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대학살이 멈춘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 깊이 뿌리박힌 증오가

언제 또 다른 폭력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질없는 보복을 막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 용서의 신성함을 깨닫게 하는 길뿐이었다.

 

 

 

 . 줄거리 。。。。。。。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아니 상대를 사람이 아닌 뱀이나 바퀴벌레로 여기는 일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은 백 명, 천 명 단위가 아닌 수십 만 명에 이르고, 한 번 그렇게 비인간성을 보여준 공동체는 씻을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계속하게 될 위험에 빠졌다.

 

 

 

     르완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르완다 내전에서 살아남은 ‘임마꿀레’라는 이름의 한 여인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공존하며 살아가던 르완다에 벨기에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그러했듯, 벨기에는 르완다의 식민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두 종족 사이를 갈라놓았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독립 후, 다수이면서도 오랫동안 억눌렸던 투치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잔인한 인종청소가 벌어진다.

 

     임마꿀레는 후투족 소녀이다. 후투족 여자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받았다. 그녀의 가족은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정부는 투치족을 선동해 후투족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둘째 오빠, 남동생을 모두 잃어버린 임마꿀레는, 한 투치족 목사의 도움으로 그 집의 욕실에 다른 여섯 명의 여자들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그가 믿는 하느님을 찾으며 힘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끝난 대학살. 하지만 임마꿀레에게 남은 일들은 적지 않았다.

 

 

 

 . 감상평 。。。。。。。                     

 

     아프리카 판 안네의 일기를 읽은 느낌이다.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비이성적인 대학살의 한 가운데서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는, 무슨 특별한 미사여구나 아름다운 문장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을 폭도들의 손에 잃었고, 더구나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이웃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임마꿀레가 느꼈을 충격과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무엇이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을까? 무엇이 어린 아이들까지 사람의 목숨을 벌레 목숨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잔인성을 갖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이웃이 이웃을, 동료가 동료를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웃고 떠들 수 있게 했을까? 임마꿀레는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 비단 그녀가 아니라도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으리라.

 

     사실 르완다 내전이 아니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만 잠시 보더라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잔인한 범죄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성년자를 감금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파렴치범이 있는가 하면, 어린 아이를 성추행하고 범행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는 인면수심의 악한들도 있다. 공사비를 떼어먹기 위해 부실공사를 하고 그 때문에 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이 되는가 하면, 조직 폭력배를 동원한 보복폭행으로 대기업의 회장이 구속되기도 한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인류가 무엇인가 명백히 큰 잘못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C. S. 루이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정말로 인류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과학과 이성을 새로운 신으로 믿으며 달려온 지난 1, 2백년을 지나면서 인류는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살인자들에 대한 임마꿀레의 근본적인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녀는 살인자들이 악마성에 지배를 당했을 뿐, 사실은 그들도 또 하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들의 타락한 심성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마땅히 가해자로서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해결책에 있어서는 임마꿀레의 그것과 같은 생각이다.

 

     임마꿀레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진정한 용서’를 제시한다. 극한의 사건을 경험한 임마꿀레가 이 상황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의 순환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 파괴의 고리를 끊어야 하며, 아마도 그 유일한 방법은 ‘용서’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에는 그녀의 종교적 신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신을 믿지 않으면서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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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7-06-0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인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일단 임마꿀레는 종교적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그들을 용서했어요.
관점은 약간 다르지만, 푸른숲에서 나온 희망여행을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서로 용서하는 과정이 있어요. 종교적 관점을 떠나, '용서'를 생각할 수 있답니다. ^^

노란가방 2007-06-0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단은 공통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할테니까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의 '용서'라는 방법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