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中에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다, 11월은. 날은 조금씩 추워지고 한 해가 이제 저물어 간다는 기분에 그리고 어떤 상실의 기억 때문에. 문득 비어 있는 시간 속으로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온다. 음악을 찾아 듣고 책을 펼쳐서 읽는다. 지금의 나의 기분을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기운을 차려야지.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은 없고 그저 마음의 온도만 낮아질 뿐이다. 지식보다는 지혜로 자신의 삶을 꾸려간 이의 글이라면 읽으면서도 힘이 난다.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가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으며 11월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원고가 발견되어 따뜻한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컴퓨터를 믿지 못해 종이에 자신의 글을 프린트해 두었다고 한다. 평생 소설의 길을 걸어온 그이답게 글은 정갈하고 읽는 재미가 넘쳤다. 어린 시절 신여성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으로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꽃 피는 5월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시절에 6.25가 터졌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학을 하는 국어 선생님이 계셔서 그때 문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해방이 되고 우리말로 읽는 고전 문학이 좋아서 국문과에 지원했지만 전쟁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역사의 굴곡 앞에서 꿈이 좌절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식구들이 잠잘 때 몰래 쓰던 소설 『나목』으로 등단했다. 이런 박완서 소설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매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늦게 작가가 되어 지면을 얻기가 힘들었지만 부지런함과 근성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유머와 비판을 잃지 않는 소설을 써냈다.

『세상에 예쁜 것』 안에는 그리운 시절에 대한 회고와 문학을 해야 했던 이유, 먼저 떠나간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편지가 들어 있다. 초등학생이 보내온 질문지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고 토지문학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작가 박경리에 대한 다정한 기억을 풀어 놓는다. 마당에 피어 있는 꽃, 그 마당으로 놀러 오는 고양이. 가장 힘들었을 1988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한 사연을 읽으면 지금의 쓸쓸함과 불안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원래 힘들다고 느끼면 그 감정에 함몰되어 나만 제일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소설가 박완서는 글로써 지혜를 나누어 주고 소설로써 문학의 열정을 타오르게 한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사랑과 소설, 문학의 향기를 남겨 두어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기 남아 그가 두고 간 문학을 오래도록 읽을 것이다. 버티기가 힘겨울 때.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주저앉고 싶을 때. 박완서의 문학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준다. 문학의 이유를 『세상에 예쁜 것』을 통해 알아간다. 그의 말대로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소유물은 없다. 단지 사랑의 기억을 챙길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기억을 가져가고 사랑했던 기억은 놓아두고 간다. 남아있는 자들이 그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우리가 이 생에서 인연을 맺어 한 시절을 함께한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추억은 남은 내가 간직하겠다.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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