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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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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

 

        어느 날, 별다른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아내,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 2년여가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싶었던 그에게, 한 사람이 나타난다.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어쩌면 아내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남자는 미하일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게 되고, 마침내 사라진 아내까지 만나게 된다. 



        소설을 1인칭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주인공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의도적인 듯, 이야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주인공을 단지 ‘선생’이나, ‘당신’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철저하게 주인공의 시각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내면에 대한 성찰’이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리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서술방식이다. 물론, 의미있는 심리적 변화의 순간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빠지면, 아무리 좋은 서술방식이라고 해도 그 빛이 바래버리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글의 첫 머리에서 아내의 실종으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밖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하지만 자유가 뭔가?

 

        오랫동안 나는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왔다. …… (중략) …… 투쟁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별난 권리를 옹호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갔다. 부모의 욕망의 노예, 타인과 ‘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결혼생활의 노예, 체중계의 노예, 정치체제의 노예, 금방 포기하게 될 무수한 결심들의 노예였다. 


        이 개념은 이야기의 끝까지 지속된다. 주인공은 에스테르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원래 바라던 무엇인가를 점차 잃어버리고 결국 완전히 관습과 상황의 노예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또 에스테르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사랑)을 위해 여타의 모든 부수적이며 옭아매는 것들로부터(‘결혼’까지도 포함하는) 자유로워지기를 원해서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이제 아내를 찾아 나서지만, 아직 버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히르였다. 

        자히르는 사람을 강력히 빨아들이는 무엇인가다. 어떤 사람이 한 번 보거나 만지고 나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래서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자히르였다. 주인공에게 자히르는 아내였던 에스테르. 주인공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야만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지만, 아내를 향한 꺼지지 않은 사랑으로부터도, 곧 자히르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된다. 딜레마였다. 

        하지만 마침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새기게 된 주인공은 아내와 다시 재회를 한다. 아내가 다른 이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주인공의 ‘깨달음’을 '증명'했다. 



        연금술사에서도 읽어 낼 수 있는 저자의 내적 성찰에 관한 의도가 거의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여전히 저자는 인간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고결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이번에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였다. 인간 외부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모습은, 근대 이후 신을 버리고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자 노력하던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완전한 자율, 신으로부터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오류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소재를 가져다 사용한다.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소재에 빠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될 테니 말이다. 저자는 아마 어떤 종류의 권위도 선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것들은 벗어나야 할 대상이며,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며,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하일과 그의 동료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사는 모습들은 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지처럼 구걸을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복장에, 한 밤중에 술을 연신 들이키며, 빈 건물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자유’였다. 이상이 미하일의 도시 친구들이라면, 중앙아시아의 친구들은 보다 ‘영적’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초원의 종교’를 믿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그런 식으로 발현되었다.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추구하던 이들이 결국 또 다른 종교적 형태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종교의 규칙에 따라 행하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 꽤 흥미롭지 않은가?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인간의 본성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는다면 온갖 종류의 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자유는, 인간 내부에서 지고의 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고,(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반대된다) 역시나 그런 전제 아래 나온 결론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다.(사실 세계관은 종교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러한 신념에서 나온 결론은 결코 온전한 것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냥 사랑 이야기로만 읽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약간 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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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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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보다는 머리의 문제다.

조련사는 심리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국적인 환경, 조련사의 꼿꼿한 자세,

차분한 태도와 흔들림 없는 눈길,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가는 태도,

이상한 소리(예를 들면 채찍 휘두르는 소리나 호루라기 부는 소리)…….

이런 것들이 동물의 마음에 의심과 두려움을 심어주게 된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 처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그것은 동물들이 알고 싶어 하는 점이기도 하다.

만족한 이인자가 뒤로 물러서면,

일인자는 관객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소리칠 수 있게 된다.

 

        인도의 폰디체리라는 작은 마을의 동물원을 경영하는 한 사내. 그의 두 아들 가운데 막내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피싱(‘오줌 싸는’이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었던 파텔은 자신의 별명을 파이(π)라고 짓는다. 인도의 정치사정이 돌아가는 것에 불안을 느낀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을 정리하고 캐나다로의 이민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캐나다로 떠나는 배에 오른 가족은 큰 재앙을 맞는다. 

        배가 침몰해버린 것이다. 졸지에 파이는 구명보트로 던져지고 만다. 태평양 한 가운데서 파이를 제외하고 배에 탔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더욱 배에는 하이에나 한 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늙은 암컷 오랑우탄, 그리고 뱅골산 호랑이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슬슬 파이를 위협하던 하이에나는, 호랑이에게 힘 한 번 못 써보고 잡아먹히고 만다. 이제 보트에 남은 건 파이와 리처드 파커(호랑이의 이름) 뿐. 

        파이는 그 가운데서 살아남고자 온갖 방법을 고안해 낸다. 배의 선창 안 있던 응급식량(고열량 비스킷)과 물이 담긴 깡통, 그리고 조난을 당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책 한 권. 파이는 호랑이와 한 보트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노와 구명조끼 등을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들어 보트와 줄로 연결한다. 그렇게 호랑이와의 위험한 동거가 시작된다. 

        구조의 손길은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파이는 그렇게 오랫동안 생활을 한다. 파커의 먹이가 떨어지지 않도록(그랬다간 자신을 덮칠지도 모르므로) 낚시를 통해 먹이를 제공해주고, 간이증류기구를 통해 물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서서히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는 작업을 시작한다. 동물원장의 아들로 오랫동안 아버지의 일을 지켜봤던 그였던지라, 동물의 생리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무려 227일간의 놀라운 생존 사투 끝에, 마침내 파이는 멕시코의 해안에 도달하게 된다. 파이는 살아 남았다. 


        이야기의 초반은 파이의 회상 장면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가 살던 폰디체리가 얼마나 그에게 아늑한 곳이었는지, 그의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옛날이야기를 하듯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파이의 어린시절 만난 세 종교에 관한 부분이 심상치 않았다. 파이 자신은 카톨릭과 힌두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갖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잠시 난감해 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기로 결정한다. ‘얼마쯤이나 가겠느냐’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었다. 철저하게 세속주의였던 부모들은 종교에 대해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고, 파이는 종교를 자기 식대로만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둘 모두 종교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의 정신적 혼란과 혼동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파이에게도, 그의 부모들에게도 종교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시골풍경과 경험들이라 솔직히 약간은 지루하고도 졸린 듯 한 서술들이 끝날 즈음, 갑자기 소설의 어조가 달라진다. 배가 침몰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골의 중산층 소년의 아름다운 추억회상기에서 생존이야기로 변한다. 그리 넓지 않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 더구나 그 곳은 태평양이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이는 소년답지 않은 침착함과 현명함을 보여준다. 환경적인 어려움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파이의 모습은,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초반의 약간 지루한 듯한 서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 부분에 관한 작가의 묘사는 매우 생생했고, 힘이 느껴졌다. 

        표류가 길어지면서 파이의 심리에도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아무와도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정신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파커가 없었다면, 파이의 투쟁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 자신을 잡아먹을지 모르는 호랑이를 길들이는 과정을 위해, 아니 생존을 위해 그의 두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고, 그런 긴장감은 파이로 하여금 일찍이 나가떨어졌을 수 도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역사발전의 동력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표류의 후반부에서 파이는 마치 정신착란에 이르는 듯 하다. 그 클라이맥스는 식충섬 이야기였다. 알 수 없는 섬에 도착한 파이는 그 섬에서 수많은 미어캣 무리를 본다. 그리고 섬의 군데군데 일정하게 파여진 호수들. 사실 지나치게 일사분란하고 규칙적인 그 섬의 모습에서 이미 그 섬의 심상치 않은 정체가 복선으로 깔려 있는 듯 하다. 밤만 되면 나무 위로 올라오는(본능과는 다르게) 미어캣들을 본 파이는, 그 섬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 섬은 하나의 거대한 생물로, 밤만 되면 유인된 물고기들을 산으로 녹여 섭취를 하고 있었다. 마치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이 환상적인 섬에 관한 이야기는, 파이의 정신세계가 잠시 혼란을 겪는 시기와 겹쳐져 서술이 되기 때문에 과연 사실로서 쓴 것인지, 환상으로 쓴 것인지 읽으면서도 잠시 혼란을 겪었다. 

        육지에 다달은 파이. 그리고 그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려는 해운사 소속의 일본인들. 그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지만,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빼어내어 자신들의 논리로 기록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파이는 오랜 표류생활로 인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아이로 비춰질 뿐이었다. 



         이야기의 전후에 실린 작가의 기조설명과 후기 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 소설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였다는 인상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이것이 움베르토 에코 식의 ‘속이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 소설의 성격을 쉽게 단정 짓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유이다. 작가는 이 책이 순수한 소설만이 아니며 사실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작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해 이겨내는 소년의 불굴의 의지를 이 소설의 주제로 삼은 듯 하다.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성취되었다. 독자는 어느새 소설 속의 파이와 일체감을 느끼고, 그의 고생에 함께 아파하고, 그의 성취에 함께 기뻐하게 된다. 그의 정신세계는 육체적인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성숙해 있기 때문에, 자칫 ‘아이의 생각’으로 인해 정신적 몰입도가 떨어지는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 짧은 소설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있는 감동의 요소를 깊게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루나 이틀 정도 시간만 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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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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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대사 위주로 글을 쓰거든요.


        매우 유머러스한 책이다. 작가인 주인공(뒤에 그 주인공의 이름은 이 책의 저자인 아멜리 노통으로 밝혀진다)은 어느 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왜 폼페이와 같이 아름다운 도시만이 화산재에 묻혀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을까’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화산 폭발을 일으켜 화산재로 덮게 한 것이 아닐까. 현재의 기술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미래의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품은 채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은,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약간 황당하다. 그는 서기 2580년. 전신마취로 잠이 든 사이에 주인공은 어느새 미래로 이동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셀시우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주인공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주인공이 그곳으로 납치(?)된 것은, 폼페이에 관한 진실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품었던 의문은 사실이었던 것. 셀시우스는 ‘위험인물’인 주인공을 감시한다. 

        주인공이 만난 셀시우스라는 인물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지능이 199이라는데 강한 자부심(좀 과할 정도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고귀한 귀족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천민(셀시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미래는 지능지수로 신분이 정해진다)으로 여기는 주인공과의 대화를 계속 유지한다. 물론 철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말이다. 

        셀시우스가 설명하는 미래상은, 어느 정도 오늘날의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다. 빈부, 학력의 격차, 사회갈등 등. 소설에 나온 해결책은 한 가지 방향으로 귀결된다. 그런 문제들을 없애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고착화 시키는 방법이었다. 미래의 인간들은 빈부격차의 문제를, 가난한 사람들을 지구의 남쪽(아마도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남아메리카)에 몰아 두고 아예 그들의 존재를 잊기로 한다.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고,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는 식이다. 학력, 사회의 갈등 역시 이러한 식으로 풀어간다. (발상의 정당함의 논의를 뒤로 한다면) 기발한 발상이다.

 

 

        소설의 내용 중에 ‘나는 특히 대사 위주로 글을 쓰거든요.’라는 대사가 있었다. 그 말대로 이 책 전체는 대사로만 가득 차 있다. 배경이나 행동에 대한 묘사는 극히 절제가 되어 있고, 오직 주인공과 셀시우스 둘의 대사로 200여 페이지가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지루하다는 감이 적은 것은, 역시 저자의 필력 때문이리라. 단지 대화로만 위기와 긴장, 초조함과 안도감을 주는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미래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들이 쉽게 빠지는 논리적인 오류 - 미래에서 과거의 어떤 사건을 바꾼다면, 그 사건은 현재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게 진행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미래의 인물이 어떻게 과거의 그 사건을 바꾸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는가 -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셀시우스의 입을 통해 현대의 양자역학 식의 이론을 제시하며 어느 정도 설명을 하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설명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장치일 뿐, 이야기의 주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큰 문제를 삼을 것 까지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인간세계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근본적인 목적이 아닐까 싶다.(그렇다고 딱딱한 논문식의 글은 아니니 너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쉽게, 재미있게, 그리고 빨리 읽어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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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르제 자니위스키 지음, 김명수 옮김 / 현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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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와 각이 없고, 단단하면서도 완만하고 부드럽게

서로 이어진 통로 내부의 표면들.

통로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연결되고 교차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모든 통로들이 목적지로 통해 있다.

네가 예기치 않게 머리를 부딪히는, 눈에 안 보이는 벽은 없다.

네가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 중에 하나다.

너는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

 

    교수가 쓴 소설. 이 소설을 출판할 당시 바르샤바 문과대학 학장이자 폴란드 작가 협회 부회장을 맡았다는 저자의 이력이 책에 무게감을 주기 위한 노력을 책의 첫 페이지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식이 가득 찼기 때문일까? 저자의 서문에 실려 있는 지나치게 설교적인 말투는 왠지 모르게 반감이 들도록 만드는 느낌이었다.(사실 서문을 읽고 난 후에야 저자의 이력을 읽게 되었다) 저자가 채식주의자이든, 극단적 환경주의자이든, 혹은 윤회론에 관심을 갖고 있든, 그것을 마치 강의실에서처럼 독자에게 굳이 책의 첫머리부터 강의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덕분에 책의 본문을 읽기 전부터 평점 1점 감점) 



    책의 내용은 쥐가 주인공인 특이한 소설이었다. 일명 동물소설. 물론,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은 뛰어난 풍자적 소설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우화나 동화 정도로 취급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인 ‘쥐’는 톰과 제리에 나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몸서리가 쳐지는 잔인하고, 끔찍하며, 혐오스러운, 바로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쥐를 묘사하는데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사용한다. 그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과정이 책에 매우 빠른 박자로 묘사되어 있다. 300여 페이지가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그리고 단지 한 마리의 쥐의 의식을 따라가는 내용의 소설이었음에도, 저자의 호흡이 워낙 가쁘게 진행되는 까닭에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책의 전체를 뒤덮고 있는 심리묘사, 상황묘사 등의 솜씨는, 번역된 문장들이었음에도 저자의 전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주인공 쥐는 왜 끊임없이 방황을 하는가,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과연 어디인가. 아마도 책을 읽으면서 쉬지 않고 질문을 했던 내용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대답은 아마도 그가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듯한 환상 가운데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어떤 윤회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결국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내용이 책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그건 저자의 생각일 뿐 내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그 두 가지의 주제 - 윤회론과 쥐의 일생 -가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쥐의 생태에 관한 매우 일반적인 관념들만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이런 일종의 밀착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드는 한 가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쥐를 주제로 쓰려면 적어도 쥐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연구해야하지는 않을까. 

    저자 서문과 역자 후기를 보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풍자, 혹은 비판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던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너무 의도가 많아서 오히려 그 의도들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단지 쥐를 통해 그런 심오한 가치들을 드러내기엔 소재가 빈약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름대로는 전쟁, 빈곤 등의 배경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것들은 그다지 많은 감흥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의도성을 지닌 글이었기에, 책 자체에 논리적인 문제가 생겨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가장 단적으로, 주인공 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의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그리고 그것이 도를 넘어서 인간들이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명칭들까지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쓴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같은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정도의 상상력까지는 발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소재의 참신성이나 묘사의 기술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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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성냥갑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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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사설집이다. 그가 한 잡지에 연재하던 사설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사설집이다 보니 특정한 주제에 관한 깊은 사색이라기보다는 매우 상황적이고 논설적인 글들이 대부분이다. 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 가운데 이 책은 첫 번째. 



        상황성이 매우 강조된 글들이기는 하지만, 역시 움베르토 에코답게, 그 주제는 매우 광범위했다. 최첨단의 인간복제에 관한 글부터, 고전에 관한 글까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관한 부분은 물론, 추억과 회상에 관한 문학적 느낌이 짙게 느껴지는 에세이까지. 

        저자의 관심분야는 매우 넓었지만, 결코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결코 겉도는 글을 쓰지 않고 있다. 특별히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컴퓨터 매체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은 지나치게 무절제한 감이 있는 오늘날의 대중문화 현상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지적을 하고 있다.(비록 그 글들이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 전에 쓰인 글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의 지적 깊이만큼은, 너무나도 닮고 싶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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