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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문명 - 서구중심주의에 가려진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재발견
임기대 지음 / 한길사 / 2021년 12월
평점 :
베르베르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북아프리카를 동서로 나눌 때 리비아 서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목민족이다. 오늘날로 치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지다. 물론 책에도 나오듯 현대에는 북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도 다양하게 이주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베르베르족은 고대로부터 여기저기에 언급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적 결사체로서 활동하거나 어떤 중요한 국가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했다. 말 그대로 ‘사막의 유목민족’이라는, (정치적인) 중요성이 덜한 느낌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 관한 역하는 기록으로도 많이 남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이전의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마우레타니아 왕국이나 누미디아 왕국 등에서 잠시 얼굴을 비치고,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다른 민족들의 지배를 받아왔다.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아랍 민족과 상당부분 동화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런 베르베르족의 전반적인 정보를 담아낸 책이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 심지어 음식까지. 베르베르족에 관해 설명을 하려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통칭해서 ‘베르베르족’이라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주거주지와 마주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분화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중세의 분류가 오늘날에는 또 맞아떨어지지 않는 면도 있고. 북아프리카 전역에 퍼져 사는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 복잡한 구성을 가진 사람들을 민족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서 언어를 기준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베르베르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전반적으로 비춰보면서 이들을 조명하는 방식. 물론 문제는 또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이 언어와 문제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 이쪽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베르베르족이라는 범주를 좁힌 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그 역사를 훑어나간다. 앞에서 간단히 요약한 것처럼, 그들은 독자적이고 강력한 국가를 세우지는 못한 채 대신 카르타고, 로마,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이후, 여기에 강력하게 동화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아랍인과는 다른, 베르베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그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베르베르인의 과거만이 아니라 근대와 현대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담아낸다.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에 의해 멋대로 분할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베르베르인들도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아프리카에 기독교 문화인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피지배계층에 대한 통제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민족 간 분열 정책을 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알제리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 같은 경우는 그 땅의 베르베르인들을 좀 더 우대하는 정책을 폈고, 그 덕분에 꽤 많은 베르베르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을 한 이후에는 또 이게 일종의 독이 되어서 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억압의 빌미가 되기도 했으니...
확실히 이쪽 동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게 많아서, 호기심을 채워가며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근래에 베르베르인들에 의한, 베르베르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움직임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러 나라에서 일종의 투쟁에도 나서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그 와중에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해서 문제를 키우는 흑역사도 좀 보이고.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북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중 한 갈래인 베르베르인들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두껍고, 주제도 주제라서 읽기에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술술 넘어간다. 대학 1학년 교양과목 정도의 수준으로 편안하게 쓰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다만 이 ‘대학 교양과목 수준’이라는 말에 걸맞게, 책 초반의 도입부는 약간 지루하다. 뭔가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는 교수 특유의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책의 나머지 부분의 서술 난이도와도 썩 잘 어울리지 않고. 뭐 그래도 크게 문제될 건 아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책 2장에 실려 있는, 티피나그라고 불리는 베르베르어 문자다. 뭔가 그림 같기도 하고 기호 같기도 한 문자가 예뻐 보이는데, 외국인들이 한글을 볼 때 그런 느낌이라고 하는 말을 언뜻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또, 성경에도 나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세손크)이 베르베르인이었다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런 쪽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가볍게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