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회고록까지 쓴, 아직 젊은 작가는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꽤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책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꼽는 것 같다.
먼저 작가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건 조부모의 정서적 지지였다. 물론 그들 역시 전형적인 힐빌리였지만, 자신의 손주들에게만큼은 전적인 사랑과 관심을 쏟을 줄 아는 사람들(물론 그 방식이 종종 과격하긴 했지만)이었다. 덕분에 주인공은 물건이 날아다니는 험악한 상황이 집에서 벌어져도, 집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면서 불안해하기 보다는 근처의 조부모집으로 피신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힐빌리들은 대체로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직장을 얻고도 무단결근을 밥 먹듯 하거나 하루에 다섯 번씩 화장실에 가서 30분씩 보내고 돌아오면서도, 해고를 당하면서는 고용주를 탓한다.(문득 몇 년 전, 작업장에 와이파이를 끊어서 작업 중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하는 걸 못하게 했다고 특근 거부에 나섰다는 현대자동차 노조가 떠오른다) 모든 걸 다른 사람의 탓으로 여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책 후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2년도 안 돼서 대학을 졸업하고 명문대 로스쿨에 들어갔다는 게 아니라, 비로소 주인공이 자신이 모르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이 변화의 시작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마음을 열고 수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수많은 정치인들이 나서서, 자기가 온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슈퍼맨이나 되는 양 공약을 남발한다. 물론 당선되고 나면 대부분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경비견으로 변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결국 변해야 하는 주체가 변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부작용만 커질 뿐이란 점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은 정책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빈곤이라는 문제 역시 정책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좌파나 우파 어느 쪽의 주장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린 이 문제를 진지하게 개선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