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 원작.


우리 어렸을 때는 무협지가 꽤 유행했었다. 흔히 말하는 김용의 소설들도 있었고, 그런 유행을 타서 나도 몇 권 읽어보긴 했었다. 다만 김용의 근본책들을 본 건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양산형 무협지들이어서 몇 권을 보다가 그 취향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뭔가 비슷비슷한 내용들만 이어져서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어린 나이였지만 무협지들의 특징은 금세 정리가 되었다. 뭔가 특별한 데가 있었던 주인공이 기이한 인연으로 갑자기 엄청난 무공을 얻고, 모함을 당하거나 위험한 일에 얽혀 들어가서 고생을 하지만 결국 모든 걸 평정한다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미녀들이 주인공 곁에 붙는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에 그 이름부터 뭔가 엄청난 것 같은 각종 무공과 그 파괴력에 관한 장황하고 맛깔나는 묘사와 서로 긴장과 협력을 지속하는 쟁쟁한 문파들에 관한 설정 같은 것들은 그 시절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히 김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수도 없이 제작되어 왔는데, 다시 한 번 그 시도들의 뒤를 잇는 영화가 나왔다.




견자단.


수많은 양산형 무협영화들 때문에 굳이 이런 영화를 골라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눈길을 둔 건 역시 견자단이라는 배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무술씬 만큼은 뭔가 보여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해 주는 배우니까.


그리고 확실히 대충 간단한 합 정도 맞추고 우당탕탕 찍어내는 양산형 무협 드라마나 영화들과는 과는 달리 확실히 선이 멋있다. 물론 홀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확실히 과장되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뭐 원작이 그런 거니까. 무협도 확실히 세련되게 연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그렇다고 오직 견자단 혼자 억지로 끌고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확실히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던 원작 때문이기도 했을 텐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적절한 서사가 부여되어서 이야기가 나름 괜찮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끌었던 건 초반부터 끈질기게 주인공 교봉을 무고했던 강민이라는 캐릭터다.


그녀는 개방의 부방주이자 주인공 교봉에게는 형님뻘에 해당하는 자신의 남편을 교봉이 살해했다고 주장해 결국 그를 개방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결국 일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를 묻자, 강민은 어린 자신을 납치해 결혼을 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비록 그녀가 했던 다른 악행들이 모두 무마될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심정은 공감이 되지 않는가.





축약.


원작이 워낙에 대작인지라 그걸 영화 한 편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화도 원작 중 초반 일부만을 따와서 교봉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중원의 개방을 떠나 거란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만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봉이 거란 진지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스토리가 썩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작을 잘 아는 사람이야 그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 있겠지만, 나처럼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인공 교봉이 갑자기 아주라는 여자와 급격히 사랑에 빠진 것도, 우연히 만단 단예와 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깝게 나오는 이유 같은 것들은 전혀 영화 속에서는 설명되지 않아 이해가 어려웠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개방파의 고위간부들은 자신들의 방주를 추방하는데 겨우 부방주의 아내 한 사람의 증언에만 의지하고 있고, 금세 죽일 듯 교봉을 몰아간다. 여기에 자칭 온갖 문파들도 발작적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지 다짜고짜 교봉을 몰아가는 데 동참하고, 심지어 후반엔 교봉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보인다. 정의니 공정이니 운운해도 하는 짓은 결국 그냥 동네 양아치들, 혹은 조폭이랑 비슷하달까.


물론 이런 무협영화는 그냥 즐기면 그만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확실히 견자단 액션이 볼만 하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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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3-0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협지 인물들의 특징을 분노조절장애로 표현한 것이 너무 공감되네요.

노란가방 2023-03-09 12: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좀 보신 분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