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이 눈길을 끌어 집어 들었다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인가 싶었지만웬걸 내용은 제목과 다르게(?) 상당히 본격적인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었다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철학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 내용으로말 그대로 개소리(영어로는 bullshit)'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그 것이 성립하기 위한 요건어떤 상황에서 그런 발화가 나타나는지 등을 탐구한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미국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개소리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이건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특히나 정치인들의 주둥이에서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개소리는 보통 사람들의 귀를 피곤하게 만든 지 오래다.


그럼 개소리란 무엇일까책에 명확한 정의가 담긴 문장이 등장하지는 않지만정리하자면 허세를 섞어 진상을 꾸며대는 말이다여기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소리의 가장 큰 특징이 드러난다개소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최소한 거짓말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개소리의 경우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면 그만이다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예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이 점에서 우리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개소리 발화자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좀 더 좁게는 온갖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내뱉는 몇몇 정치인들혹은 일베류들소위 극우유튜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개소리의 본질이 이렇기에그런 개소리에 맞서는 일은 굉장히 높은 난이도의 작업이 되어버린다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팩트체크를 하면 그만이지만개소리를 남발하는 사람은 그런 식의 논리적사실적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작업이 불가능아니 무의미하다그의 말이 갖는 허점을 누가 지적하면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거나일부만을 떼어 오해를 낳았다거나심지어 나는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개소리를 내뱉으면 그만이니까.






책 후반에는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관한 관찰이 등장한다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말하기를 요구받을 때다이건 최근까지 매일 기자들 앞에서 뭐든 물어보라는 식으로 섰다가결국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온갖 개소리만 발화하다 최근에는 질문 자체를 통제하는 식으로 형식을 바꾼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오늘날의 이 개소리 확산 현상을 불러온 또 한 가지 사상적 경향을 언급하는데바로 정확성보다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개소리다이건 어떤 것이 객관적인 실체인지 우리는 완전히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가 퍼지면서 나타난 기괴한 결과물인데그 결과 우린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구조다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개소리를 남발하는 시대를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책이고분량도 본문만 따지면 7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처음엔 좀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다시 읽어나가면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하다그리고 책 본문 뒤에 붙어 있는 옮긴이의 글을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철학책이지만은근 현실세계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게 재미있다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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