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 - 연구 주제 선정부터 설계, 실행, 평가까지
케빈 엘리엇 지음, 김희봉 옮김 / 김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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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현대인들은 과학에 대한 신화에 빠져 있다. 과학과 신화가 어울리는 조합인가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과학에 대한 신화의 핵심 교리는 이렇다. 과학은 불편부당한 진리를 찾아가는 유일한 통로다. 과학은 팩트의 영역이고, 이건 그저 단순한 개인적인 신념일 뿐이었던 기존의 철학과 종교 등보다 진리를 찾아가는 도구로서 우월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이 “진리에 가까운”이라는 말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신화가 잘못되었음을 다양한 차원에서 보여준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작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가치적 판단의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말하는 가치의 영향을 받는 과학의 영역은 모든 과정에 걸쳐 있다. 우선 어떤 주제를 연구할지부터 가치는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부유한 선진국의 연구자들은 소득이 낮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보다 부유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에 좀 더 많이 뛰어드는 경향이 있다.


사실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연구할지에도 가치가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시설이 인근의 주민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쉽게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소위 “과학적”으로 분석해 입증하는 건 쉽지 않다. 어떤 물질에 집중할지, 그 물질의 농도를 어떻게 계산할지, 그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평균적 영향을 어떤 식으로 계산할지 같은 문제에서 얼마든지 “아무 문제가 없는” 방식으로 연구를 설계할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연구자들은 어떤 목적으로 연구할지, 연구의 방향 설정에서도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 과학적 연구방식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결론에 이르는 식이 아니다. 그건 처음부터 어떤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불분명한 요소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 불분명한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 역시 가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애초에 문제는 가치를 불분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일개” 개인의 신념쯤으로 치부하려는 태도에 있었다. 가치가 과학연구의 설계와 진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것이 좋은 가치인지, 그리고 그 연구 수행에서 만나는 팩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저자는 과학에서의 가치판단을 폐쇄적인 소수 전문가집단에게 독점시킬 것이 아니라 시민 집단들의 참여를 좀 더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 연구 수행 과정에서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그 연구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 사회적 우선순위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과학연구수행에 있어서 가치의 영향을 제대로 할 수 이는 장치를 만들자는 뜻이다.


이런 부분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 발생한 가습기 소독제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법원은 “과학적인 근거”로 기업측에는 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 과학에 대한 순수한(혹은 순진한?) 믿음이 판사가 그런 이상한 판결을 내린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다. 핵발전소의 “무해성”에 관한 과학적 근거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과학이 입고 있는 두꺼운 신화라는 옷을 벗겨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다만 이것이 과학이 갖는 합리성을 애초부터 부정하자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온갖 비과학적 주장들이 끼치는 해악은 훨씬 더 클 테니까.


결국 이 부분에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해 보인다. 최근 읽고 있는 다양한 영역의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인 게 흥미롭다. 시간이 갈수록 테크노크라트라고 불리는 기술관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요소를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역사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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