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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
노엄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유자화 옮김 / 시대의창 / 2012년 1월
평점 :
미국의 저명한 진보적 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가 지난 2006년 레바논을 여드레 동안 방문한 후 그에 관한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 표지에도 촘스키의 얼굴이 크게 박혀 있고, 제목에도 그러하니 책의 내용이 촘스키의 생각으로 채워져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그가 직접 강연이나 원고의 형태로, 혹은 인터뷰로 목소리를 낸 것은 네 개 장(2, 3, 4, 7장)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른 필사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내용도 읽어볼 만한 내용들이긴 했지만,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촘스키가 이 여행을 감행한 2006년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그 동안 대(對)이스라엘 무력투쟁에 앞장서던 하마스가 집권당으로 선택을 받은 해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를 위협으로 여겼고, 자치정부 안의 내분을 조장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력공격을 개시한다. 이 때문에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바로 북쪽에 인접한 레바논으로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것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의 안정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까지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이 무력공격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이 책에서 촘스키 이외의 필자들이 쓴 글은 대개 이 주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윤리적인 전쟁을 용인하고, 나아가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석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미국과, 그런 미국에 의존해 중동에서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는(그러면서 마치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던 일을 지역 단위에서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폭격으로 무너진 집과 죽은 가족들을 두고 괴로워하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의 얼굴을 앞에 두고는, 어떤 거창하고 숭고한 전쟁의 명분도 힘을 잃는다. 물론 하마스며, 헤즈볼라며 하는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크게 내기 위해 테러를 일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촘스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러니까 그들 테러 조직원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인종과 민족, 혹은 지역주민들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로 폭력과 무력행사를 하는 건 정확히 테러리즘의 논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큰 피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누가 먼저 잘못했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하는 걸 따지는 게 무의미해진다.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 더 큰 피해와 문제를 일으킬 텐데. 물론 실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온갖 폼을 잡다가 엄청난 피해를 서로 입은 후, 마지 못하는 식으로 합의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들은 고위 공무원들이나 외교관들이 엄청나게 탁월한 식견과 전략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언제나 실제의 현실은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빛나지도, 매끄럽지도 못한 법이다.
촘스키가 방문을 했던 레바논(헤즈볼라)-이스라엘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군의 철수로 끝났지만, 여전히 레바논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얼마 전 일어났던 베이루트시의 대규모 폭발사고도 사고지만,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정치구조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또, 시리아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라는 (이유는 다르지만) 조금은 버거운 이웃들을 둔 것도 있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레바논에 어떤 빛이 비출 수 있을까 떠오르지 않는다. 극도로 현실주의적인 국제 외교전에서 약소국의 미래는 늘 이렇게 불안하고 걱정된다. 이미 UN도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의 장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고, 그 반대급부로 지역별 블록이 강화되면서 최소한의 기사도적 용기와 명예를 기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져버렸고. 이들은, 또 우리는 이런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