,

그런 크랙, 혹은 크레바스만 있다면 돌아가면 되지만,

대개는 그 위에 살짝 눈이 덮혀있다는 것이 문제다.

탐험을 하던 사람이 그 위를 걸어서 넘어가려고 하면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극지방에서는 물에 젖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영하 10도, 20도는 가볍게 넘어버리는 극지방이니만큼,

물에 젖는 다는 것은 몸이 얼어서 생명에 지장까지도 줄 수 있는 심각한 사태이다.

혹시라도 물에 젖게 되면, 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






세 번째로 위험한 것은 화이트아웃(Whiteout)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남극은 온통 흰 색으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림자나 물체간의 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거리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로 이 현상이 화이트아웃이다.








일단 이 화이트아웃이 발생하게 되면,

전후좌우, 상하가 온통 구별이 되지 않는다.

단지 중력에 의해 내 발이 붙어 있는 곳이 아래일 가능성이 높고,

내 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앞 쪽일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감각 중 하나인 시각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내가 보는 것이 올바로 보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현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새들도 겪는 것으로,

화이트아웃이 발생할 경우에는 많은 새들이 얼음벽에 부딛혀 부상을 입기도 한다.





전후좌우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

내가 보는 것조차 신뢰할 수 없는 상태,

바로 여기서 사람은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화이트아웃을 직접 겪을 경우

매우 심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문가들도 아니면서 남극탐험을 나설 각오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정신에 문제가 있을지도.. ㅡㅡ;)






수형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소위 '먹방'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똑같이 감옥인데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죄를 저질렀다고 가둬두는 곳이 교도소라면,

그 안에서 또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두는 곳이 먹방이다.

감옥 속의 감옥, 그 곳이 바로 먹방인 것이다.






왜 먹방이라는 곳이 그토록 무서울까.

이미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옮긴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심각한 위협이 될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먹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먹방은 우선 외부와의 일체의 연결이 단절되는 곳이다.

다른 재소자들이 있는 곳과도 완전히 분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 조차 듣기 어려운 곳이 바로 먹방이다.

보통 감옥 내에서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면회를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밖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고작 가로, 세로가 25 X 20 cm 정도 되는 작은 식구통(식사를 넣어주는 통) 밖에 없다.

그 곳에서 하루종일을 몸조차 쭉 펼수 없는 채로 보내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것은 둘째다.

가장 무서운 것은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것 이외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온통 깜깜한 어두움 뿐이다.

교도소가 자유에 대한 형벌이라면, 먹방은 감각에 대한 형벌이다.






자신의 감각기관이 별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서서히 감각기관을 사용하기를 포기해버린다.

더불어 외부의 자극(자극이라는 것이 없으니..)에도 반응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와는 반대급부로 한없이 내부로 파고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가지 못해 매우 무력한 상태로 변해버린다.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하게 변하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는 일도 있다.

결국 자신을 그 곳에 집어 넣은 사람들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요컨대,

인간의 감각을 무력화 될 때,

인간은 한없이 약해진다.

정신력도 서서히 소진되어 버리고,

말 그대로 서서히 미쳐간다.






정신병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얀 집'이다.

영화나 책 등에서 드러나는 정신병원의 이미지는,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방이다.

실제로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왜 흰 색으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환자의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색깔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온통 흰 색으로 도배를 한 곳에 사람이 있으면, 정신이 안정될까?

마치 앞에서 설명한 화이트아웃을 접하는 기분은 아닐까?

그것도 잠시만 참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환자의 감각 중 시각은 이미 그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그 것 뿐인가.

환자는 억압복을 입는다.

억압복은 소매가 아주 긴 옷으로, 그 긴 소매를 몸 뒤로 돌려서 단단히 고정시키는 곳이다.

억압복을 입는 순간 환자는 두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두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각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는 혀를 깨물어 자해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공이 붙어 있는 마스크를 씌우기까지 한다.

구속복을 입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정신병원에서는 환자의 안정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체의 소음을 없앤다.

청각의 상실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중증환자들에게 사용되는 방법이다.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감금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정신병원 자 체에 대한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서 밝힌다. 정신질환은 뇌에 발생된 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이것은 위나 근육 등에 생긴 병과 마찬가지로 취급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약물치료와 함께 특정한 심리적 치료를 병행하면서 치료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신병원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든 감각을 자극하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것 만으로도,

인간은 미쳐버릴 수 있다.






인간이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얀 방 안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라.

또는 쥐죽은 듯 적막하고 깜깜한 빈 강의실에 혼자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공포 영화에서 가장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은,

귀신이나 살인마가 스크린에 비췰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기 직전의 적막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반대진술도 가능하다.

인간이 미치지 않으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말 말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을 통한 자극들은,

때로 우리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가시에 찔리고, 시끄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뿌리고,

짜고 쓴 맛, 신 맛을 보기도 하고, 온갖 벌레에 물리기도 한다.

정신적인 자극들도 때로 인간들을 힘들게 만든다.

갑자기 생긴 수많은 일들, 그로 인한 스트레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소중한 대상의 상실 등은

인간을 자살로까지 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 안식을 갈구한다.

힘든일 하나 없는 그런 삶,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 하나 없는 삶,

내가 원하는대로 모두 술술 풀려가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평안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까?







어쩌면,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그 수많은 일들은,

우리를 미치지 않도록 만드는 고마운 이유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사고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찢기고, 긁히고, 찔리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촉감이 아직은 정상이라는 반증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막게 만든다면,

아직 당신의 귀가 붙어있고, 제대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리타분한 말 같지만,

당신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우선 이 글을 지금까지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시각과 사고력은 어느정도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이 꿈꾸는 절대 평화로운 유토피아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딛히고, 각종 위험이 우리를 위협한다.

바로 그런 곳이 이 세상이다.

또, 만약 그러한 외부적인 자극이 전혀 없다면

당신은 정말 미쳐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현재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미쳐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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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론이 뭐야? - 개정판
사토 가츠히코 지음, 김선규 감수 / 비타민북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어쩐지 대충대충이며 애매한 것 투성이이고,

 우리들이 믿어왔던 ‘질서정연한 자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양자론을 구축한 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양자론은 물질이나 자연이 단순히 하나의 상태로 정해지지 않고 굉장히 애매한 것을,

그리고 애매함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인 것을 우리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1. 줄거리 。。。。。。。

 

     제목대로 양자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쓴 책이다. 저자는 빛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인류의 시도(1장)가 어떻게 양자에까지 이르렀는지, 역사적 순서에 따라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있다.(2-3장) 이어서 양자론에 담긴 함의들(4장)을 설명한 뒤, 그에 대한 반대 주장들과 반대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인 다 세계 이론에 대해 서술한다.(5장) 마지막 장(6장)에서는 양자론이 현대의 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과학 청소년을 위한 알기 쉬운’이라는 첨가구가 덧붙여진 물리학 이론서이다. 대충 고등학교 수준에 맞춘 내용인가 싶어서 빼어 들었는데(고등학교까지는 다들 비슷한 걸 배우니까), 다행히 기대했던 정도다. 아무래도 전공과 꽤나 거리가 있는 분야이기에 처음 시작으로는 이정도가 알맞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 왜 전공과 상관도 없는 책을 읽으려 하느냐고? 뭐.. 교양으로? ^^

 

2. 감상평 。。。。。。。

 

 

     청소년들을 주 타깃으로 한 책이라 그런지 필요 이상으로 어려운 수식들은 많지 않았다.(그래도 어려운 식들은 꽤나 보였다..;;) 또,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본문의 이해를 돕는 적절한 일러스트들이 있어 책장을 넘기는 데 큰 힘이 됐다.

 

     양자론이란 꽤나 흥미로운 분야다.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한 양자의 성질은 고전물리학의 엄격성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정작 양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양자가 가지고 있는 그 모순적인 두 가지 성질을 어떻게 조화 시킬 수 있을지 어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결국 관찰되는 것만 가지고 말하자,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넘어가니..)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존재 → 하나인 동시에 셋인 존재,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 그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가 있는 관계.. 퍽이나 재미있는 기독교적 적용이 아닐까? 물론 모든 물리학의 궁극적 목표인 ‘대통일이론’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에 맞추어 추구되고 있다는 점은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책의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오타의 문제는 심각할 정도다. 종종 중요한 개념에서조차 O, X가 바뀌는 식이니.(그래서 이 책의 개정판이 그토록 빨리 나왔나보다.) 또, 우리나라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일본식 한자 표현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좋을 것 같은 책이다. 나처럼 교양으로 대충이라도 훑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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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바쁜 하루였다.

근데 너무 바빴는지 사고를 쳐버렸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한 권 잃어버렸다... ㅜㅜ

도서관 회원증 뒷면을 보니까

분실 시에는 똑같은 책을 사다줘야 한다고....;;;

 

추운데 세 시간을 돌아다녔더니 머리도 띵하고...

 

이래저래 머리 아픈 날이다.

 

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자주 깜빡깜빡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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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마라 -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첼로 이야기
볼프 본드라체크 지음, 이승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좋은 느낌이다.

행복하다.

나는 음악을 완성하고 대가는 나를 연주한다.

이것이 악기가 누리는 축복이다.

 

 

1. 줄거리 。。。。。。。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세계적인 명장이 탄생시킨 한 악기의 생(生)을 되 집어 보는(악기한테 이렇게 써도 되나 싶긴 하지만) 책이다. 악기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부터 그의 소유주가 되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침몰 사고로 인해 부셔졌다가 극적으로 다시 복원된 일 등 작가는 의인법을 사용해 첼로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만든다.



 

2. 감상평 。。。。。。。

 

     음악에 관한 책을 하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악기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생을 훑어보는 작업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처럼 음악에 대해 조예가 없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책을 읽기 보다는 이렇게 대각선으로 음악에 접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판단도 들었다.

     책 자체는 딱딱한 설명 투로 되어 있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주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말랑말랑 했던 걸까? 첼로를 주인공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일종의 자서전을 쓰고자 했던 저자는 아주 자신과 첼로를 동일시했는지(사실은 그래봤자 작가 자신의 감상을 첼로의 생각을 빌어 쓴 거겠지만) 첼로가 느꼈을 감상을 서술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해 버렸다. 자연히 수사구들은 늘어나고, 이야기는 길어지고, 당대의 느낌보다는 현대인이 당대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대핸 서술들만 잔뜩 등장한다.

     애초에 이 책을 골랐던 두 번째 목적인, 비껴치는 역사 읽기를 통해 음악사에 관한 단편들을 약간이라도 습득하기를 바랬던 것은 사실상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소위 명기(名器)라고 불리는 명품 급 악기들에는 최초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명인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초기에는 첼로의 줄을 동물의 내장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 사실 완전한 무식쟁이가 이 정도라도 알게 된 건 아예 소득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뻗어나간 건 아닌가 싶은 점만 빼면 그런대로 괜찮은 책이다. 하긴 상상력에 ‘어느 정도’를 부여하기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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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 가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슬픔이라는 강렬한 자극을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순종과 인내이다.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야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침대에 시트 한 장 없이 누우라고 해도 누워야 한다.

굵고 뾰족한 금속 바늘은 그 자리에서 대여섯 번씩 팔에 찔러 넣어도,

환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몸을 움찔하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반항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순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들은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재판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형량이 달려 있는 것처럼,

자칫 실수로 그의 비위라도 거스리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 처럼,

의사의 말에 집중한다.

 

 

뿐만 아니다.

응급실에서는 인내 또한 중요한 미덕이다.

몇 번씩 찔러댄 결과로 얻어낸 피 검사를 하는데도 족히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곧바로 알려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는 언제나 나보다 더 급한 환자들이 많은 법이다.

당연히 결과를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으면 안된다.

그 것 뿐만이 아니라도 응급실에서는 기다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의사가 지금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짜증스런 목소리로 무성의한 대답을 듣기 일쑤다.

가끔씩이라도 찾아와주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중한 상태여서 당장 수술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너시간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절대적 순종과 한 없는 인내라..

응급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금방이라도 부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이렇게 훌륭한 자질을 지닌 성도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대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사제들이 의술까지도 담당했던 이유가 짐작이 된다.

 

 


벌써 12시가 훨씬 넘어 이제 1시가 다 되어간다.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여기 도착했으니 벌써 4시간 째이다.

그러고보니 저녁도 건너 뛰어버렸다.

배가 고픈건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무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조금 전부터는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가져왔던 성경책 사이에 꽂아있던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방금 깨달은 사실 두 가지.

아무도 내가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다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뭐.. 사실 응급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아버지가 누워계신 이동식 간이 침대의 난간 옆에,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

우리가 오기 전, 누군가 흘린 피이리라..

 

 
 

이전에도 아버지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받은 인상은 하나같이 나쁜 것들이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이 한결같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지던트들이 제대로 잠도, 식사도 대충해결하기 일쑤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더구나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이라고는 온통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 뿐이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사람을 놔두고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앉아 있는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친절했다.

한 이틀은 면도도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전에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고압적인 자세도 아니었고,

시종일관 웃는 인상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짜증스럽거나 무성의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응급실 의사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2시다. 

글 쓰는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새벽 3시.

한 시간 정도 깜빡 졸았나보다.

여전히 응급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신다.

좀 나아지셨는지...

 

 
 

좀 전에는 채 두 살도 안 돼 보이는 아기 하나가 들어왔다.

뭘 하는지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간호사 5명이 달려들어 아기에게 무엇인가를 한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저렇게 어린 아기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잠시 든 생각 하나.

오늘날 응급실에서는 수시로 피를 뺀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란다.

자기들이 고치기 어려운 병만 만나면 피가 더러워서 그렇다는 이유를 대며,

무조건 피를 빼다가 종종 사람을 죽이곤 했던,

중세 유럽의 의사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지..

 

 

 
온 몸이 결려온다.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나 보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새벽 4시.

또 아버지에게 굵은 바늘을 꽂고 피를 뺀다.

XXXX,

내 살에 바늘을 찌르는 것 같다.

피를 빼지 않고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의 수준은 낮은 건가..

 

 


응급실이 잠시 조용해 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앰브런스도 지금은 좀 잦아들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몸 한 번 편히 펴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앉은 채 눈이라도 쉬게 해 줄 수 밖에..

 

 

6시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의사는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보라고 하는데...

........

 

 


휴.... 모르겠다.
 

 

 

지금은 오후 8시 14분.

6시에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 예배 준비하려면 교회가서 할 일이 많다.

 

 


좀 전에야 집에 돌아왔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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