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상대는 추첨으로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키야 미우의 『결혼 상대는 추첨으로』는 발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국가가 나서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맞선을 추진한다. 국회에서 법안으로 가결돼서 원하지 않아도 기간 내에 맞선을 봐야 한다. 25세에서 35세까지 이혼 전적과 자녀, 전과가 없는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 한 가지만을 쓸 수 있고 나머지는 지역 내에서 무작위로 추첨하는 방식이다. 맞선을 보고 세 번 거절했을 시에는 테러박멸대에서 2년간 의무 복무해야 한다. 소설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간호사 요시미, 컴퓨터 엔지니어 다쓰히코, 라디오국에 근무하는 나나, 외국 여행 가이드 란보를 통해 <추첨맞선결혼법>에 맞서는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그린다.


국가가 저출생에 대비해 이런 법안을 만들고 국회에서 통과될 줄 몰랐다. 네 명의 주인공은 법안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익혔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저출산이었다. 왜 저출생이라는 말을 썼을까. 저출산이라는 말에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주체가 여성임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원인을 여성으로 돌리고 있다는 뜻도 된다. 요즘 추세에는 저출생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소설은 저출생의 대책으로 기혼율을 높이는 <추첨맞선결혼법>이 통과되면서 일어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각자의 사정과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법안은 혼란을 주기도 한다. 의지력 약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요시미와 스스로를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쓰히코는 이 법안이 마음에 든다. 요시미는 자신에게만 매달리는 어머니와 따로 살고 싶다. 다쓰히로는 국가가 나서서 결혼을 시켜준다는 생각에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서 입는 등 맞선에 기대가 크다. 나나와 란보는 만난 지 2년 째이다. 나나는 부유한 란보와 결혼해서 걱정 없이 살고 싶다. 란보가 왜 청혼을 해오지 않은지가 궁금할 뿐이다. 란보는 마마걸인 나나가 부담스럽다. 이야기는 네 명이 얽히면서 이상한 법안에 맞서면서 얻게 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말한다.

<추첨맞선결혼법>에는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외적인 목적이 있는 반면 일본의 군대 구축을 합법화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다. 세 번 거절한 남녀는 강제로 테러박멸대에 들어가 복무해야 한다. 일본은 2차 대전에 패하면서 군대를 보유할 수 없다. 자위대는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남녀를 테러박멸대에 복무함으로써 일본 내의 전력을 향상시키려는 꼼수를 『결혼 상대는 추첨으로』에서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소설 시작의 신문 기사로 간략하게 나올 뿐이지만 세계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지만 뒤로는 군대 전력을 총력으로 키우는 일본을 비판한다.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이 완벽하다고 볼 수 있는가를 집중 탐구하는 소설 『결혼 상대는 추첨으로』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결혼과 추첨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결혼을 복권 당첨으로 생각하는 시대를 소설에서라면 신랄하게 풍자할 수 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국가의 강제적인 법안이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통과될 수도 있다. 소설은 현실을 가정하고 쓰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서둘러 결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현재란 역사를 잊은 자들에 의해 다시 과오가 저질러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의 역사가 떠올랐다면 비약인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블로그를 했다. 비공개로 일기나 영화평을 올렸다. 공개로 전환한 것은 책 서평을 쓰면서부터였다. 방문자 수가 늘어나고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그랬다가 전에 달린 댓글과 똑같은 글이 달리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블로그 최적화 때문에 달리는 글이라고 했다. 블로그 최적화라. 우리말인데도 아리송했다. 김세희의 단편 「가만한 나날」을 읽으며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소설은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어조로 쓰였다. 차분한 분위기가 소설을 슬프게 만들었다.

첫 직장인 마케팅 회사에 들어간 '나'의 회사 생활을 그린 「가만한 나날」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신념과 환상이 차례로 깨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각종 회사에서 보내오는 홍보물을 토대로 직접 가본 것처럼 먹은 것처럼 블로그에 후기를 올리는 게 '나'의 업무이다. 아. 내가 검색하고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며 봤던 정보가 마케팅 회사에서 올린 것이었다니. 블로그의 주인이 직접 가서 본 현장 기록이 아니었다니. 이제 살 만큼 살아서 세상사 모든 것에 통달하고 닳고 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제야 내 블로그에 달리는 복붙의 댓글과 안부 글이 이해되었다.

포털에 상위 노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웃 수와 방문 횟수, 댓글의 수 등 질적인 면이 충족되어야 한단다. 후기는 최대한 광고 글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블로그의 주인의 완벽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나'는 국문과의 전공을 살려 채털리 부인을 세상에 내놓는다. 밤늦게까지 남아 채털리 부인에게 성격을 입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알 수 없는 포털의 정책으로 채털리 부인의 블로그가 저품질에 걸리고 눈물을 머금고 블로그를 닫아 놓았다. 시간이 지나 쪽지함을 열어 그 쪽지함을 열어 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회사 생활에 충실하고 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회사와 가정, 관계를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신입이고 이제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프로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인물이 있고 결혼식도 못 올리고 동거 먼저 하면서 엄마에게 그 사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화자가 있다. 자신은 이제 심리 치료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며 찾아온 옛날 상사를 보며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데 끝내 입을 다무는 주인공까지. 소설을 읽어 나갈수록 이건 소설 속 이야기잖아, 괜찮아, 숨 쉬어를 속삭여야 했다.

회사나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만히 있고 싶을 때가 부지기수다. 날 좀 내버려 둬, 말하고 싶은데 그 판에 끼지 못하면 낙오되고 부적응자로 낙인찍힐까 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어색한데 농담을 하고 애써 한 농담으로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지는 시간. 힘들게 졸업하고 더 힘들게 취업해서 펼쳐진 세계란 불편하고 두려운 시간을 내내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김세희는 과장하지도 발랄을 가장하지도 않으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춘의 자화상을 이야기한다. 이 차분한 이야기꾼의 등장으로 현실을 사는 나는 짐짓 여유를 부려본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가만한 시간들로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이니까 웃고 떠드는데 그렇게 돌아오는 밤이면 내 머리를 때리고 조용한 거리에서 악을 쓰고 싶었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비쭉 내밀었다. 『가만한 나날』은 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꿈을 가져서 아픈 청춘의 이야기를 낮은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들이 꾸는 꿈이란 방 두 개에 누가 쓰던 살림이 아닌 새것으로 몇 가지를 사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밤에 한 사람이 깨어 있어도 다른 이는 잘 수 있는 공간을 꿈꾸는 것. 누구라도 그들의 꿈에 상처를 주거나 깨뜨릴 수 없음을 김세희는 가만가만히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에 잠을 자다가 번쩍하고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어두운 방에 누워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전만큼 이제 꿈에 엄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쁠 것도 없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정해진 시간에 씻고 버스를 타러 가야 하고 일을 하고 돌아와 정리를 하다가 책도 읽어야 한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틈이 생기기도 한다. 버스에 앉아 늙은 여자들의 수다를 듣다가 천변에 길게 늘어서 있는 꽃나무를 보다가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간 함께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자다 깨어나 왜 여기에 엄마는 없지, 도대체 어디 간 걸까 의구심이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한끝에 죽으면 끝이라는 막막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내 곁을 지켜주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어리석은 망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끝이다, 끝. 기억과 추억만을 나눠주고 간 것이다, 엄마는. 글을 모르던 엄마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지 못한 성적표를 가져가도 크게 기뻐해 주었다. 술 먹는 남편에게서 겨우 얻은 돈을 모아서 책을 사주기도 했다. 공부하라고 할부로 백과사전을 들여주기도 했다. 어버이날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 쓰기를 했다. 그때는 엄마가 집을 나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할 말을 줄여 엄마, 보고 싶어라고 쓰고 집으로 부쳤다. 며칠 지나 내가 쓴 편지를 받아서 마루에 앉아 읽었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나중에 엄마를 만나면 줄 생각이었다. 


마야 안젤루의 『엄마, 나 그리고 엄마』의 첫 부분에 마야는 부모의 이혼 때문에 친할머니 집에 맡겨지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젊은 부부는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한다. 아이들은 강제로 부모와 떨어진 채 그들만의 세상으로 던져진다. 마야와 오빠는 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부모와의 이별은 결핍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원초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남을 이해하는 것도 나 자신을 돌보는 법도 알지 못한 채 자란다. 마야는 자신을 할머니에게 보낸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나중에 엄마가 말하지만 마야는 결별의 상처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너에 대해서는 어떤 걸 알게 됐어?" 어머니가 물었다
"내가 일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자세만 있으면 된다는 거요."
"아냐. 넌 너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능력과 의지 말이야.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흑인이면서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온 마야와 그녀의 엄마 비비언 여사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쓴 에세이이다. 국적과 사는 시대도 다르지만 『엄마, 나 그리고 엄마』에서의 두 여인의 삶은 놀랍게도 이곳의 나들과 닮아 있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겪는 혼란은 어른이 되면서 간신히 치유된다. 비비언 여사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비록 어린아이들을 한동안 떨어뜨려 놓긴 했지만 이후에 그녀는 엄마라는 놀라운 힘으로 아이들을 밝은 세계로 끌고 간다. 마야 역시 그런 엄마의 힘에 감응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마야가 철도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했을 때 비비언 여사는 쟁취하라고 말한다. 일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면서 마야가 직접 그 일을 얻기를 바란다. 용기와 격려를 잃지 않는다. 철도 회사에 취직됐을 때 비비언 여사는 새벽 네 시에 출근해야 하는 딸을 위해 손수 운전해 주었다. 사랑하고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엄마는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곁에서 응원해 주고 지지해주는 희망의 존재이다. 세상에 지지 않을 용기를 주고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내 곁에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마야와 비비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편견과 차별이 그녀들이 가는 길에 뿌려져 있었다. 


마야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 비비언은 화를 내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마야와 아기의 앞날을 이야기했다. 아들 가이를 낳은 마야가 스스로 독립해 나가서 살기를 원할 때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남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제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자칫하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삶의 회한을 극적인 이야기 구성으로 읽는 재미를 준다. 인생의 어떤 날들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음을 잊지 않기 위해 쓴 책이다. 


무수한 삶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야는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 너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지해준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 관계자들에게 무시당할 때 한달음에 달려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엄마.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애인에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야를 구해낸 엄마.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생계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 마야에게 휴식을 주는 엄마. 그 모든 고통과 불안의 시간 속을 헤맬 때 마야에게 엄마는 빛으로 찾아왔다. 그럼에도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마야가 불안을 이겨내면서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자각을 하는 부분이었다. 


마야에게 성악을 가르쳐준 선생님 덕분이었다. 한 사람의 삶은 혼자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주변의 다정한 타인들에 의해 꾸려진다. 네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적어보라고 했을 때 마야는 망설였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마야에게 글을 써 보라고 했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다'를 쓰는 순간 마야는 작가로서의 자아를 가진다. 어버이날에 엄마에게 쓴 편지를 전해주지 못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같이 살 수 없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서로가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삶은 자꾸 우리의 시간 축을 어긋나게 했다. 우리의 시간은 모아지지 않은 채 각자의 시간대로 흘러갔다. 


엄마가 떠난 겨울은 슬픔만이 가득했다. 입관을 하는 오전의 햇살이 찬란해서 울었다. 왜 이렇게 눈이 시릴까.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그 새벽에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죽음은 끝이지만 삶은 늘 시작이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의 소중함을 기억하겠다. 엄마는 나였고 나는 엄마였음을 살아가는 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나름 문학소녀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세계명작을 읽으며 지냈다. 추천 도서 목록을 구했다. 거기에는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압도적인 길이의 목록이 있었다. 읽지 않으면 문학소녀 타이틀을 빼앗길 것 같아 한 권씩 차례대로 읽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국의 소도시 학교에 다니는 내게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들은 너무 먼 나라였다. 소설에서 표현하는 묘사를 상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옷과 식습관,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통에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펼쳐 놓고 읽는 척하는 것으로 허세를 부리기만 했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폭풍의 언덕』, 『죄와 벌』, 『부활』, 『적과 흑』 등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을.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사서 읽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글자가 엄청 작았다. 두꺼워서 다 읽으면 뿌듯했다. 다 읽었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학과 공부도 지지부진하고 친구 관계도 좋지 않아 독서라는 세계로 도피한 꼴이 되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나란 사람도 결국 이해받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유즈키 아사코의 세계명작소설의 리뷰 집인 『책이나 읽을걸』을 읽으며 고전을 읽던 시기를 떠올렸다. 읽은 책도 있지만 읽지 않은 책도 꽤 많았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거의 리뷰글인데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를 느낄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려운 내용은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다. 시작은 부드럽고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본격적인 소설 내용을 말하기까지의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산문은 소설만큼이나 산뜻하고 발랄하다. 외국 작가라 번역되어 나오지 않으면 일상과 감정을 알 수 없는데 『책이나 읽을걸』에서는 유즈키 아사코의 근황 같은 것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을 채워준다. 


주로 여성 서사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유즈키 아사코는 고전 소설도 여성과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확실한 취향이 소설에서도 발현된다. 수도원과 저택과 성을 좋아하고 답답한 세계지만 현실을 당당하게 개척해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주로 읽고 감상을 남겼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은 이런 내용이었지 하면서 기억을 더듬고 읽지 않은 소설은 이런 내용이니 어디 가서 아는 척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읽어 나갔다. 작가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적은 산문집도 좋지만 그가 평소에 읽은 책의 감상을 함께 나누는 것도 새롭고 신기한 일이다. 


다른 국적으로 살면서 쓰는 말도 다르지만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은 같다. 놀라운 경험으로 이어진 인연은 그녀가 쓴 책을 내가 읽을 수 있다는 바람직한 오늘로 펼쳐진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느니 차라리 '책이나 읽을걸'이라고 푸념하는 듯한 『책이나 읽을걸』은 어른이 되어 계획 없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는 나를 위로해준다. 괜찮아, 읽고 싶은 걸 읽어라 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미스의 검 와타세 경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카야마 시치리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재미있다. 잘 쓴다는. 전자책으로 나온 그의 책들을 사두었다. 원래 책이란 사두고 잊어버리는 것. 삶을 성찰하고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성찰하기는커녕 우울감만 높아졌다. 쉽게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점점 책을 읽는 것이 신나지 않았다. 한 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결벽증 때문에 재미없어도 읽어나간다. 중도에 포기했다는 느낌이 싫어서. 과감함이 필요했다. 그래, 읽지 말자. 끝까지 읽겠다는 집착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테미스의 검』을 읽기 시작한 건 잘한 일이었다. 인기 작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독자가 중간에 도망가지 않도록 이야기의 구성을 단단하게 만든다. 반전을 곳곳에 숨겨 놓고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땀을 쥐게 한다, 같은 표현은 진부해서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표현이 안 된다. 『테미스의 검』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수록 긴장감 때문에 땀이 나고도 흘러넘친다. 과장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와타세 경부 시리즈 1권인 『테미스의 검』은 일본 경찰과 사법부에서 벌어지는 죄의 형벌과 판결이라는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테미스는 법의 여신이다.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검과 저울을 들고 있다. 공정한 법의 판결로 정의를 이룩하고 질서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상징이다. 저울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뜻이고 검은 정확한 법으로 죄지은 자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테미스의 상징대로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신이 아닌 인간은 테미스의 상징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은 법의 정의로움을 묻는 소설이다. 


사흘 만에 집에 들어와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려는 와타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살인이라는 말을 하는 상대는 와타세의 교육 담당 겸 파트너인 나루미이다. 러브호텔이 즐비한 곳에 자리 잡은 부동산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사무실에 있는 금고를 노린 범인은 부동산 주인 부부를 죽였다. 칼로 여러 번 찔렀다. 원한과 금전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주변 사람들을 탐문한다. 평소 주인이 사채업으로 돈을 굴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채무자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한다. 


금고에 남아 있는 지문과 알리바이가 수상한 남자를 범인으로 좁히고 자백을 받아낸다. 문제가 있는 자백이었지만 증거들이 맞아가면서 결국 남자는 사형에 처해진다. 법정으로 가면서 남자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5년 후, 부동산 살인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와타세는 격랑의 인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카야마 시리치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과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자격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경찰 내에서 이루어지는 무사안일주의와 출세 지향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와타세는 경찰과 한 인간 사이에서 갈등한다. 직업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감 사이에서 와타세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테미스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사건 전개가 빠르다.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으로 사건이 주는 복잡함을 명쾌하게 풀어나간다. 소설을 읽다 보면 원죄冤罪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원죄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라는 뜻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했지만 어느 국회의원의 말대로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한 세상이다. 억울한 이가 없도록 만들겠다는 법은 잘못 악용될 때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린다. 법으로 인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자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테미스의 검』은 테미스의 한 손에 들린 검인 즉, 법은 만인에게 제대로 쓰이고 있는가를 고찰한다. 와타세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통해 진정한 법과 정의의 실체를 끈질기게 탐구하는 나카야마 시리치에게 박수를 보낸다. 『테미스의 검』을 읽으며 복잡한 내면을 달랠 수 있었다. 나카야마 시리치의 다른 작품도 궁금하다. 와타세 경부 시리즈 2권인 『네메시스의 사자』도 있다. 소름 돋는다. 언제 사 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