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방문객 오늘의 젊은 작가 22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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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들의 생일날 집에 두 사람이 찾아온다. 아들의 생일에 맞춰 귀국한 손경애는 얼떨결에 그들을 맞이한다. 김희진의 소설 『두 방문객』은 기이한 방문으로 시작된 만남을 그린다. 소아과 의사로서 촉망받던 젊은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 3년째였다. 손경애는 아들의 친구라고 하는 남자 권세현, 그의 애인 정수연과 아들의 생일을 함께 보낸다. 장례식 때 경황이 없어 그들이 왔다는 사실도 잊었다.

조객록을 뒤져 그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친구였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이상한 일은 엄마 손경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정수연의 손에서 발견한 반지는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아들은 애인이 있는 여자와 왜 같은 반지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들의 사랑은 기묘하게 빗나갔던 것일까. 『두 방문객』은 보편적인 사랑의 관념을 가진 자들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소설의 중반부까지도 아들과 두 방문객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상운의 죽음에 드리운 의혹의 실체를 서서히 보여줌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한다. 아들은 그날 독일로 갔어야 했다. 술에 취해 운전을 해 사고를 냈고 그 곁에는 한 여자가 동승해 있었다. 두 사람은 무엇을 숨긴 채 손경애의 집에 방문했을까. 한 사람의 죽음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두 방문객』은 차분하게 보여준다. 추측과 망설임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편견이 없어야 했다.

자신을 이해받고자 노력한 것의 결과가 죽음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소설은 이해와 용서, 화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 세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향한 마음의 움직임에서 그들의 미래는 예정되어 있었다. 과격한 시절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사랑은 이해 가능한 것으로만 통용되고 있다. 『두 방문객』의 결말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야말로 폭력이라고 말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진짜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손경애의 말을 정수연은 뒤집는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야 시작된다. 그가 남긴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으로서 말이다. 남은 자들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의미의 발견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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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재 오늘의 젊은 작가 23
황현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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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복권방이 생겼다. 저녁이 되면 그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가 그곳을 지나는 시간이 늦은 저녁이기에 그곳이 매시간 사람들로 들끓는지 아니면 그 시간에만 한정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활력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단 한 번도 사본적 없는 숫자 여섯 개가 담긴 종이. 행운이 온다는 꿈을 꾸기도 한 다음날이면 내게 그것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니까, 허황된 희망을 걸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아니까. 행운이란 쉽게 찾아오지 않으며 그걸 알기 때문이 이토록 차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황현진의 소설 『호재』는 삶이라는 가혹한 굴레에서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개발 지구에서 부동산 일을 하던 남자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 삶의 다른 이름이란 결국 죽음이 아니겠냐며 말을 걸어오는 이야기, 『호재』는 느리고 침착한 서술로 서사를 끌어간다. 호재의 아버지 배두오와 그의 동생 배두이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삶의 보호막이 없는 한 인간의 외로운 심사를 더듬어 낸다. 호재는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에게 맡겨졌다.

어린 시절을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는 타인을 극존칭으로 대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는 지나친 예의를 보임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누구도 호재 그 자신을 지켜줄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른이 없는 아이는 세상을 극도로 예민한 존재로 인식하며 자란다. 그의 아버지 두오는 젊은 시절 억울한 일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삶과 불화하며 살아간다. 어쩌다 결혼을 해서 호재를 낳았지만 자식을 돌볼 수 없는 태생적으로 인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호재는 고모부가 강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고모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도대체 누가 가져갈 것 없는 부동산 사무실에 와서 칼로 사람을 죽이고 도망갔단 말인가. 매주 복권을 사면서 언젠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행운의 예감을 붙들며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돈을 받아오겠다며 나간 호재의 아버지 배두오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한 명뿐인 자식인 호재에게 돈을 좀 마련해준다는 구실이었다.

『호재』는 누가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건 거짓이고 위선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호재는 말한다. 나는 당신의 알리바이가 아니야라고. 알리바이. 현장에 없었음을 증명하며 범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 없었다고? 실패한 인생의 범인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증명해 내지만 결국 범인은 당신이다. 인생이라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무죄는 없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해서 오는 어쩌면 행운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당신의 삶에 기회란 없다. 『호재』는 서늘한 언어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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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의 일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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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의 장편소설 『마르타의 일』은 문제작이다. 사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연년생으로 자란 자매의 이야기. 평범한 서사이지만 박서련은 독특한 결말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상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2019년을 살아가는 청년의 일상을 긴박하게 펼쳐놓는 솜씨는 훌륭했다. 임용 고시를 앞둔 주인공 수아는 자신의 동생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는다. 병원으로 달려간 수아는 동생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경찰이라는 사람에게 동생인 경아의 핸드폰을 받는다. 그때부터 경아의 죽음에 둘러싼 의혹과 맞선다.

사이가 좋기도 했다가 나쁘기도 한 자매였다. 경아는 얼굴이 예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언니 수아는 공부를 잘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두 자매에게는 선망의 눈길이 따라다녔다. 경아는 자신의 이름이 운이 없다는 이유로 리아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꿨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았고 결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정황상 자살이 유력하다고 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수아는 경아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경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수아는 예감에 사로잡혀 경아의 죽음은 자살이 아님을 직감했고 경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SNS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자 확신으로 굳어졌다.

수아는 그때부터 경아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파헤친다. 익명으로 불리는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그가 전해주는 정보를 취합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나간다. 경아의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면서도 수아는 임용 고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간다. 『마르타의 일』의 일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이 지점이다. 초수 합격을 하기 위해 스터디를 하고 면접 준비를 하는 수아. 시간을 분 단위로 끊어서 공부에 매진하는 수아. 그러면서도 경아가 살아 있을 때 처했던 상황을 파악해 나간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 『마르타의 일』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예수가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함께 일 할 것을 청하자 예수가 마리아의 편을 든다. 언니 마르타는 예수의 나무람을 들어야 했다. 언니 마르타는 일을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다. 수아는 익명과 경아의 일을 해결하면서 그에게서 마르타에 관련된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는 마르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그 세계에서 마리아의 일이야말로 지켜주고 존중받아야 함을 마르타에게 알려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2019년을 살아가는 마르타들이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알려주는 소설이다, 『마르타의 일』은. 마르타가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 역시 나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일인 것이다. 『마르타의 일』의 장르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임용 고시 스릴러? 초수에 합격하는 법을 알려주는 비결서?

『마르타의 일』은 인간 본성의 선함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며 인간애를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냉혹한 시선으로 죄를 지은 자는 용서가 아닌 당연하게 벌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용서란 개나 줘버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용서는 지옥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받아 보시지 하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을 경쟁 상대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2019년의 정글에 내던져진 고학력 고스펙 엘리트가 펼치는 잔혹한 복수극. 당신과 나의 일이란 루틴을 지키고 면접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

장황하고 현학적인 서술 없이도 인물의 감정을 풍부하게 묘사하는 박서련의 솜씨는 훌륭하다. 뻔한 이야기가 되기라는 예감 속에서도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건 세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능력의 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는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오히려 악인이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마르타의 일』에서 취해야 할 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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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마르틴 베크 시리즈 6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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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데 일단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렇다는 소리이다. 이후에 7, 8, 9, 10권이 남아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 여섯 번째 이야기는 내가 읽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최고의 소설로 꼽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건은 단순하다. 사건이 벌어졌고 범인을 잡으려는 수사가 느리게 진행된다. 마르틴 베크의 시리즈 특징 중에 하나는 이야기의 진행이 느리다는 것이다.

느리고 답답해서 도대체 언제 사건이 해결되는 거야라고 물어볼 때쯤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이다. 느리지만 복잡하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단서를 하나씩 제공하는 식이다. 그것에서 재미를 찾게 되면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최고의 경찰 소설이자 추리 소설이 되는 셈이다.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한 번 손에 잡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1970년대의 스웨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복지 국가라는 이면 뒤에 숨겨진 어두운 스웨덴의 현실로 말이다. 물가는 높아지고 자본주의 사업가들 몇에 의해 돈이 움직이는 암울한 시절. 경제는 성장했지만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각종 잔혹 범죄가 연이어 일어나고 좌우 대립의 이념 갈등이 심화된 곳. 초저녁 한 호텔 식당에서 부유한 사업가 빅토르 팔름그렌이 총에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

총에 맞은 팔름그렌은 바로 죽지 않았다. 말뫼의 경찰들은 목격자들 증언을 듣기 위해 호텔로 향한다. 식당 직원, 팔름그렌 주변에 있던 사람들, 손님들 다수의 목격자를 확보했지만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에 띄는 특징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이 배를 탔다는 첩보를 받아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우둔한 순경 둘이 포타티스모스를 대낮에 즐기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제목이 다 했다. 소설의 전반부를 읽으면 제목의 뜻을 알 수 있다. 읽고 있으면 마이 셰발, 페르 발뢰가 경찰을 향한 풍자를 세련되고 노련하게 했음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팔름그렌이 국가 경제의 그것도 지하 경제에서 특출나게 활동했음을 상관에게 보고받은 마르틴 베크가 빠르게 범인 검거를 하기 위해 말뫼로 간다. 그곳에서도 수사는 진척이 없다. 베크는 상황을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지만 그의 노련한 지휘 아래 범인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난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단 한 발로 팔름그렌을 죽인 자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소설은 씁쓸한 결말로 향해 간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에 짓눌린 한 개인의 슬픈 얼굴을 드러내면서 정의의 정의를 묻는다. 사건의 진상을 따라가는 유희를 선사하면서 묵직한 한 방으로 주제를 압축 시킨다. 베크와 그의 동료들이 하는 수사를 따라가다보면 경찰이라는 조직의 이중성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 또한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소설을 통해 표현하려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박하고 스릴 넘치고 긴장이 가득한 구성과 표현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시리즈 중 유머와 풍자가 제일인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앞의 다섯 권을 읽지 않아도 이 소설로 먼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시작해도 좋다. 그렇게 되면 열렬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신봉자가 되어 시리즈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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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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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中에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다, 11월은. 날은 조금씩 추워지고 한 해가 이제 저물어 간다는 기분에 그리고 어떤 상실의 기억 때문에. 문득 비어 있는 시간 속으로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온다. 음악을 찾아 듣고 책을 펼쳐서 읽는다. 지금의 나의 기분을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기운을 차려야지.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은 없고 그저 마음의 온도만 낮아질 뿐이다. 지식보다는 지혜로 자신의 삶을 꾸려간 이의 글이라면 읽으면서도 힘이 난다.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가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으며 11월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원고가 발견되어 따뜻한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컴퓨터를 믿지 못해 종이에 자신의 글을 프린트해 두었다고 한다. 평생 소설의 길을 걸어온 그이답게 글은 정갈하고 읽는 재미가 넘쳤다. 어린 시절 신여성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으로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꽃 피는 5월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시절에 6.25가 터졌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학을 하는 국어 선생님이 계셔서 그때 문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해방이 되고 우리말로 읽는 고전 문학이 좋아서 국문과에 지원했지만 전쟁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역사의 굴곡 앞에서 꿈이 좌절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식구들이 잠잘 때 몰래 쓰던 소설 『나목』으로 등단했다. 이런 박완서 소설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매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늦게 작가가 되어 지면을 얻기가 힘들었지만 부지런함과 근성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유머와 비판을 잃지 않는 소설을 써냈다.

『세상에 예쁜 것』 안에는 그리운 시절에 대한 회고와 문학을 해야 했던 이유, 먼저 떠나간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편지가 들어 있다. 초등학생이 보내온 질문지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고 토지문학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작가 박경리에 대한 다정한 기억을 풀어 놓는다. 마당에 피어 있는 꽃, 그 마당으로 놀러 오는 고양이. 가장 힘들었을 1988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한 사연을 읽으면 지금의 쓸쓸함과 불안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원래 힘들다고 느끼면 그 감정에 함몰되어 나만 제일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소설가 박완서는 글로써 지혜를 나누어 주고 소설로써 문학의 열정을 타오르게 한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사랑과 소설, 문학의 향기를 남겨 두어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기 남아 그가 두고 간 문학을 오래도록 읽을 것이다. 버티기가 힘겨울 때.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주저앉고 싶을 때. 박완서의 문학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준다. 문학의 이유를 『세상에 예쁜 것』을 통해 알아간다. 그의 말대로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소유물은 없다. 단지 사랑의 기억을 챙길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기억을 가져가고 사랑했던 기억은 놓아두고 간다. 남아있는 자들이 그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우리가 이 생에서 인연을 맺어 한 시절을 함께한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추억은 남은 내가 간직하겠다.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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