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
윤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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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나만 쉬었다. 10월 9일 한글날, 휴일이었는데. 쉬라고 해서 쉬었는데 마음이 불편 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시계를 자꾸 보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이걸 하고 있겠네. 이 시간이면 끝났겠네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어묵국을 끓였는데 어묵 보다 무가 많았다. 무 다 건져 먹기. 점심의 미션이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에 눈길이 갔다. 깔아지나, 깔아져서 몇 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너무 재밌어서 앱을 지웠다가(심지어 탈퇴 신청까지 했다) 다시 깔아서 저녁 먹고 또 했다. 게임 한 번 당 하트 하나가 필요했다. 하트가 필요한 게임이라니. 사랑을 마구 구걸하게 만들다니.


  정신 차리고 윤성희의 『첫 문장』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의 하루가 별 볼일 없는 건 아니었구나 위로가 되었다. 하루에 두 번 밥 먹기. 보일러 틀어서 샤워 하기. 자기 전 마음에 드는 책 골라 읽기. 귀여운 캐릭터의 유혹에 빠져 게임 하기.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 같은 하루를 살아 내고 윤성희의 책을 읽는 것으로 나만 쉰 휴일을 마무리 했다. 


   『첫 문장』은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은 '첫 문장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문장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다. 중요한 건 문장이 아니다.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살아 오면서 네 번의 죽음을 맞을 뻔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어제의 나의 하루처럼 지나고 보니 별 것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그게 다 시간의 힘이다. 죽을 뻔 했던 그 순간에는 세상이 꺼지고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지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수긍이 된다. 이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자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다른 형과 누나 사이에서 자란다. 눈이 먼 할머니는 성이 다른 손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달도 가는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라디오 뉴스를 듣는 할머니 곁에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며 유년을 통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네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중 두 번은 자살 기도라는 오해를 받았고, 한 번은 '행운의 소년들'이라는 제목으로 지역신문에 실렸다. 내가 죽으려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그땐 어렸다고. 단지 겁이 났을 뿐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내가 떠나간 집에서 낮잠을 자던 토요일 오후에, 나는 내가 그 오해를 방패 삼아 사춘기 시절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성희, 『첫 문장』中에서)


  네 번이나 죽을 뻔 했던 남자는 살아 남아 결혼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 자신은 네 번이아 죽음을 피했는데 열일곱의 딸은 그러지 못했다. 소설은 딸을 잃고 아내가 떠난 집에서 혼자 남은 남자의 일상을 그려낸다.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해 자리를 정리하고 경비아저씨에게 받은 사탕 두 알을 받는다. 남자는 회사 회장님의 자서전을 대신 써준 적도 있었다. 회장님이 요구하는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에 단어를 고치기도 했다. 조카의 결혼식에 갔다가 문구점에서 산 수첩에 '나'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적기 위해 고심한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버스 터미널에서 가을을 보낸다. 전국의 버스 터미널은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언제라도 표를 사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 남자는 딸아이가 살아 있었으면 썼을 열일곱의 자서전의 문장들을 고르느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딸과 함께 지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그날 딸이 마지막으로 신은 양말의 무늬를 기억해 내지 못해 운다. 


  윤성희의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인의 취향에 관대하다. 왜 그런 걸 좋아하는지 따져 묻지 않고 긍정해 준다. 예의 없는 말버릇에도 양말을 뒤집어 벗는 행동에도 웃어주고 받아 준다. 남자는 딸이 가진 특이한 말투와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농담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주고 원하는 게 있으면 전부 들어주려고 했다. 그 자신은 네 번이나 죽음을 피해 놓고 딸에게는 운을 물려 주지 않았다. 남자는 딸의 자서전을 대신 쓰는 것으로 슬픔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모두 첫 문장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살아오는 내내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시계를 보고 게임을 한다. 첫 문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첫 문장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삶이란 그런 것이다.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게임 한 번당 하트 하나는 중요하지 않지만 필요하다. 


  어제는 나만 쉬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오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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