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 없는 사회 - AI시대, 사회적 위기
한병철 지음, 정창호 옮김 / 간디서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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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다분히 표지 때문이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콤팩트하면서도 비비드한 컬러의 표지를 안고 있는 철학책을 발견하고서 흥미가 생겼고, 여느 철학책과 달리 일단 다들 얇아서 좋았다. 뭔가 거창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면서 여기저기서 소총(짧은 문장) 사격을 하는 느낌이라 읽기에도 편하다.


여기에 또 한 가지, 한 교수의 책이 갖는 흥미로운 장점이 있는데, 바로 주제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는 수많은 현상들이 책에 그대로 옮겨지고, 그 안에서 저자 나름의 통찰을 보여준다. 책은 얇지만 항상 읽어 볼만한 내용들이, 그것도 피부에 와 닿는 주제들로 구성된 따끈따끈한 요리를 제공한다.





이번 책의 주제는 “존중”이다. 대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 시급한 주제다. 우리는 조롱을 칭송하고, 가짜뉴스에 슈퍼챗을 쏟아 붓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는 사람들이 모두 점잖고 예의 바르게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런 무례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나 용기를 보여주는 수단처럼 사용하는 모습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늘었다. 맹자는 인간의 네 가지 선한 마음 중 하나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수오지심)을 꼽았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맹자가 오늘날 인터넷 댓글을 조금만 읽어보면, 여기는 짐승들이 섞여 사는 곳이구나 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은 단순히 개인의 책임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에서 먼저 지적하는 건 성과사회라는 구조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에 따라 평가받는다. 좋은 대학을 나왔는지,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갔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존중이, 경쟁에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보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작된 대사지만, 이제는 정말로 어떤 사람들을 (그가 남들보다 재산이 적고, 학력이 딸리고, 사회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개, 돼지로 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심지어 그런 차별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그러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그랬느냐는 식의 핀잔까지 돌아간다. 공부를 잘하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자격을 얻는 데 있었던가.


문제는 이런 경쟁에서 모두가 승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누군가는 뒤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사회적인 모욕까지라면, 그 안에 쌓이는 감정이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소외와 굴욕이 사회의 분열과 공격성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이 부분은 오늘날 거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극우의 부상과 혐오주의를 설명해 주는 핵심 키워드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다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상한 개인 하나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비슷한 일이 왜 반복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외에도 소셜미디어에 관한 언급(“소셜 미디어는 방자한 행동을 포상하고,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이목을 끈다”)이나 존중에 필요한 시간에 대한 지적(“존중도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존중을 위한 시간이 없다.”)도 날카롭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즈음 우리 사회의 가장 위태로운 폭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정치에 관해서도 저자는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의견과 정체성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서, 특정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토론은 사라지고 맹렬한 싸움만 남는다고 말한다.


후반부의 정중함과 권위에 관한 논의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저자는 솔직한 감정만을 진짜라고 여기는 태도가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형식들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한다. 기분이 나빠도 인사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말을 가려서 하는 일이 꼭 가식일까. 오히려 그런 형식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기분에 매번 휘둘리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감정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것을 솔직함으로 포장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비용은 대개 주변 사람들이 치르게 된다.


익숙한 풍경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물론 짧고 단정적인 문장들이 이어지는 만큼, 복잡한 현실을 너무 간명하게 정리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다. 또 앞서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ㅡ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은 별도로 고민해야 하고.


그래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차리게 해 준다는 것만으로 이런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더 많은 성과를 내라고, 더 빠르게 반응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밀리지 말라고 재촉하는 사회에서, 잠시 멈춰 상대를 바라보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필요한 것이니까. 우리에게 정말 시간이 없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시간은 아깝다고 여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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