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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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은 시작한다. 산문의 제목은 「시작」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의 원형은 읽는 행위로 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어머니는 오빠와 그녀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그녀는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린다.'


  매일 읽는 병에 걸린 그녀는 열네 살에 기숙사에 들어간다. 이백여 명의 여자애들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학습실에서는 절대 침묵이 강요된다. 숙제를 하고 '필독' 도서를 읽는다. 재미없는 책을 읽는 대신 그녀는 쓴다. 일기를 쓰고 비밀 문자를 만들어 쓴다. 읽는 행위에서 쓰는 행위로 전환된 문학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는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고 어머니는 도시에서 쥐약을 포장한다. 신발 수선을 맡길 때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그녀. 가난함이 습관처럼 베어 있던 시절에도 그녀는 읽고 쓴다. 읽고 울다가 잠든 밤 사이에 태어난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시가 된다. 시계 수리공 시절에도 그녀는 시를 쓴다. 작업이 단조로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반복된다. 저녁마다 노트에 깨끗이 시를 정리한다.


  스물한 살에 넉 달 된 어린 딸을 업고 그녀는 숲을 건넜다. '월경 안내인'을 따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넘는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다. 한 가방 안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있다. 헝가리에는 작문 노트와 처음 쓴 시를 놓고 왔다. 부모님과 남동생, 오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스물한 살의 그녀는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헝가리어로 시를 쓴다. 헝가리 문예에 글을 보내고 희곡 두 편을 완성한다. 라디오에 원고를 보내고 전문 배우들이 그녀의 글로 연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글로 쓰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큰 딸에게 글의 완성을 알리고 세 군데에 작품을 보낸다. 그중 한 군데에서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한 채 살아갔다.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초급반에 가서 다른 외국인들과 공부한다. 2년 후,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아이들이 어떤 단어의 뜻을 물어볼 때 모른다 대신 한번 확인해볼게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


  『어제』,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조한 문장들.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참혹을 경험했다. 세계와 스스로 담을 쌓고 지내는 인물들이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읽고 쓰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 후에도 그들은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 가지고 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유일한 책은 사전이었다. 모국어를 잃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난민의 서글픈 운명을 그녀는 예감했으리라. 사 년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문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작가가 되기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은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문맹을 선택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간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프랑스어로 쓴 짧은 문장 안에는 헝가리어로 쓰지 못한 기억과 사연이 숨어 있다. 전부 쓰지 않고 적어(敵語)에 숨겨둔 비밀은 소설이 되었다.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쓰고 읽어야 했던 한 작가의 담담한 슬픔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는 『문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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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문학동네 시인선 102
김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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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김언


서울에서 분노한 사람이 부산에 왔다. 숙소에 짐을 내려 놓고 곧바로 서울로 갔다. 더 많은 짐을 싸가지고 오기 위해서 그는 분노할 것이다. 왜 서울에서 본노하는가? 부산에서는 분노할 것이 없는가?그는 짐을 내려놓고 말했다. 분노가 쌓이면 또 싸가지고 갈 짐을 한가득 내려놓고 말했다. 여기도 사람이 많습니까? 충분히 많지요. 그러니까 떠났겠지요.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옆에 앉은 할머니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한참을 저의 옆모습을 쳐다보고서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일까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일일까요. 분주하고 시끄러운 그곳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린이날, 그곳에서 아이들은 울거나 뛰어 다녔습니다. 공짜로 받은 풍선을 들고 가다 터뜨리기도 하고요.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골목으로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만 길을 찾아 다녔습니다. 대도시에서도 우리는 좁은 길을 감각으로 찾아냅니다. 서점을 돌아다니고 책과 노트를 사 모았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아직 그곳에는 착한 이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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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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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속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신체 접촉을 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에게 메일로 보고하자 부서를 옮겨 주겠다는 말만 돌아온다. 해당 가해자의 처벌이 쉽지 않다는 이유다. 증거 자료를 모으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통화를 녹취하고 부당 업무 지시 사항을 작성했다. 인사위원회가 열렸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징계 처분이 내렸다.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사유로. 이후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유부남을 사귀고 두 달 가량 무단결근해 놓고 노동부에 진정을 해서 급여를 챙겼다는. 알고 보니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소진은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지금 이사 온 집은 칠층이다. 전에 살던 곳보다 낡았는데 버스 정류장이 가깝다. 무엇보다 칠층, 칠층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지방에서 서울로 독립해 올 때 엄마는 굉장히 서운해했다. 엄마는 혼자 삼 남매를 키우면서 화가 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런데 하필 왜 엄마의 하소연을 넘어 감정의 분출을 나에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고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혼자 서울에 살아보니 알겠다. 돈이 없는 건 아쉬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라고. 오백만 원, 천만 원, 이천만 원이 더 있으면 높은 층을 구할 수 있고 공동 현관이 있는 집을 경비원이 있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삼층에 얻은 그 집에서 가스 배관을 타고 집으로 들어오려던 도둑을 맞닥뜨렸고 그날 이후로 불을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KTX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면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기만 하면 아기를 들쳐 안고 화장실로 숨는다. 어린 딸을 안으면서 소리 내면 안돼라고 말하는 엄마다, 나는.  고작 택배였는데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2008년에 시작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밀린 임금 8640만 원도 받았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고 받은 임금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매달 이자만 백만 원이 넘게 붙었다. 일억 원을 갚아야 했다. 갚을 능력도 안되지만 갚는 순간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규직으로 전환,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지상의 꽃'이라고 했다. 코레일이 아닌 자회사 소속으로 이 년을 일했다. 정규직으로 바뀌지 않아 투쟁했고 해고되었다. 350명에서 서른 세 명이 남았다.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토크 콘서트에 참여했다. 서울 시장이 나와서 대법원 판결은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해주었다. 눈물이 났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진숙의 꿈은 24평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반지하 보다 더 내려가는 지하에 사는 진숙은 건물과 옆집 담 사이에 속옷을 널어 놓는데 자꾸 자신의 것만 없어진다고 했다. 새 거는 안 가져가고 입던 것만 가져가더란다. 방에 널거나 드라이기로 말리는데 곰팡이균이 생겨 없어지지도 않는단다. 도서부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집에 가기 싫은데 밖에 돌아다니면 돈이 드니 도서실에 있겠단다. 공부하라고 한 마디 해줬다니 자기에게 그런 말하는 어른은 처음이라고 웃었다. 진숙이 일중일 동안 무단결석했다. 집 전화도 핸드폰도 없는 아이였다. 머뭇거리며 무단결석의 이유를 말하는 진숙이. 그날이었단다. 그날인데 생리대가 떨어졌다고. 아빠한테 생리대 산다고 말은 못하고 문제집 사야 된다고 말했는데 아빠도 돈이 없다고 했단다. 안 떨어지게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 가끔 계산을 잘못 해서 생리대 없이 보내야 하는 날이 있다고 했다. 그럴 땐 집에서 면 티를 잘라 쓴다고 했다. 흡수도 잘 안되고 새서 학교에서는 쓸 수 없고 집에서나 쓸 수 있단다. 낮에는 세면장 하수구에 벌거벗고 앉아 피를 흘려보냈단다. 보건실 가서 얻지 그랬냐고 했더니 이름 쓰고 하나 빌렸다가 다시 채워 놓아야 한단다.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겠다는 진숙이를 설득해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고등학교에 보냈다.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삼층 집에 도둑이 가스 배관을 타고 들어오고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고 생리대 없이 집에서 지내야 하는 이 모든 이야기는 조남주의 소설집 『그녀 이름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설이다. 소설이니까 적당한 허구를 넣어서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을 수도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는 모여서 한 권의 묵직한 소설집으로 만들어졌고 세상에 나왔다. 전작 『82년생 김지영』으로 우리 사회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낸 조남주는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 명의 목소리들을 토대로 『그녀 이름은』을 썼다. 다들 별일 아닌 데로 시작하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별일 아니지만 별일인 이야기가 모여  『그녀 이름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은 이름이 있다. 누구 엄마, 누구 딸, 누구 아내가 아닌 소진, 진숙 그리고 나로 호명된다. 가장 친절하고 내밀한 속 사정을 아는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회에서 청소 노동자로 살아온 이야기로부터(재계약이 안되자 맞춤법 틀려가며 '20년을 일했읍니다'를 쓰고 사무총장이 재계약 중재를 해주었다.) 동생의 결혼식 날 이혼을 한 언니의 이야기 (각각 이혼일기, 결혼일기, 엄마일기로 소설이 이어진다.) 전교회장에 출마한 당찬 열세 살 은서의 이야기까지 소설집은 그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들 계약금으로 당장 이천만 원씩을 낼 수 있는 집이 이렇게 많구나를 실감하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젊은 부부는 좌절하기 보다 운수가 너무 좋았다로 그 하루를 넘긴다. 조남주는 아득히 멀고 체감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 앞집, 뒷집, 윗집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들을 모아 소설집 한 권을 꾸렸다. 과소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살기 힘들고 일을 하면서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를 따라다니는 일이 벅차다. 딸 손주 아들 손주를 방학 동안 맡아 기르는 할머니는 허리가 요즘 안 좋다. 


  가만가만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어지는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을 다 읽어버렸다. 가독성이 좋은 건지 몰입을 한 건지 모르지만 소설은 차분하고 건조한 서술로 잘 읽힌다. 소설 속 그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일로 독자의 역할은 끝이 났다. 온전한 '나'로 살아내기를 다짐하고 사회의 법이 편견이 이름 지우기를 강요한다면 틀린 맞춤법이라도 써서 내가 이곳에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야 함을 말하는 소설  『그녀 이름은』. 여성과 남성,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나누며 둘로 쪼개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소설의 임무는 우리가 가진 목소리로 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듣고 문장으로 쓴다. 말은 사라지지만 언어는 남는다는 것을 아는 소설가 조남주는 오늘도 쓴다. 


  이 글을 쓰다 참외를 깎아 먹었다. 선명하고 붉은 성주참외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은 참외 두 알에서 경북 성주 소성리에 살고 있는 성례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매는 서울에 가서 법원에 들어가고 나올 때 미대사관에 들렀을 때 카메라를 만났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지금 소성리의 상태나 참외 농사를 놔두고 이곳에 온 심정을. 손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대박 났다고 말해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할매가 뉴스에 나왔다는 것이다. 애들한테 자랑하고 할매 대박 멋있다고 말해주어 성례 할매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다짐한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현실인가. 경계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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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창비시선 420
박철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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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

-박철


건너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 남아 있다

하늘도 잠시 쉬는 시간,

예서 제로 마음의 빨랫줄 늘이니

누구든 날아와

쉬었다 가라


건너에는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건너라는 말에서 나의 마음은 그곳으로 날아갑니다. 건너 건너 당도할 마음은 아이들이 밥을 먹고 뛰어다니는 풍경을 보기만 해도 평온합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적요한 학교에서 나오는 불빛, 건너 아파트에서 흘러 나오는 온기. 지친 몸은 불빛과 온기로 뜨거워집니다. 



끝 간 데

-박철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건 집에 문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랑이라는 말에는 

누구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누구나에는 어디든이 자리하고

어디든은 언제나의 제 모습이다

제 모습에 

왜냐고는 없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건 사랑이라는 말에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일 뿐이라

너와 나의 송두리라

왜인가 묻지 말고 차라리

죽음이라 불러다오

누구나

사랑을 한다

노을도 사랑을 한다

그러나 누구나에는 그러나가 있다

내 송두리 당신 앞에 선

아이처럼

아이 앞에 선

작은 문처럼


손을 잡아 길 안 쪽으로 안내해주고 깻잎 김치를 떼기 좋게 잡아주고 라면 물이 적을까 염려하는 마음. 사랑의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누구나 사랑을 합니다. 누구나의 사랑속에 당연시되는 마음을 부러 모른 척 하기도 합니다. 나의 사랑은 끝 간 데 없고 앞으로의 시간에서 내일과 모레도 함께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합니다. 



화학반응

-박철


딱히 말할 곳이 없어서

그래도 꼭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아이 반짝이는 뒤통수에다

사랑해-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쓱쓱 자라며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신발 주머니를 끌고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너도 사는 게 지치지 속으로 물어보곤 합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용돈을 두둑히 받은 날에도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입니다. 아이의 시간을 건너 어른의 세계에 도착해도 여전히 세계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늘은 어둡고 맑을 날을 기대해도 구름 낀 시간에서 아이의 키는 자라고 마음을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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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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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디아 코마네치. 체조 역사상 10점 만점을 받은 전무후무한 체조 선수. 점수 표시판에 10점을 표시할 수 없어 1점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기록적인 선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세 개와 은메달, 동메달 하나를 각각 따냈다. 


  자신이 코마네치의 환생이라고 믿는 소녀가 있다. 이름 고마니. 처음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이 들어 몇 번씩 다시 묻는 이름 고마니. 멀쩡히 살아있는 코마네치를 죽은 것으로 착각해 친구들에게 고마네치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말하는 고마니.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를 읽다 보면 우습고 진지하고 우습고 진지해서 뻔한 성장소설이라는 클리셰가 사라진다. 소설은 서울에서도 가장 낙후된 동네에 살고 있는 고마니네 가족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민낯을 활짝 드러낸다. 재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마니의 엄마는 조합원장이 오면 아버지의 인감을 팡팡 찍어준다. 마니는 그런 엄마를 도장 페티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좁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옆집 앞집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한 집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고마니는 서울 올림픽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날 이후로 동네 친구들과 올림픽에 나가리라 다짐하며 체조 연습을 한다. 집 안의 사물들을 깨 먹고 급기야 마니는 친구의 발뒤꿈치에 맞아 코피가 난다. 그래도 체조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어 학교 뒤뜰에서 모이기로 한다. 날은 추워지고 옷은 두껍게 입어 체조 연습이 쉽지 않아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간다. 


  동네 체조 모임이 없어진 후에도 마니는 계속 체조를 배운다. 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나사 하나가 살짝 풀린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수백 개의 나사 중 하나가 빠진 게 아니라 살짝 풀린 정도의 정신 상태를 가졌다. 그 엄마가 마니가 혼자 놀고 있으면서 한 짓을 오해하여 마니의 꿈에 대해 묻고 마니는 체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열 살의 마니는 엄마 손에 이끌려 체조 학원에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원은 체조 학원이 아니라 에어로빅 학원이었다. 원생이 끊길까 두려운 원장이 코마네치의 영상을 보여주고 코마네치와 고마니의 이름의 연관성을 들려준다. 


  사실 고마니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작명소에 가서 지어온 이름이었다. 엄마는 무슨 뜻인지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좋은 뜻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충남 공주에 '고마니 고개'가 있었다. 나당 연합군과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아들 다섯 가진 집의 아들들이 전쟁에 차출되었다. 다섯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부모는 아들들이 넘어간 고개를 고마니 고개라고 불렀다. '넘어가면 고만이다'라는 뜻의.


  십 년간 일해온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고마니는. 미스 고에서 고대리로 직함이 바뀐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는 총무부의 고대리를 간단히 잘랐다. 과장으로 결혼으로 이름대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은 마니는 엄마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지하철 순례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가 옛 추억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이제 막 아파트가 밀고 들어올 것처럼 생각하며 흥분한 엄마가 도장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의 인감을 들고 증명서를 떼서 조합에 가져다준 엄마. 마니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는 떡볶이 저을 때 쓰는 큰 국자를 들고 재개발 사무실로 찾아가 서류를 다시 받아온다. 


  마니는 결국 체조를 끝까지 하지 못했다. 체조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그곳은 마니의 집이나 가게를 팔아서 등록금을 마련할 정도로 비싼 학교였다. 애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엉덩이에 붉은 하트라는 기상천외한 이미지만 남긴 채 마니는 전학을 간다. 그럭저럭 학교를 마치고 여러 일터를 짧게 짧게 전전한다. 


광고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끝맺는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어.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 믿으라는 말은 교회나 절에 가서 하세요. 믿는 건 마음이고 하는 건 몸이라고요. 나는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거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거나, 뭐 그런 말들.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나에게는 결국 네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고, 노력이 부족했고, 의지가 없었다는 힐난으로 들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마네치를 위하여 中에서, 조남주)


  올라가라는 아파트는 올라가지 않고 손에 쥔 게 없는 사람들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세상이다. 가진 게 없고 아는 게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믿음을 배신당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쳐도 들어주지 않으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소리친다. 우리를 쫓아내지 말라. 말하는데도 망루 일층에 불을 놓았다. 아파트 칠층 높이에서 뛰어내리고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삶은 넘어가면 고만인 세상이 아닌게 되어 버렸다. 집 하나 가지고 싶은 그들의 소망은 욕심으로 헛된 희망으로 남는다.


  코마네치의 뒤를 이을 체조선수를 꿈꾼 소녀 고마니는 서른여섯의 백수가 되었다. 엄마와 재개발 사무실을 따라다니고 무조건 1번 찍으라는 말에 생각없이 찍는다. 재개발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은근한 소문을 들은 아버지는 집을 팔고 이사 가자고 한다. 회사 다니며 땅을 사서 되팔며 차익을 얻는 파꽃을 보며 웃는 남자에게 집을 판다. 마니와 아버지는 갈등한다. 집 하나 얻자고 남을 속여도 되나. 재개발이 안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남자에게 말해야 하지 않겠나. 엄마는 부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마디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남을 속이며 살아가는 게 쉬어진 세상. 남을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 어렸을 때 간직한 꿈을 하나씩 버리고 낡은 옷장과 서랍장을 가지고 떠날 수밖에 없는 오늘. 조남주의 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요소로 무한 긍정과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헛소리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가만히 위로하는 소설이다. 갈고리가 그려진 망치 가방을 살 수 없어 천 가방을 메고 다닌 마니에게 미래의 코마네치는 경쟁 브랜드의 시에프에서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불가능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만 마니는 그 동영상을 다운 받아 열심히 본다. 체조 선수를 꿈꾼 그 시간을 부끄럽게만 기억하는 어른이 된 마니는 우리에게 욕심으로 꿈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루 세 번 부모님과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 매일 온수를 틀어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 좌식 책상을 들여놓고 소설책을 읽을 수 있는 방, 커튼 없이 달빛이 쏟아지는 거실. 소중한 기억으로 뭉친 가족이 모여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공간 하나를 가지는 것조차 버거운 세계에서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우습고 서글픈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오늘을 살아갈 사소한 행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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