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2 리로디드
워너브라더스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목적인(目的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변화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네 가지 원인을 제시했는데그 중 하나가 목적인이다쉽게 설명하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사과의 씨앗 속에는 이미 사과나무가 되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씨앗은 땅에 심기면 그 정해진 목적을 향해 변화의 과정을 시작한다.


모든 씨앗은 정해진 목적을 향해서만 변화한다예를 들어 감나무의 씨앗은 사과나무로 변할 수 없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씨앗이 사과나무나 감나무로 발전하는 건 아니다(일부는 채 나무로 자라기 전에 여러 이유로 사라진다). 다만 그것이 정상적으로 발전할 경우 애초의 목적인을 따라 가게 된다는 의미다.


매트릭스의 이 두 번째 편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 ‘목적이다네오 일행은 오라클의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예언을 따라 인간을 착취하는 프로그램인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다전편에서 매트릭스의 본질을 깨닫고 특별한 능력을 얻은 네오가 있었기에그가 시스템 안의 적들을 종횡무진 무찌르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영화는 좀 의외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네오는 생각보다 적들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그가 아무리 뭔가를 하려고 애써도 좀처럼 정해진 결과를 뒤바꾸지 못하는 것만 같다그리고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목적(이유)’그는 스스로 뭔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지만 실은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만 찾을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듣는다사과 씨는 아무리 해도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자유의지의 부정?


심지어 영화 후반에는 그렇게 변화를 위해 애쓰는 네오라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프로그래밍이라는 설정까지 등장한다네오에게 감정이입을 한 채로 이 지점까지 온 관객은 약간 당황스러운 부분이기도 한데애초에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후속편 3편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전개시켜갈지...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나고 있을 뿐이고(선택은 이미 이뤄졌고), 우리는 그 과정의 이유를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매트릭스 시스템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생각인 듯하다그리고 이건 정확히 현대의 과학주의적 유물론자들이 믿고 있는 교리이기도 하고모든 것을 물질 내에서만 설명하려고 하다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과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영화 속에서 이런 명제 자체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대표적으로 전편에서 네오를 추적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던 스미스 요원의 달라진 모습인데네오에게 패하고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취한 경험(데이터)를 시스템에 넘겨주고 소스코드 사이로 사라졌어야 할 그가 시스템의 논리를 거부한 채 네오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네오와 마찬가지로 스미스 요원 역시 시스템의 이질적인 존재가 된 건데시스템 설계자로 보이는 아키텍처는 이 모든 걸 일종의 프로그램 버그로 취급하려고 한다(보통 이렇게 적을 깔보는 건 사망 플래그의 하나다).


자유의지란 개념은 그리 간단하게 부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그건 단순히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인과론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꽤 잘 맞는 한 가지 설명이지만양자역학의 시대에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다는 식의 생각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오히려 고집스럽게 인과론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의 설명을 듣다보면과도한 견강부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기복제.


개인적으로는 이번 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스미스 요원의 끝없는 자기복제 능력이었다시스템의 프로토콜을 거부한 채 원한을 품는다는 설정 자체가이미 그가 단순한 프로그램을 넘어섰다는 의미처럼(마치 인격을 획득한 것처럼보이기도 하지만근본적으로 그는 단순히 자기를 복제해 수를 늘리는 바이러스나 암세포 정도의 존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인간은 그렇게 단순히 자기복제를 능사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요새는 그런 자기복제만 남은 바이러스 수준의 본능만 남은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되는 것 같다그게 끝없는 권력욕이든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이든 세상을 오직 혼자만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다당연히 이런 이들이 많아지면그런 사회나 조직은 무너지기 마련이다암세포가 주변세포들을 끊임없이 삼켜 자기를 확장하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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