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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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잠을 자다가 번쩍하고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어두운 방에 누워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전만큼 이제 꿈에 엄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쁠 것도 없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정해진 시간에 씻고 버스를 타러 가야 하고 일을 하고 돌아와 정리를 하다가 책도 읽어야 한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틈이 생기기도 한다. 버스에 앉아 늙은 여자들의 수다를 듣다가 천변에 길게 늘어서 있는 꽃나무를 보다가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이 시간 함께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자다 깨어나 왜 여기에 엄마는 없지, 도대체 어디 간 걸까 의구심이 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한끝에 죽으면 끝이라는 막막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내 곁을 지켜주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어리석은 망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끝이다, 끝. 기억과 추억만을 나눠주고 간 것이다, 엄마는. 글을 모르던 엄마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지 못한 성적표를 가져가도 크게 기뻐해 주었다. 술 먹는 남편에게서 겨우 얻은 돈을 모아서 책을 사주기도 했다. 공부하라고 할부로 백과사전을 들여주기도 했다. 어버이날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 쓰기를 했다. 그때는 엄마가 집을 나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할 말을 줄여 엄마, 보고 싶어라고 쓰고 집으로 부쳤다. 며칠 지나 내가 쓴 편지를 받아서 마루에 앉아 읽었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나중에 엄마를 만나면 줄 생각이었다. 


마야 안젤루의 『엄마, 나 그리고 엄마』의 첫 부분에 마야는 부모의 이혼 때문에 친할머니 집에 맡겨지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젊은 부부는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한다. 아이들은 강제로 부모와 떨어진 채 그들만의 세상으로 던져진다. 마야와 오빠는 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부모와의 이별은 결핍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원초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남을 이해하는 것도 나 자신을 돌보는 법도 알지 못한 채 자란다. 마야는 자신을 할머니에게 보낸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나중에 엄마가 말하지만 마야는 결별의 상처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너에 대해서는 어떤 걸 알게 됐어?" 어머니가 물었다
"내가 일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자세만 있으면 된다는 거요."
"아냐. 넌 너에게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능력과 의지 말이야.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흑인이면서 여성으로서 삶을 살아온 마야와 그녀의 엄마 비비언 여사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쓴 에세이이다. 국적과 사는 시대도 다르지만 『엄마, 나 그리고 엄마』에서의 두 여인의 삶은 놀랍게도 이곳의 나들과 닮아 있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겪는 혼란은 어른이 되면서 간신히 치유된다. 비비언 여사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비록 어린아이들을 한동안 떨어뜨려 놓긴 했지만 이후에 그녀는 엄마라는 놀라운 힘으로 아이들을 밝은 세계로 끌고 간다. 마야 역시 그런 엄마의 힘에 감응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마야가 철도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했을 때 비비언 여사는 쟁취하라고 말한다. 일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면서 마야가 직접 그 일을 얻기를 바란다. 용기와 격려를 잃지 않는다. 철도 회사에 취직됐을 때 비비언 여사는 새벽 네 시에 출근해야 하는 딸을 위해 손수 운전해 주었다. 사랑하고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엄마는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곁에서 응원해 주고 지지해주는 희망의 존재이다. 세상에 지지 않을 용기를 주고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내 곁에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마야와 비비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편견과 차별이 그녀들이 가는 길에 뿌려져 있었다. 


마야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 비비언은 화를 내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마야와 아기의 앞날을 이야기했다. 아들 가이를 낳은 마야가 스스로 독립해 나가서 살기를 원할 때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남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제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자칫하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삶의 회한을 극적인 이야기 구성으로 읽는 재미를 준다. 인생의 어떤 날들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음을 잊지 않기 위해 쓴 책이다. 


무수한 삶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야는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간다. 너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지해준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 관계자들에게 무시당할 때 한달음에 달려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엄마.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애인에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야를 구해낸 엄마.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생계에 대한 불안을 느낄 때 마야에게 휴식을 주는 엄마. 그 모든 고통과 불안의 시간 속을 헤맬 때 마야에게 엄마는 빛으로 찾아왔다. 그럼에도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마야가 불안을 이겨내면서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자각을 하는 부분이었다. 


마야에게 성악을 가르쳐준 선생님 덕분이었다. 한 사람의 삶은 혼자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주변의 다정한 타인들에 의해 꾸려진다. 네가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적어보라고 했을 때 마야는 망설였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마야에게 글을 써 보라고 했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다'를 쓰는 순간 마야는 작가로서의 자아를 가진다. 어버이날에 엄마에게 쓴 편지를 전해주지 못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같이 살 수 없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서로가 필요한 순간에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삶은 자꾸 우리의 시간 축을 어긋나게 했다. 우리의 시간은 모아지지 않은 채 각자의 시간대로 흘러갔다. 


엄마가 떠난 겨울은 슬픔만이 가득했다. 입관을 하는 오전의 햇살이 찬란해서 울었다. 왜 이렇게 눈이 시릴까.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그 새벽에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죽음은 끝이지만 삶은 늘 시작이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의 소중함을 기억하겠다. 엄마는 나였고 나는 엄마였음을 살아가는 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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