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 젤렌스키 대통령 항전 연설문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박상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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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푸틴이 이웃나라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한 지도 벌써 1년이 훨씬 지났다. 많은 사람들은 설마 푸틴이 그런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고 예측했었고, 또 우크라이나에는 세계 2위 군사대국인 러시아의 공격을 막을 힘이 없을 거라고도 예상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예측과 예상은 틀렸다.


러시아는 끝내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했고, 도살자 푸틴 패거리는 마치 6.25 때처럼 개전 후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전쟁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물론 일부 부유층은 진작 해외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힘입어 최근에는 역공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상황 가운데서 주목 받고 있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다. 아마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새로 알게 된 인물이 아닐까.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포격이 한창인 수도 키이우 어딘가에서 국민들을 향해 항전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연설을 끊임없이 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6.25 당시 자기는 제주도로 도망을 가 놓고 국민들에게는 서울에서 뭉쳐 항전하라고 했던 어떤 분과는 사뭇 다르다)






젤렌스키의 연설은 단지 자국민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그는 세계 각지의 우호국 인사들 앞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줄 것을 계속해서 호소해 왔다. 물론 단지 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서방세계가 군사적 지원을 해준 것은 아니겠지만, 또 그의 연설이 그 우호국의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젤렌스키의 연설문 열아홉 편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연설문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 의미에 대한 통찰이다. 개전 초 일각에서는 코미디언 출신의 대통령이 무능해서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헛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모름지기 대통령쯤 되려면 명문대를 나와 일찌감치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하거나, 법조계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후진적 정치관에서 나오는 꼰대의식이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력은 그 사람의 현재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이 그 사람의 진짜 능력을 가리는 가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실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가 코미디언이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저 일차원적인 슬랩스틱이나 선정적인 내용으로 눈길을 끄는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직접 제작과 각본에도 참여하고 꾸준히 사회참여적 메시지도 담아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쭙잖게 법전만 달달 외워 처세술로 높은 자리에 올라 정계에 입문하는 수많은 정치법조인들보다 백배는 나아 보인다.






여기 실린 연설은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청중들을 배경으로 한다. 젤렌스키는 자신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기억 속 역사의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꺼내고, 그걸 오늘의 현실에 오버랩 시킨다. 히틀러의 유대인 인종학살은 유대계인 젤렌스키 본인과 푸틴의 잔악한 민간인 학살과 겹쳐지고, 그런 히틀러를 자극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렸던 영국과 프랑스의 실책은 정확히 푸틴을 자극할까 두려워하며 무기제공을 주저하는 서방세계의 모습에 덧씌워진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했다는 “벽을 허물라”는 말은, 다시 그대로 적극적인 지원을 주저하는 독일 총리 숄츠에게 하는 말로 바뀐다.


그의 연설은 품위가 있고, 절제되어 있다. 무의미한 어구의 반복이나, 자기도 모르는 용어의 남발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모름지기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정도의 품격은 있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노골적이지 않다. 그의 연설문에 도움을 주는 비서들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단지 누가 써준 걸 대신 읽는 식으로는 이 정도의 호소력을 갖추기 힘들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선전하고 있지만, 전쟁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절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덕성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또, 이 큰 위기의 상황에서 젤렌스키 같은 좋은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부디 학살자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그리고 우크라이나에게는 영광이 있기를(Slava Ukra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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