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 - 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전혜정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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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일야화의 이야기 속 주인공 세헤라자데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의 주인공 박상호는 독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소설의 인물의 운명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박상호는 첫 소설을 성공작으로 이끈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에게는 장기 집권을 꿈꾸는 리아민의 전기를 써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자와 이야기를 쓰는 자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소설은 급박한 사건으로 펼쳐진다. 대통령의 전기를 쓴다는 소문이 나면서 박상호에게는 정치부 기자 정율리가 접근해 온다. 한순간에 연인이 되면서 박상호는 정율리에게 대통령 전기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박상호는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정율리에게 모두 쏟아 버리고 만다. 


  리아민의 이야기를 듣다가 박상호는 이상한 지점에 맞닥뜨린다. 리아민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집무실에 있던 책들의 수준은 극히 낮았고 문학적인 소양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래도 써야 한다. 박상호는 쓰는 운명에 갇힌 사람답게 리아민의 전기를 쓴다. 


  영부인 최세희라는 새로운 화자의 등장으로 박상호는 이야기 감옥에 갇힌다. 그녀는 여배우로 리아민과는 공식적으로는 열아홉 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그녀는 박상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아민의 전기에 그녀라는 인물을 어떻게 쓸 것인가. 박상호는 전기를 쓴다기 보다 리아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 소설을 써 버린다. 그 자신 역시 첫 소설 이후에 성공작을 쓰지 못한 지 오래였다.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과 쓰려는 욕망을 다룬다. 두 욕망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다. 리아민처럼 이야기를 수단으로 여기며 성공으로 향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역시 박상호처럼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며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자들의 허위를 비웃는다. 박상호가 쓴 소설 안에는 그의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 진실을 묻어 두고 거짓으로 무장하려는 리아민과 이야기 속에 진실을 찾으려는 박상호의 대결은 누구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인가.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권력과 욕망으로 무장한 세계에 이야기의 힘을 믿는 소설가의 미약한 외침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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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유리 낭만픽션 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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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나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일본으로 데려간다. 일본 전역으로 뻗어 있는 기차역으로 사람이 가지 않은 짐승이 다니는 길로. 시대는 다양하다. 전쟁 중이거나 전쟁이 끝난 혼란한 일본의 시간에서 미스터리는 펼쳐진다. 나이 마흔에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다양한 작품을 썼다. 미스터리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역사 소설로 데뷔해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전력이 있다. 


  나는 주로 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왔다. 단편과 중편 컬렉션을 좋아하고 논픽션을 단행본으로 묶은 『일본의 검은 안개』를 인상 깊게 읽었다. 사건의 개요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소개하는 방식의 서술이 마음에 든다. 진행 개요를 따라가다 만나는 트릭의 반전을 마주하다 보면 때론 숨이 막힐 때가 있다. 범죄자의 인간 본성에 숨겨둔 교묘함과 간악함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더욱더 간담이 서늘해진다. 


  최근에 나온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현란한 유리』는 3캐럿의 다이아몬드를 가진 사람들의 비극을 연작 형식으로 쓴 추리 소설이다. 흠결이 없고 다이아몬드의 모양은 원형이다. 링은 백금 한 돈. 보석상 우카이 주베에는 자신이 판 다이아몬드 반지의 구매자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수첩에 적어 놓는다. 어찌 된 운명인지 보석을 사 가는 사람의 신변에는 어둡고 불길한 사건이 생긴다. 열두 편의 이야기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쥔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다.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혼란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미스터리로 포착해내는 재주는 마쓰모토 세이초를 따라갈 수 없다.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내세워 불온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실려 있는 작품 중 「백제의 풀」과 「도망」은 마쓰모토 세이초가 전쟁 중 한국에 복무한 경험이 들어 있다. 그는 징집되어 이 년 정도를 한국의 정읍과 용산에서 지낸 적이 있다.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지는 전쟁 중이어도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불타오른다. 


  짧은 이야기 안에 인간의 욕심과 배반, 슬픔까지 다룬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지 않는 인물들의 결말을 상상하는 재미까지도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려 놓는다. 사건의 전모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는 범죄자의 트릭 앞에서 과연 인간이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구나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과응보식의 결말이 식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욕심의 끝에는 처절한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면 『현란한 유리』안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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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
박형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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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곱등이를 처리하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장길도는 혼잣말을 한다. 실은 속으로 생각하려던 것이었는데 말이 되어 터져 나왔다. 


"수련 씨, 대체 왜 그랬어요."

혼잣말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입을 여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국민연금 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안 들었어요. 왜요……."

(박형서, 『당신의 노후』中에서)


  박형서의 소설 『당신의 노후』의 한 장면이다.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고령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고 있는 줄 알았다. 읽어보면 더 어둡고 암담하고 끔찍하다. 출산율은 낮고 노인 인구 비율은 높아지는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고령화 사회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소설이란 그런 것이다.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는 것보다 처절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성하게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내일 보다 오늘이 중요하다.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젊음에 미련을 두기 보다 늙음에 불안해하기 보다 지금 당신의 삶에 연민을 느껴야 한다. 『당신의 노후』는 초고령화 사회를 살아갈 한국의 시민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국민연금공단의 외곽 공무원으로 40년 근무를 마치고 퇴직한 공무원 장길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의 아내는 폐 질환으로 요양원에 누워 있다. 장길도 보다 아홉 살 많은 아내 앞으로 장미꽃 한 다발이 배달되었다. 장미꽃 안에는 '한수련, 노령연금 100% 수급을 축하한다'라는 말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 언제 아내가 국민연금에 가입했을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국민연금이 수령액이 모인 통장을 보여주며 집을 팔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내가 연금 수령자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장길도는 바빠진다.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는 사회에서 해결책이란 국민연금공단의 특별 임무 밖에 없다. 연금 100% 수령자를 찾아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임무. 장길도는 오랜 시간 동안 국민연금공단의 다른 업무를 맡아왔다. 과다 수급자를 찾아가 사고사, 자살로 위장하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수급자를 사찰, 감시, 미행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소설은 노인들의 인생사를 한 챕터씩 들려준다. 그들이 태어나고 살고 죽기까지의 간단한 신상을 들려준다. 죽음은 소설 안에서 장길도와 그가 속한 국민연금공단, 즉 국가에 의한 일임이 드러난다. 아흔 살 노인이 택시 운전을 하고 백세를 사는 것이 흔하게 된 세상에서 국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하여 은밀한 죽음을 실행한다. 장길도 역시 국가의 명령으로 그 일을 해 냈다. 능숙하게 했다. 사고 없이 정년을 맞이해 이제 아내의 간병을 하며 지낼 요량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 적색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걸 알면서 장길도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한다. 아내를 외곽 공무원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임무가 그 자신으로부터 떨어졌다. 젊음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늙음이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착상에서 출발한 『당신의 노후』는 실패의 소설이다. 젊음과 늙음 그리고 사랑의 실패. 


  65세 이후를 대비하느라 먹고 싶은 것 참는 당신의 오늘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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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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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사람들이 죽으러 병원에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들이 실패할 때도 있었다. '라는 무주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주와 말테는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정확히 간파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병원과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준비된 죽음이었다.


  편혜영의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은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삶과 병과 죽음의 실패. 우리는 매번 실패해서 실패한 순간에도 그게 실패라고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이마에 실패의 낙인을 찍지 않는 이상 이 생에서 패배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한때는 조선 산업으로 번창했던 도시 이인 시(里仁市)는 경기가 나빠지자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면서 도시를 빠져나가거나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다 술에 취해 사고를 내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온다. 인구 9만의 쇠락한 도시에도 병원은 있다. 선도 병원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간호조무사로 일을 시작한 이석이 그곳에 있다. 성실하고 사람이 좋아서 그는 병원에서 원무과에서 일을 하며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병원에서 과장과 함께 병원에 들어오는 비품의 단가를 올리거나 리베이트를 받으면서 일했던 무주는 혼자 책임을 지고 선도 병원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무주의 아내는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그 순간 무주는 제대로 살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병원 혁신위원회 팀이 꾸려지고 상사인 이석의 추천으로  팀에 들어갔다. 사무장은 병원을 위한 혁신안이 담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문이 떠오르고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이석이 작성한 회계 장부의 숫자를 검토한다. 


  이석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석이 일하는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그 순간 원장은 돈이 많은 다른 환자의 치료를 먼저 해주었다. 타이밍을 놓친 이석의 아들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서울의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아들의 병원비, 대출, 세금, 그 밖의 생활비를 이석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무주는 장부에 적힌 누가 봐도 과하게 부풀린 액수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정의로운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석의 비리를 병원 사이트에 익명으로 제보한다. 


  어진 마을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가진 이인 시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소설가 편혜영이 만들어낸 가공의 도시에서 나는 익숙함을 마주한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말을 아끼고 죽음에 무감각했다. 병상이 비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죽음조차 빈자와 부자를 차별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아놓고도 1인실을 쓰지 못하는 세계였다. 정사각형이 아닌 삼각형 안에서 바닥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공간이었다. 


  무주는 좋은 동료이자 농담 상대인 이석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에게만 들이대며 위협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에도 산 자들의 세계에서 믿음은 배신당한다. 다시 돌아온 이석은 무주에게 말한다. 병원은 불리한 건 절대 들춰내지 않고 원하면 뭐든 감출 수 있다고. 죽음과 생명이 각축을 벌이는 곳에서 오로지 죽은 자들이 승리한다. 죽음에서 실패한 자들이 병원에서 퇴원한다. 편혜영은 불균형, 불평등, 불합리함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으로 이 세계의 탈출구를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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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
윤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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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나만 쉬었다. 10월 9일 한글날, 휴일이었는데. 쉬라고 해서 쉬었는데 마음이 불편 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시계를 자꾸 보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이걸 하고 있겠네. 이 시간이면 끝났겠네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어묵국을 끓였는데 어묵 보다 무가 많았다. 무 다 건져 먹기. 점심의 미션이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에 눈길이 갔다. 깔아지나, 깔아져서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너무 재밌어서 앱을 지웠다가(심지어 탈퇴 신청까지 했다) 다시 깔아서 저녁 먹고 또 했다. 게임 한 번 당 하트 하나가 필요했다. 하트가 필요한 게임이라니. 사랑을 마구 구걸하게 만들다니.


  정신 차리고 윤성희의 『첫 문장』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의 하루가 별 볼일 없는 건 아니었구나 위로가 되었다. 하루에 두 번 밥 먹기. 보일러 틀어서 샤워 하기. 자기 전 마음에 드는 책 골라 읽기. 귀여운 캐릭터의 유혹에 빠져 게임 하기.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 같은 하루를 살아 내고 윤성희의 책을 읽는 것으로 나만 쉰 휴일을 마무리 했다. 


   『첫 문장』은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은 '첫 문장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문장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다. 중요한 건 문장이 아니다.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살아 오면서 네 번의 죽음을 맞을 뻔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어제의 나의 하루처럼 지나고 보니 별 것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그게 다 시간의 힘이다. 죽을 뻔 했던 그 순간에는 세상이 꺼지고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지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수긍이 된다. 이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자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다른 형과 누나 사이에서 자란다. 눈이 먼 할머니는 성이 다른 손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달도 가는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라디오 뉴스를 듣는 할머니 곁에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유년을 통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중 두 번은 자살 기도라는 오해를 받았고, 한 번은 '행운의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실렸다. 내가 죽으려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그땐 어렸다고. 단지 겁이 났을 뿐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내가 떠나간 집에서 낮잠을 자던 토요일 오후에, 나는 내가 그 오해를 방패 삼아 사춘기 시절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성희, 『첫 문장』中에서)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던 남자는 살아 남아 결혼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 자신은 네 번이아 죽음을 피했는데 열일곱의 딸은 그러지 못했다. 소설은 딸을 잃고 아내가 떠난 집에서 혼자 남은 남자의 일상을 그려낸다.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해 자리를 정리하고 경비아저씨에게 받은 사탕 두 알을 받는다. 남자는 회사 회장님의 자서전을 대신 써준 적도 있었다. 회장님이 요구하는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에 단어를 고치기도 했다. 조카의 결혼식에 갔다가 문구점에서 산 수첩에 '나'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적기 위해 고심한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버스 터미널에서 가을을 보낸다. 전국의 버스 터미널은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언제라도 표를 사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 남자는 딸아이가 살아 있었으면 썼을 열일곱의 자서전의 문장들을 고르느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딸과 함께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그날 딸이 마지막으로 신은 양말의 무늬를 기억해 내지 못해 운다.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의 취향에 관대하다. 왜 그런 걸 좋아하는지 따져 묻지 않고 긍정해 준다. 예의 없는 말버릇에도 양말을 뒤집어 벗는 행동에도 웃어주고 받아 준다. 남자는 딸이 가진 특이한 말투와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농담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주고 원하는 게 있으면 전부 들어주려고 했다. 그 자신은 네 번이나 죽음을 피해 놓고 딸에게는 운을 물려 주지 않았다. 남자는 딸의 자서전을 대신 쓰는 것으로 슬픔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모두 첫 문장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아오는 내내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계를 보고 게임을 한다. 첫 문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첫 문장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삶이란 그런 것이다.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게임 한 번당 하트 하나는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어제는 나만 쉬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오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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