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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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블로그를 했다. 비공개로 일기나 영화평을 올렸다. 공개로 전환한 것은 책 서평을 쓰면서부터였다. 방문자 수가 늘어나고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그랬다가 전에 달린 댓글과 똑같은 글이 달리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블로그 최적화 때문에 달리는 글이라고 했다. 블로그 최적화라. 우리말인데도 아리송했다. 김세희의 단편 「가만한 나날」을 읽으며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소설은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어조로 쓰였다. 차분한 분위기가 소설을 슬프게 만들었다.

첫 직장인 마케팅 회사에 들어간 '나'의 회사 생활을 그린 「가만한 나날」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신념과 환상이 차례로 깨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각종 회사에서 보내오는 홍보물을 토대로 직접 가본 것처럼 먹은 것처럼 블로그에 후기를 올리는 게 '나'의 업무이다. 아. 내가 검색하고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며 봤던 정보가 마케팅 회사에서 올린 것이었다니. 블로그의 주인이 직접 가서 본 현장 기록이 아니었다니. 이제 살 만큼 살아서 세상사 모든 것에 통달하고 닳고 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제야 내 블로그에 달리는 복붙의 댓글과 안부 글이 이해되었다.

포털에 상위 노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웃 수와 방문 횟수, 댓글의 수 등 질적인 면이 충족되어야 한단다. 후기는 최대한 광고 글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블로그의 주인의 완벽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나'는 국문과의 전공을 살려 채털리 부인을 세상에 내놓는다. 밤늦게까지 남아 채털리 부인에게 성격을 입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알 수 없는 포털의 정책으로 채털리 부인의 블로그가 저품질에 걸리고 눈물을 머금고 블로그를 닫아 놓았다. 시간이 지나 쪽지함을 열어 그 쪽지함을 열어 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회사 생활에 충실하고 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은 회사와 가정, 관계를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신입이고 이제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프로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 인물이 있고 결혼식도 못 올리고 동거 먼저 하면서 엄마에게 그 사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화자가 있다. 자신은 이제 심리 치료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며 찾아온 옛날 상사를 보며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데 끝내 입을 다무는 주인공까지. 소설을 읽어 나갈수록 이건 소설 속 이야기잖아, 괜찮아, 숨 쉬어를 속삭여야 했다.

회사나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만히 있고 싶을 때가 부지기수다. 날 좀 내버려 둬, 말하고 싶은데 그 판에 끼지 못하면 낙오되고 부적응자로 낙인찍힐까 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어색한데 농담을 하고 애써 한 농담으로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지는 시간. 힘들게 졸업하고 더 힘들게 취업해서 펼쳐진 세계란 불편하고 두려운 시간을 내내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김세희는 과장하지도 발랄을 가장하지도 않으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춘의 자화상을 이야기한다. 이 차분한 이야기꾼의 등장으로 현실을 사는 나는 짐짓 여유를 부려본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가만한 시간들로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이니까 웃고 떠드는데 그렇게 돌아오는 밤이면 내 머리를 때리고 조용한 거리에서 악을 쓰고 싶었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비쭉 내밀었다. 『가만한 나날』은 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꿈을 가져서 아픈 청춘의 이야기를 낮은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들이 꾸는 꿈이란 방 두 개에 누가 쓰던 살림이 아닌 새것으로 몇 가지를 사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밤에 한 사람이 깨어 있어도 다른 이는 잘 수 있는 공간을 꿈꾸는 것. 누구라도 그들의 꿈에 상처를 주거나 깨뜨릴 수 없음을 김세희는 가만가만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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