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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피라미드사회 - 능력주의가 낳은 괴물
하승우 지음 / 이상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얼마 전 정부의 공공의대 신설 정책에 반대해서 전국의 의사들이 들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들 밥그릇 줄어드는 게 싫다는 건데, 아무튼 겉으로는 자신들이 국민건강을 위해 대단한 투쟁이라도 하는 듯 슬로건을 내걸었던 지라, 주장과 모순되는 행동으로 스텝이 좀 꼬이긴 했다.
당시 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라는 곳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겠다며 만들었던 황당한 이미지가 있었다. 당신이 생사를 두고 진단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의사에게 가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1번은 ‘매년 전교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를, 2번은 ‘성적은 한참 모자르지만(그나마 맞춤법도 틀렸다! ‘모자라지만’이 맞다)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라는 선택지를 두었다. 이 이미지는 엄청난 비난을 받고 금방 삭제되긴 했는데, 이 사람들이 얼마나 특권의식에 쩌들어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비단 이런 사고는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부 고위 관료나 선출직 공무원들의 특권의식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근래에는 재벌 3, 4세처럼 부모덕에 누리는 놈들까지 나서서 자기들이 특별한 존재인 양 설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하승우는 이런 현상에 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한다. 문제의 본질은 ‘능력주의’였다는 것. 우리는 흔히 뛰어난 능력을 맡은 사람이 더 중요하고, 더 높은 지위와 대우를 받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하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맡게 될 더 중요하고 높은 지위란, 상대적으로 다른 시민들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권력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이건 민주주의적 원칙에 합당한 일일까? 단지 그들이 능력이 뛰어나니까? 저자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는 정의로운 권력을 경험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과정의 공정성에만 매달렸고, 그러면서 능력과 지위를 분리시킬 조건을 만들지 못했다. 지위가 곧 능력이, 능력이 곧 지위가 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렵다.
때문에 저자는 능력주의에 대한 신화는 사실 피라미드 구조의 신분제 사회를 감추기 위한 미화된 수사법과 같다고까지 말한다. 흠칫 놀랄 만한 통찰이다.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이런 신분제는 좀 더 은밀하고, 내재적으로 변신되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운동을 이끌었던 학생그룹 안에서도 능력주의가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생운동권 안에서도 소수의 지도자들의 말에 나머지 구성원이 굴종하는 문화가 이어져 왔다. 이건 YS나 DJ 같은 지도자들에 의한 정치운동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소위 무슨 계, 무슨 계 하는, 일본식 정치패거리 문화가 우리나라 정치 뉴스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장에서 저자는 이 신분제를 지리적인 차원에서 분석한다. 도시와 농촌,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구분 아래서 철저하게 농촌과 지방은 도시와 수도권에 종속되는 하부 피라미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 노동 분야를 다루는 3장에서는 파견근로제와 정리해고제, 소위 플랫폼 노동 같은 노동형태가 어떻게 이런 피라미드 구조에 의해 고착화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끝으로 4장에서는 시민운동계 안에서도 의외로 능력주의가 널리 퍼져 있고, 그래서 정작 내부에서는 비민주적인 구조와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철폐했지만, 여전히 신분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사뭇 무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여기에 ‘능력주의’의 신화가 중심에 있다는 지적도 깊이 새겨보게 된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내일이 수학능력시험일이지만, 사실 수학능력이라는 것을 200여 개 안팎의 문제풀이 결과로 온전히 평가할 수 있는 걸까? 책 속에도 언급되듯, 학업성취도는 온전히 개인의 노력이나 실력에만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고액 과외에 부모찬스로 여기저기 인턴과 봉사활동, 학술대회 언저리라도 들락거린 아이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건 사실이니까.
사실 수능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평가라는 게 그렇다. 평가에는 기준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고,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발 빠르게 그 기준에 맞춰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도 능력이긴 하다. 당면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특정한 영역에서 발휘한 재능이 모든 영역에서도 효과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인데, 신분제는 이를 동일한 능력으로 치환해서 고착화 해 버린다.
예컨대 진중권은 미학을 전공했지만, 온갖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훈수를 두려고 애쓴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받아쓰며 그에게 굉장한 권위가 있는 듯 포장한다. 하지만 나는 진중권이 미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에 대해선 한 번쯤 귀를 기울이겠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별 무게를 두지 않는다. 기생충학을 전공했다는 서민 교수도 마찬가지다. 기생충에 대한 그의 지식과 경험엔 전문가에 대한 존중을 하겠지만, 그가 하는 정치평론은 그냥 동네 아저씨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 내뱉는 말과 비슷한 수준으로 들릴 뿐이다.
이들이 교수니까 그들의 생각에 보통 사람보다 더 우월한 통찰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순간 우린 학벌을 기준으로 하는 신분제에 동참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도 발견하기 어렵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의 기분인 듯하다. 책 말미에 희망은 그 자체가 원인이라는 말을 인용하고, 가봐야 길을 알 수 있듯 부딪혀 봐야 상대를 가늠할 수 있다며, 지금은 좀 부대껴야 할 때라고 덧붙인 이유도 그것이리라.
책의 문장들이 친절하지는 않다. 수백 군데의 인용구와 문장의 문학성보다는 내용전달에 집중한 결과 문장이 편안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초반의 주요 소재였던 능력주의가 도농격차나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종속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신분피라미드제가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지 않았나 싶지만. 책을 읽고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게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