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를 찾아서 - 신약성경이 숨긴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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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책은 사도행전 5장의 한 재판으로 시작한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여기서 만약 사도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대로 풀려났을 리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신이 아닌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고 주장했을 분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면 예수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어디서 왔는가? 작가는 이 신앙이 철저히 바울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과감한(하지만 낡고 확실한 근거는 없는) 주장을 한다. 갈라디아서에 나온 할례 논쟁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은 사도들과 전혀 상관이 없이 직접 신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주장하려 했고, 그렇게 자신의 신학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사도들을 철저히 깎아내리려 했다고, 아니 그게 갈라디아서를 쓴 목적이라고까지 중하니 말 다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가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을 에비온주의로 단정 짓는 무모함마저 보인다.

 

     ​이후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리기 위한 요한복음의 무리수(?)와 성만찬 전례 속 예수의 발언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그를 신성화하기 위해 나중에 쓴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세례 요한이 예수의 정치적 동지, 혹은 선배였고, 요셉은 반로마 혁명가였으며 마리아는 요셉의 동생과 계대결혼을 했고, 그래서 예수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야고보는 실은 마리아와 요셉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내용 등이 뒤로 이어진다.

 

 

2. 감상평 。。。。。。。

     이 작가가 쓴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세 권을 인상 깊게 봤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비판했지만, 나름 고민과 독서를 충분히 해서 쓴 책이라고 느꼈다. 특히 시리즈 두 번째 책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는 아주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낸 작가는 이제 거의 댄 브라운 식의 팩션작가가 다 되어버린 것 같다.

 

 

     작가의 첫 번째 주장부터 생각해 보자. 그는 제자들이 산헤드린에서 풀려났다는 이유로 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그저 정치적 메시아로 주장했다는 것) 사도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변호했던 가말리엘이 예로든 인물들이 정치적 투쟁을 벌였던 이들이라는 점도 한 근거로 사용된다.

 

     ​우선 이 주장은 사도행전의 기록 중 상당부분을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고 해야 하는 문제를 가진다.(이게 문제인 이유는 저자의 주장의 바탕이 사도행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진짜이고, 어떤 것은 거짓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사도행전의 주장대로는 정말 말이 안 되는 걸까? 사도행전에 따르면 본문의 재판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이미 그 소문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꽤 퍼져나갔음을 전제한다. 사도들이 풀려난 것은 그들이 백성들의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거나(5:26), 본문에 실려 있지 않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작가는 갈라디아서의 일부 기록을 전적으로 임의로 재구성해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마치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훗날의 에비온주의자들(에비온주의는 초기 기독교회 공동체로부터 일찌감치 이단으로 정죄된 일파다)과 같았다는 과감한 주장까지 나아가는데, 안타깝게도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는 않는다.(당연하다. 그런 자료는 애초부터 없으니까) 이 둘의 유사점이란 모두 유대 지역에 있었다는 것뿐인데, 이건 뭐 박근혜와 문재인이 같은 집무실을 사용했으니 둘이 같은 주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요한복음의 유월절 예비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 날짜가 금요일로, 요한복음은 목요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예비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스케우에]는 그냥 금요일이라는 의미도 있다.(현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금요일로 사용된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기록을 유월절 기간의 금요일로 해석했다면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감춘 것따위는 존재할 자리가 사라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을 기정사실로 단정 짓고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예컨대 103페이지에서 작가는 나는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가 요한복음에서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서의 기록 상당 부분을 거짓이나 조작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냥 저자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뿐이다. 요셉의 반란군설이나 마리아의 계대결혼설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내가 이해가 안 되니 마태복음의 저자도 이해가 됐을 리 없다는 어이없는 주장까지 나온다.(215) 그냥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법적,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좀 더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의 창시자라는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미 이런 주장은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고, 지금까지 확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도그마에 재갈이 물렸다고 비아냥거리는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가볍게 동조하며 날뛰지 않는 무게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착각한 듯하다. 작가 자신은 뭔가 대단한 비밀을 풀어냈다고 자신만만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애초부터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책 서문에서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이 대단한 사실로 인해 기성교회나 신자들로부터 뭔가 대단한 핍박이나 공격이라도 받을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다. 일종의 순교자 프레임을 짜고 있는 것.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옥성호라는 인물은 옥한흠이라는 거대한 후견인과 분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옥한흠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처음부터 이런저런 책들을 써 낼 수 있었을까? 요컨대 그는 처음부터 핍박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물의 배경 아래서 편하게 책을 써 왔던 인물이다. 이제 와서 순교자, 핍박받는 사람 이미지를 내세우는 건 좀 낯간지럽다.

 

     얼마든지 이보다 더 한 책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다만 겨우 이 정도의 내용으로 뭘 주장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 페이크 다큐 같은 건가? 작가는 이제 완전히 전업 작가로 나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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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레발.ㅋㅋ
옥한음이 아니라 흠인데...

이책에 대한 평점이 높긴한데
노란가방님 리뷰도 일리는 있어보이네요.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도 없지는 않겠죠?
그래도 그 나이에 적지않은 책을 낸 걸 보면
나름 꽤 똑똑한 사람인 것 같긴한데
전 <서초 교회 잔혹사> 읽으면서 은근 걱정되더라구요.
아버님이 말년에 아들 목사되길 많이 바라셨다고 하던데
아버지와 다른 길을 길을 갈거라서 그런 순교자 프레임의 설레발이
필요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뭐하며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술 활동만 하고 있을까요?

노란가방 2018-04-07 15:31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이름이 틀렸..ㅋ
(어제 늦은 시간에 막 휘갈겨 쓴 글이라 체크를 못했네요. 감사)
아무래도 그쪽 교회 일이라면 저보다 스텔라님이 더 잘 아실..

저도 가끔 알라딘에서 이름을 발견할 때나 접하곤 했는데
계속 책을 내고는 있는 것 같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똑똑한 건 분명한데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느낌도 들고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