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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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은 시작한다. 산문의 제목은 「시작」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의 원형은 읽는 행위로 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어머니는 오빠와 그녀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그녀는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린다.'


  매일 읽는 병에 걸린 그녀는 열네 살에 기숙사에 들어간다. 이백여 명의 여자애들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학습실에서는 절대 침묵이 강요된다. 숙제를 하고 '필독' 도서를 읽는다. 재미없는 책을 읽는 대신 그녀는 쓴다. 일기를 쓰고 비밀 문자를 만들어 쓴다. 읽는 행위에서 쓰는 행위로 전환된 문학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는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고 어머니는 도시에서 쥐약을 포장한다. 신발 수선을 맡길 때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그녀. 가난함이 습관처럼 베어 있던 시절에도 그녀는 읽고 쓴다. 읽고 울다가 잠든 밤 사이에 태어난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시가 된다. 시계 수리공 시절에도 그녀는 시를 쓴다. 작업이 단조로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반복된다. 저녁마다 노트에 깨끗이 시를 정리한다.


  스물한 살에 넉 달 된 어린 딸을 업고 그녀는 숲을 건넜다. '월경 안내인'을 따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넘는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다. 한 가방 안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있다. 헝가리에는 작문 노트와 처음 쓴 시를 놓고 왔다. 부모님과 남동생, 오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스물한 살의 그녀는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헝가리어로 시를 쓴다. 헝가리 문예에 글을 보내고 희곡 두 편을 완성한다. 라디오에 원고를 보내고 전문 배우들이 그녀의 글로 연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글로 쓰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큰 딸에게 글의 완성을 알리고 세 군데에 작품을 보낸다. 그중 한 군데에서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한 채 살아갔다.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초급반에 가서 다른 외국인들과 공부한다. 2년 후,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아이들이 어떤 단어의 뜻을 물어볼 때 모른다 대신 한번 확인해볼게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


  『어제』,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조한 문장들.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참혹을 경험했다. 세계와 스스로 담을 쌓고 지내는 인물들이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읽고 쓰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 후에도 그들은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 가지고 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유일한 책은 사전이었다. 모국어를 잃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난민의 서글픈 운명을 그녀는 예감했으리라. 사 년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문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작가가 되기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은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문맹을 선택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간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프랑스어로 쓴 짧은 문장 안에는 헝가리어로 쓰지 못한 기억과 사연이 숨어 있다. 전부 쓰지 않고 적어(敵語)에 숨겨둔 비밀은 소설이 되었다.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쓰고 읽어야 했던 한 작가의 담담한 슬픔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는 『문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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