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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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문학소녀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세계명작을 읽으며 지냈다. 추천 도서 목록을 구했다. 거기에는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해서 압도적인 길이의 목록이 있었다. 읽지 않으면 문학소녀 타이틀을 빼앗길 것 같아 한 권씩 차례대로 읽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국의 소도시 학교에 다니는 내게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들은 너무 먼 나라였다. 소설에서 표현하는 묘사를 상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옷과 식습관,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통에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펼쳐 놓고 읽는 척하는 것으로 허세를 부리기만 했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폭풍의 언덕』, 『죄와 벌』, 『부활』, 『적과 흑』 등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을.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사서 읽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글자가 엄청 작았다. 두꺼워서 다 읽으면 뿌듯했다. 다 읽었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학과 공부도 지지부진하고 친구 관계도 좋지 않아 독서라는 세계로 도피한 꼴이 되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나란 사람도 결국 이해받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유즈키 아사코의 세계명작소설의 리뷰 집인 『책이나 읽을걸』을 읽으며 고전을 읽던 시기를 떠올렸다. 읽은 책도 있지만 읽지 않은 책도 꽤 많았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거의 리뷰글인데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를 느낄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려운 내용은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다. 시작은 부드럽고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본격적인 소설 내용을 말하기까지의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산문은 소설만큼이나 산뜻하고 발랄하다. 외국 작가라 번역되어 나오지 않으면 일상과 감정을 알 수 없는데 『책이나 읽을걸』에서는 유즈키 아사코의 근황 같은 것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을 채워준다. 


주로 여성 서사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유즈키 아사코는 고전 소설도 여성과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확실한 취향이 소설에서도 발현된다. 수도원과 저택과 성을 좋아하고 답답한 세계지만 현실을 당당하게 개척해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주로 읽고 감상을 남겼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은 이런 내용이었지 하면서 기억을 더듬고 읽지 않은 소설은 이런 내용이니 어디 가서 아는 척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읽어 나갔다. 작가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적은 산문집도 좋지만 그가 평소에 읽은 책의 감상을 함께 나누는 것도 새롭고 신기한 일이다. 


다른 국적으로 살면서 쓰는 말도 다르지만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은 같다. 놀라운 경험으로 이어진 인연은 그녀가 쓴 책을 내가 읽을 수 있다는 바람직한 오늘로 펼쳐진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느니 차라리 '책이나 읽을걸'이라고 푸념하는 듯한 『책이나 읽을걸』은 어른이 되어 계획 없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는 나를 위로해준다. 괜찮아, 읽고 싶은 걸 읽어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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