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폭력을 먼저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1. 줄거리 。。。。。。。

 

     교육학 관련 책인 줄 알고 꺼내든 책이다. 남미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럽의 침략 이래도 오늘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억압적 사회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다룬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이론서’나 ‘혁명지침서’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저자가 교육의 타깃으로 삼은 사람들은 주로 ‘무식한 농민’이나 ‘근시안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무시하는 ‘억압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빼앗기고, 모든 기회를 봉쇄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자의 관심대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억압자들은 교육을 통해 그러한 사회구조를 ‘자연스럽고’,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바른 교육’, 즉, ‘억압자를 위한 교육’(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형식은 ‘은행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다. 피교육자를 단순히 입금되는 돈을 저금해 두는 통장으로만 여기고 계속 교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을 쏟아 넣는 방식의 교육으로는 사회비판적, 사회변혁적 시각을 갖기 어렵고, 반대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내용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대화식 교육’이라는 생각이 또 하나의 핵심주장을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확실히 남미 쪽 상황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꼭 남미에만 국한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비록 그 형태나 겉모습은 약간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꽤나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근본적 신념이긴 하지만, 경제적 ․ 사회적 불평등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힘 있고 가진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어이없게도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구조는 상당히 많은 못 가진 자들에게 지지되고 있다. 이 책의 첫 판이 나온 지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책의 유용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착잡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목표’에는 상당부분 공감한다. 현실과 유리된 교육은 결국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고, 그런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구조를 강화시키는 교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어를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화식 교육’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는 상황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교육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교사의 수급, 교육 환경의 구성, 예산 문제 등) 당장 프레이리 식의 교육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남는다.

     또, 이럴 경우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인 ‘혁명’을 통한 해결방식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우려가 든다.(저자의 생각에도 언뜻 이런 생각이 묻어 나온다) 결국 폭력을 통해 또 다른 질서를 세우겠다면, 그 질서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문제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에의 어려움이라는 말이다. 체 게바라의 투쟁이 아무리 아름다운 목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부군을 죽였다. 그렇다고 정부군에 속한 사람들이 억압자들과 동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혁명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피델 카스트로나 스탈린 식의 권력독점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프레이리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 지 나로서는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무지를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들은 비단 개인적인 요인들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단결되지 못한 노동자는 언제나 고용주들의 만만한 상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느슨한 농민들의 연합체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결합해 있는 거대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이길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프레이리 한 명 만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점이라면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좌파 빨갱이니 극우 꼴통이니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념적 분쟁만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정작 중요한 ‘인간’이 소외당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인간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누가 심어 놓은 것인가!

 

 

     내가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혁명적 상황에서의 폭력의 정당화’라든지, ‘궁극적인 사회 구원의 동력으로서의 인간’ 등의 주제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저자도 책에서 말했듯이(“나는 그리스도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으로 확신한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불의를 그냥 두고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저자의 이력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WCC에서 일했다고 한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어), 현실에 대한 진단에 기독교적 용어들이 몇몇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주제어로 설명하는 부분(“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은, 마치 ‘자기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를 설명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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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가 우스운 꼴, 추한 꼴의 자신을 보여주고 싶겠는가.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성격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재산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 간에,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당연히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사람들이 하루종일 거울을 보는 횟수를 살펴보라.

그러면,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에는 큰 전신 거울이 있다.

언젠가 무심코 거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속으로 한 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적어도 80% 이상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나 옷 차림을 비춰보았던 것이다. ^^








사실, 거울을 보는 행위 자체가 

자신에게 직접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별로 없다.

어떤 사람이 단지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 멋진 외향을 꾸미겠는가.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시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남자인데,

어느날 자신의 모습이 물에 비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후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루종일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좀 더 그 모습을 가까이 보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나르시즘'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혹시라도 이 나르시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서라고 해도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추해지는 것일까?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쓰는 존재가

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경험상, 그리고 역사상의 수많은 인물들에 관해 살펴보건대,

분명히 인간이 추해질 때가 있다.








왜?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을 때,

인간은 추해지게 된다.

(이 말은 시각장애인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리라 믿는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모습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눈이 가려진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다른 사람의 경고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눈을 가리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요인들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상대방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

혹은 더 많은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정도가 심해져감에 따라 그 사람의 눈도 서서히 가려져 간다.

그 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딱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스토커가 되어서 상대방을 괴롭히기까지 한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을 너무도 미워할 경우,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생각이 앞선 나머지 눈이 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제 3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뻔하게 얽어매려는 시도임을 알아챌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모를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자신의 명예나 지위,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열심도 눈을 가릴 수 있으며,

돈이나 보상받고자 하는 욕심들도 우리의 귀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을 제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적이라고 단정시켜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선포된 존재는, 복수의 표적이 되어버린다.








추해짐이 단지 그 사람 하나만의 문제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쉬운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자동차 운전자가 눈을 가린채로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비단 그 사람 자신 뿐만 아니라

같은 도로에서 함께 운전하고 있는 다른 운전자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때문에 눈이 가리워진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눈이 먼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당신이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조심해서 운전할 수 밖에 없다고 조언해 주고 싶을 뿐이다.

눈을 가리고 운전하는 사람을 앞에서 막아선다거나,

이리 저리로 운전하라고 옆에서 명령하는 것은

더 큰 사고를 유발할 뿐이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의 눈을 가린 것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리 쉽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단 차가 멈추기라도 해야 눈을 가린 것에 손을 대지 않겠는가.





차선의 방법으로, 방어운전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피해가는 것이 좋다.

물론 그 사람이 지나치게 이탈된 코스로 달려간다면,

경적을 울려서 한 번쯤 제지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당장 손을 뻗쳐서 운전대를 잡고 세우려고는 지 말기 바란다.

어쩌면 당신을 사고를 유발하려고 하는 적대자의 손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한 가지,

당신 자신이 그렇게 눈이 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마저 눈이 먼다면,

이젠 정말 큰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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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몇 백년이나 된 문화재가 그렇게 쉽게 파괴되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

 



하지만 최근 일련의 모습들은 뜨끔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떠들어 대고,

그 앞에서는 연일 제삿상이 차려져 수 많은 사람이 절을 한다.

삼보일배를 하며 주위를 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곡을 하며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불을 지른 사람은 반역자 취급을 받고,

덩달아 노숙자들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사람들이 꽃을 가져와 그 앞에 두고 있다.

마치 사람이 죽은 것처럼.

 


 

무생물의 인격화.

그리고 사실 그 인격화의 대상은 국가, 혹은 국가정신.

참 무서운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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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박정권의 행태나 근대화는 인간을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만들었고,

반공교육, 그중에서도 유신체제에서의 반공교육은

북의 주민을 ‘이리떼’나 괴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것은 북의 주민을 동포는커녕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비인간화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에 유신체제의 진면목이 있었다.

 


 

1. 줄거리 。。。。。。。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직후부터 약 30년 동안 활동했던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 관한 책이다. 원래부터 한 권의 책을 목적해 두고 쓴 글들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각각의 인물들에 관한 글들을 써 놓은 것을 모아두었다.

     저자는 여운형을 ‘남북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김규식은 남북통일을 위한 협상을 위해 몸 바쳤던 사람으로, 김구는 약간은 지나칠 정도로 완고하며 국제정세에 눈을 돌리지 못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반면 이승만이나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공사상을 남용하고 일본과의 부적절한 관계설정을 해 결과적으로 큰 해를 끼친 인물로 묘사한다.

     한편, 조봉암은 한국 최초의 진지한 사회민주주의자로 현대의 복지국가 이념과도 비슷한 이상을 오래 전에 제시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장준하는 유신독재정권과 맞서 남북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사람으로 그려진다.


 

 

2. 감상평 。。。。。。。

 

     사실 우리는 현대사를 배운 적이 없다.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현대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우리가 배운 인물은 이승만, 김구, 그리고 박정희가 전부다.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인물들은 배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해 놓은 엄청난 비리로 인해 자주 언론에 드러났기 때문이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에 이르면 그저 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아는 것에 불과하다.

     요컨대 우리가 아는 ‘역사’란 삼국시대,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시대에 관한 것이고, 그나마 ‘시험에 나오는’ 범위는 일제시대에 관한 것까지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몇 개의 공화국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배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역사는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먼 이야기로 여겨지고, ‘역사 바로 세우기’가 뭐가 중요하느냐,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지 하는 인식이 판을 친다. 친일파도 좋고, 독재자도 좋지만, 자꾸 생각을 하라고, 머리를 쓰라고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귀찮아한다. 답답한 일이다.

     어떻게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로 둔갑을 하고, 악덕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기회주의자들이 국가의 원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들이 서로 결합을 한 결과 더 이상 정의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 때문에 입는 유형, 무형의 손실과 직간접적인 피해가 엄청난데도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이런 현실을 뒤바꿀만한 엄청난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각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100% 신뢰할 수도 없고, 서술에는 늘 편향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좌우에 걸쳐 선정해 한 데 모아 평가를 해 보았다는 시도는 매우 높이 살만 하다. 또, 저자의 서술이 ‘민족’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점은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역사를 단순히 기록이나 암기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현재와의 연결 가운데서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역사 교육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자기가 급할 때만 국민 운운하고, 알량한 애국심에 호소하는 언론과 정치인들, 그리고 뭐가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인지 차분히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대중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절망가운데로 몰아넣은 공범들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 한국역사의 교훈이 되어서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인물들을 다시 한 번 비춰보고 적절한 기준으로 평가해보려는 이 책의 내용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좋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서평이 좀 딴 데로 빠진다. 저자의 세계관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위에 언급된 부분에서 관해서는 썩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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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가와사키 마나미 지음 / 작품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추억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건

선명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옅어지고 난 후에만 가능할까요.

 

 

1. 줄거리 。。。。。。。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연애 소설이다. 연애 소설이라고 해서 남녀가 만나서 어디에 가고, 무슨 말을 하고 하는 식의 일반적인 ‘연애 행각(!)’을 다룬 것이 아니라, 거의 짝사랑에 가까운 사랑을 그것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당신’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열다섯 살짜리 작가가 중학생 주인공의 입장에서 쓴, 이색적인 소설.



 

 

2. 감상평 。。。。。。。

 

     요새는 그런 느낌을 느끼기가 쉽지 않지만,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막 모뎀이 보급되고 있던 시기였는지라(휴대폰을 갖고 있는 아이는 우리 반에는 거의 없었고, 한창 삐삐를 갖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아직도 정성들여 쓴 ‘편지’라는 것이 꽤나 마음을 훈훈하게 했었다.(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벌써 그렇게 된 건가..;;;) 편지란 보통 발신자와 수신자만 볼 것을 기대하고 쓰기 때문에 그 이외의 사람들이 보기엔 종종 민망한 표현들도 등장한다. 더구나 그게 연애편지라면 더욱 그렇다. 고르고 골라서 쓰다보면 왠지 점점 더 이상해지기만 하는 게 편지의 속성이다. 그런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게 재미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런 느낌을 주는 식으로 쓰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쓴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제 3자가 읽는다는 형식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더구나 저자가 실제로 우리나라 중학생 나이인 열다섯 살 때 썼다고 하니 그런 재미를 더욱 배가시켜줄 만한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소설의 내용은 약간 기대에 못 미쳤다. 나이는 어려도 책은 많이 읽었는지 사용하는 표현들이(어쩌면 번역자의 책임?) 범상치 않았고(?), 더구나 편지 형식만으로 수 백 페이지짜리 소설을 완성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편지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그냥 서술을 위한 문장들이 보이는 경우도 제법 돼, 재미를 반감시킨다.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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