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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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사람들이 죽으러 병원에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들이 실패할 때도 있었다. '라는 무주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주와 말테는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정확히 간파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병원과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준비된 죽음이었다.


  편혜영의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은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삶과 병과 죽음의 실패. 우리는 매번 실패해서 실패한 순간에도 그게 실패라고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이마에 실패의 낙인을 찍지 않는 이상 이 생에서 패배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한때는 조선 산업으로 번창했던 도시 이인 시(里仁市)는 경기가 나빠지자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면서 도시를 빠져나가거나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다 술에 취해 사고를 내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온다. 인구 9만의 쇠락한 도시에도 병원은 있다. 선도 병원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간호조무사로 일을 시작한 이석이 그곳에 있다. 성실하고 사람이 좋아서 그는 병원에서 원무과에서 일을 하며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병원에서 과장과 함께 병원에 들어오는 비품의 단가를 올리거나 리베이트를 받으면서 일했던 무주는 혼자 책임을 지고 선도 병원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무주의 아내는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그 순간 무주는 제대로 살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병원 혁신위원회 팀이 꾸려지고 상사인 이석의 추천으로  팀에 들어갔다. 사무장은 병원을 위한 혁신안이 담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문이 떠오르고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이석이 작성한 회계 장부의 숫자를 검토한다. 


  이석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석이 일하는 병원으로 달려왔지만 그 순간 원장은 돈이 많은 다른 환자의 치료를 먼저 해주었다. 타이밍을 놓친 이석의 아들은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서울의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아들의 병원비, 대출, 세금, 그 밖의 생활비를 이석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무주는 장부에 적힌 누가 봐도 과하게 부풀린 액수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정의로운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석의 비리를 병원 사이트에 익명으로 제보한다. 


  어진 마을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가진 이인 시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소설가 편혜영이 만들어낸 가공의 도시에서 나는 익숙함을 마주한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말을 아끼고 죽음에 무감각했다. 병상이 비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죽음조차 빈자와 부자를 차별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아놓고도 1인실을 쓰지 못하는 세계였다. 정사각형이 아닌 삼각형 안에서 바닥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공간이었다. 


  무주는 좋은 동료이자 농담 상대인 이석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에게만 들이대며 위협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에도 산 자들의 세계에서 믿음은 배신당한다. 다시 돌아온 이석은 무주에게 말한다. 병원은 불리한 건 절대 들춰내지 않고 원하면 뭐든 감출 수 있다고. 죽음과 생명이 각축을 벌이는 곳에서 오로지 죽은 자들이 승리한다. 죽음에서 실패한 자들이 병원에서 퇴원한다. 편혜영은 불균형, 불평등, 불합리함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으로 이 세계의 탈출구를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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