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직속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신체 접촉을 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에게 메일로 보고하자 부서를 옮겨 주겠다는 말만 돌아온다. 해당 가해자의 처벌이 쉽지 않다는 이유다. 증거 자료를 모으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통화를 녹취하고 부당 업무 지시 사항을 작성했다. 인사위원회가 열렸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징계 처분이 내렸다.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사유로. 이후 회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유부남을 사귀고 두 달 가량 무단결근해 놓고 노동부에 진정을 해서 급여를 챙겼다는. 알고 보니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조용히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소진은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지금 이사 온 집은 칠층이다. 전에 살던 곳보다 낡았는데 버스 정류장이 가깝다. 무엇보다 칠층, 칠층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지방에서 서울로 독립해 올 때 엄마는 굉장히 서운해했다. 엄마는 혼자 삼 남매를 키우면서 화가 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안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런데 하필 왜 엄마의 하소연을 넘어 감정의 분출을 나에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고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혼자 서울에 살아보니 알겠다. 돈이 없는 건 아쉬운 게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라고. 오백만 원, 천만 원, 이천만 원이 더 있으면 높은 층을 구할 수 있고 공동 현관이 있는 집을 경비원이 있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삼층에 얻은 그 집에서 가스 배관을 타고 집으로 들어오려던 도둑을 맞닥뜨렸고 그날 이후로 불을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로 변했다.


  KTX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면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기만 하면 아기를 들쳐 안고 화장실로 숨는다. 어린 딸을 안으면서 소리 내면 안돼라고 말하는 엄마다, 나는.  고작 택배였는데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2008년에 시작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밀린 임금 8640만 원도 받았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고 받은 임금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매달 이자만 백만 원이 넘게 붙었다. 일억 원을 갚아야 했다. 갚을 능력도 안되지만 갚는 순간 코레일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규직으로 전환,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지상의 꽃'이라고 했다. 코레일이 아닌 자회사 소속으로 이 년을 일했다. 정규직으로 바뀌지 않아 투쟁했고 해고되었다. 350명에서 서른 세 명이 남았다. 어린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토크 콘서트에 참여했다. 서울 시장이 나와서 대법원 판결은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해주었다. 눈물이 났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진숙의 꿈은 24평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반지하 보다 더 내려가는 지하에 사는 진숙은 건물과 옆집 담 사이에 속옷을 널어 놓는데 자꾸 자신의 것만 없어진다고 했다. 새 거는 안 가져가고 입던 것만 가져가더란다. 방에 널거나 드라이기로 말리는데 곰팡이균이 생겨 없어지지도 않는단다. 도서부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집에 가기 싫은데 밖에 돌아다니면 돈이 드니 도서실에 있겠단다. 공부하라고 한 마디 해줬다니 자기에게 그런 말하는 어른은 처음이라고 웃었다. 진숙이 일중일 동안 무단결석했다. 집 전화도 핸드폰도 없는 아이였다. 머뭇거리며 무단결석의 이유를 말하는 진숙이. 그날이었단다. 그날인데 생리대가 떨어졌다고. 아빠한테 생리대 산다고 말은 못하고 문제집 사야 된다고 말했는데 아빠도 돈이 없다고 했단다. 안 떨어지게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 가끔 계산을 잘못 해서 생리대 없이 보내야 하는 날이 있다고 했다. 그럴 땐 집에서 면 티를 잘라 쓴다고 했다. 흡수도 잘 안되고 새서 학교에서는 쓸 수 없고 집에서나 쓸 수 있단다. 낮에는 세면장 하수구에 벌거벗고 앉아 피를 흘려보냈단다. 보건실 가서 얻지 그랬냐고 했더니 이름 쓰고 하나 빌렸다가 다시 채워 놓아야 한단다.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겠다는 진숙이를 설득해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고등학교에 보냈다.


  상관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삼층 집에 도둑이 가스 배관을 타고 들어오고 해고 승무원으로 살아가고 생리대 없이 집에서 지내야 하는 이 모든 이야기는 조남주의 소설집 『그녀 이름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설이다. 소설이니까 적당한 허구를 넣어서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을 수도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는 모여서 한 권의 묵직한 소설집으로 만들어졌고 세상에 나왔다. 전작 『82년생 김지영』으로 우리 사회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낸 조남주는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 명의 목소리들을 토대로 『그녀 이름은』을 썼다. 다들 별일 아닌 데로 시작하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별일 아니지만 별일인 이야기가 모여  『그녀 이름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그녀들은 이름이 있다. 누구 엄마, 누구 딸, 누구 아내가 아닌 소진, 진숙 그리고 나로 호명된다. 가장 친절하고 내밀한 속 사정을 아는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회에서 청소 노동자로 살아온 이야기로부터(재계약이 안되자 맞춤법 틀려가며 '20년을 일했읍니다'를 쓰고 사무총장이 재계약 중재를 해주었다.) 동생의 결혼식 날 이혼을 한 언니의 이야기 (각각 이혼일기, 결혼일기, 엄마일기로 소설이 이어진다.) 전교회장에 출마한 당찬 열세 살 은서의 이야기까지 소설집은 그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들 계약금으로 당장 이천만 원씩을 낼 수 있는 집이 이렇게 많구나를 실감하는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젊은 부부는 좌절하기 보다 운수가 너무 좋았다로 그 하루를 넘긴다. 조남주는 아득히 멀고 체감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옆집, 앞집, 뒷집, 윗집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들을 모아 소설집 한 권을 꾸렸다. 과소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서울에서 살기 힘들고 일을 하면서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를 따라다니는 일이 벅차다. 딸 손주 아들 손주를 방학 동안 맡아 기르는 할머니는 허리가 요즘 안 좋다. 


  가만가만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어지는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을 다 읽어버렸다. 가독성이 좋은 건지 몰입을 한 건지 모르지만 소설은 차분하고 건조한 서술로 잘 읽힌다. 소설 속 그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일로 독자의 역할은 끝이 났다. 온전한 '나'로 살아내기를 다짐하고 사회의 법이 편견이 이름 지우기를 강요한다면 틀린 맞춤법이라도 써서 내가 이곳에 살아가고 있다고 알려야 함을 말하는 소설  『그녀 이름은』. 여성과 남성,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나누며 둘로 쪼개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소설의 임무는 우리가 가진 목소리로 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듣고 문장으로 쓴다. 말은 사라지지만 언어는 남는다는 것을 아는 소설가 조남주는 오늘도 쓴다. 


  이 글을 쓰다 참외를 깎아 먹었다. 선명하고 붉은 성주참외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은 참외 두 알에서 경북 성주 소성리에 살고 있는 성례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매는 서울에 가서 법원에 들어가고 나올 때 미대사관에 들렀을 때 카메라를 만났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지금 소성리의 상태나 참외 농사를 놔두고 이곳에 온 심정을. 손녀에게 전화가 걸려와 대박 났다고 말해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할매가 뉴스에 나왔다는 것이다. 애들한테 자랑하고 할매 대박 멋있다고 말해주어 성례 할매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다짐한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현실인가. 경계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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