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은 사양할게요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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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의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의 주인공 연희가 직장에서 겪는 수모는 이런 식이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서 옆자리 성대리의 컴퓨터의 전원을 켜 놓고 팀장의 메신저 프로필을 주기적으로 들여다보며 기분을 눈치채는 일. 이름이 있지만 야, 막내로 불리며 팀장의 차를 세차하러 맡기러 다니고 어느새 내 일로 넘어온 일을 하느라 수시로 야근을 한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전공보다는 동아리 연극 활동을 더 열심히 한 연희. 소설은 꿈보다는 현실에 밀려 출판사에 취업한 연희의 오늘과 꿈만으로도 가득해서 찬란했던 연희의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연희는 박봉에 과다 업무, 잦은 야근을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신입사원 1이라는 역할을 부여한다. 비록 신입사원답게와 신입사원 같지 않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회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는 오두방정을 시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상적인 사회인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다를 수없이 되뇌어도 분위기에 휩쓸려 조롱과 냉소가 담긴 나름 위트 있는 농담이랍시고 툭툭 말을 내뱉다가 아차 하는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한다. 연희 역시 워크샵이라는 말이 일의 능률을 위해 기술, 교육을 나누는 장이라고는 하지만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추진한 이의 삼대를 멸문지화를 처하게 해도 모자란 곳에 가서 술을 먹고 팀장과 대리에게 꼬장을 부린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는 꿈을 꾸는 자와 현실에 순응한 자의 대비를 통해 청춘을 살고 있는 이들의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책이다. 연희와 연극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미는 취업이라는 선택지 대신 연극 활동을 이어 나간다. 연희는 직장에서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장미를 부러워하면서도 한심해한다. 한때 열렬했던 꿈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연희와 장미의 관계는 미묘하게 어긋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현실이라는 무대로 넘어와 상영된다.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여겼는데 입체적으로 변모하고 놀라울 정도로 각성을 해서 신입사원 1의 연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고전소설의 특성인 권선징악과 행복한 결말은 현대 소설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빌런이라고 여겼던 팀장과 대리는 느닷없이 선한 사람으로 배역을 수정하고 결말은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게 슬픔을 안겨준다. 


술만 마시면 자꾸 과거가 떠오른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으로 부풀었던 과거가. 현재의 나는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까를 기억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연희가 깨달은 것, '꿈꾸던 시간조차 지워버린 나'로 살면 안 된다는 것에 무한한 공감을 보낸다. 어떤 결말로 극이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 여기 배역을 부여받고 또박또박 대사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있다. 허무와 냉소로 상대 배역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퇴장까지는 남은 시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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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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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날이 급격히 추워졌다. 겨울 잠바 몇 벌을 꺼냈다. 기모가 든 청바지를 살까 고민했다가 작년에 입던 바지의 먼지를 털고 그냥 입기로 했다. 아직 눈다운 눈은 내리지 않은 상태. 첫눈이 오고 겨울일까. 두꺼운 옷을 꺼내기 시작하면 겨울일까. 눈과 겨울의 인과 관계를 헤아리는 일도 피곤해진 지금은 제대로 된 시간인 걸까. 금요일 밤이면 주말에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야지, 처리해야지 건설적인 마음이 든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한 일이란 누워서 김금희의 연작 소설집 『크리스마스 타일』을 겨우 읽어낸 일뿐이다. 크리스마스라는 시간적 배경을 두고 아주 작은 사소한 인연들로 모인 인물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담은 소설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남을 반복하는 일. 영영 보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며 결별했지만 일 때문에 지금 먹고사는 일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서 불면의 밤에 건, 조, 하, 게 이메일을 쓰며 만남을 갈구하는 일. 


김금희가 그려내는 소설 속 인물들은 다들 한 번씩은 망가지고 훼손되지만 끝내 자신을 폐기처분하지는 않는 강철 같은 체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힘이 아주 없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일을 할 때는 상식 있는 사회인인 메소드급 연기를 하다가도 삐딱하고 자기 비하가 심한 본캐가 나와 상대가 당황하기도 전에 나부터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반만 순수한 인물들. 『크리스마스 타일』에는 주말 내내 이불 밖은 위험해를 중얼거리며 밥을 시킬 기운도 없어서 냉장고에 있는 음식 아무거나를 꺼내서 먹을 것 같은 그러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씩씩하게 일어나 세수를 하는 당신과 나들이 등장한다. 


일하다가 병을 얻고 병명은 숨긴 채 수술을 받고 다시 복직하는 사람. 대학 내내 함께 했지만 나의 원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사람. 의욕을 내기 위해 중국 유학을 가서 관계가 파탄 나는 걸 보는 사람. 어린 시절 오해와 몰이해로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 방송국 막내 작가로 온갖 굴욕적인 일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 반려견을 잃고 도저히 일상을 살아갈 힘이 없어 개가 있는 지인들을 연락해 심지어 첫 직장 사수와도 만나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사람. 


처음에는 자신의 모서리를 드러내다가 끝내는 그 모서리를 자신 쪽으로 돌리며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다. 일이 잘 안될 때도 잘 될 때도(잘 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지만)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일이 엎어지면 나를 탓하다가 결국에는 마음에 내상까지 입고 만다. 후회를 반복하다가 인류애를 잃어버리고 자기애마저도 쓸쓸히 떠나보낸다. 김금희 소설에서 일상은 타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쉬워 보이다가도 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면 소설 속 인물들이 망치는 것보다 더 심한 강도로 관계를 끝장내고 마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들이 펼쳐지는 혼란극이다. 


크리스마스가 배경이니까 좌중우돌의 연속인 사건이 펼쳐지고 마지막은 홀리하고 해피한 결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기대감은 충족시켜준다. 눈이 내리고 산책을 하고 짝사랑을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는 마지막의 장면들. 대단한 결심 뒤에 오는 해내지 못할 거라는 한숨이 따라오겠지만 일단은 오늘은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생긴다. 얼마나 웃을 일이 없으면 일부러 웃음을 유발하는 영상을 찾아보며 이건 웃긴 거니까 웃어야 해 하며 나를 다독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하지는 않는지.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타일』을 순서는 상관없고 제목이 마음에 든다거나 끌린다거나 하는 단편 하나를 읽기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서로의 망가짐과 깨짐을 방치하지 않고 이상한 유머를 곁들인 치유책을 내놓으며 내일을 기약하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월요일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는 행성에 떨어져 있지만 부서지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평안한 웜홀 속으로 들어가 금요일 밤이라는 시간으로 『크리스마스 타일』은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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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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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과 해설,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수록 작품 발표 지면'이라는 페이지와 마주할 수 있다. 소설이 언제 쓰이고 어디에 실렸는지를 보다가 2014년과 2022년이라는 연도를 주목한다. 2014년에 두 편을 쓰고 2020과 2021년에 각각 한 편 나머지 네 편은 2022년에 쓰였다. 


2014년과 202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다들 한 번씩은 무너졌고 무너진 김에 일어나지 못하고 오래 울었을 거고. 누군가 혹은 각자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앞인지 뒤인지 모르지만 일단 걸어갔을 수도 있고. 안녕한지 묻는 게 미안해 어색한 웃음을 인사 대신 나누던 시간들이었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지 못했던 거다. 써보려고 시도했고 안간힘을 다해 문장을 적어갔을 테지만 문장은 버려졌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실린 소설들은 사랑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8년의 공백을 메운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슬픔에 미래를 떠올릴 수 없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2022년에도 여전히 가슴 아프다. 그들에게 내일이 있다는 걸 누군가가 말해주기만 했어도,라는 걱정의 마음으로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쓰였다. 


죽음이 암시되는 미래를 거부하고자 현재를 끝내기 위한 연인들이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다가 흩어지고 부서지고 소멸되는 것이라 믿는다. 곧 힘든 시간이 지나갈 거야 막연한 믿음조차 서로에게 주지 못하자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 젊었던 시절의 자신들. 예언자의 말처럼 세계는 끝장나고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절망만을 노래처럼 들려주던 우리들이 소설에 있다. 


배가 뒤집히고 단 한 명도 그 안에서 구해내지 못 한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지나 미래의 시간에 안착했다. 그럼에도 미래는 '이토록 평범한' 걸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없어서 자꾸 울었다. 소설 속 인물은 달에 도착할 수 없어도 달에 가는 것처럼 걸을 수는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결심을 한다. 완벽한 결말은 없어도 완벽한 절망은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각성했기에. 「엄마 없는 아이들」의 제목을 오래 들여다 보았다.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알려주기에. 


사랑의 상실을 겪어내고 이별 후에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바다에 가지 않더라도 바다를 그리워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바람을 맞으며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며 나를 살게 한다는 걸 떠올리면 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거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어서 그 바다에 두고 온 사랑과 슬픔을 함께하며 좋았던 추억을 자꾸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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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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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토요일에 나는 무얼 했냐면. 억울하게도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일찍 눈을 떴다. 유튜브로 책 추천 영상을 보다가(이럴 시간에 책을 읽는 게 나을 텐데) 주말이니까 누릴 수 있는 주 5일제가 선사한 혜택, 일어났다 다시 잠들기를 시전했다는. 이상하게도 오래 잤는데 몸이 아파서 바로 일어나지는 못하고 드러누워서 정지음의 『젊은 ADHD의 슬픔』을 읽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책을 읽다가 방 구조를 바꿔 봐야겠다고. 유튜브 알고리즘보다 더 알 수 없는 나의 잡념과 상념을 나도 어쩌지 못하겠다. 26세에 ADHD 진단을 받은 한 사람의 고단한 삶의 분투기를 읽고 있으면서 고작 책상의 위치 따위를 생각하다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체 어떤 시간을 보냈길래. 책을 다 읽고도 누워 있었다. 상상으로 이미 가구의 배치를 마쳤다. 인간, 일어나서 움직여라.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래.


『젊은 ADHD의 슬픔』에는 정지음이 모든 심리 테스트를 하다 스스로를 의심하며 ADHD 자가 진단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20점부터 ADHD 의심군인데 정지음은 62점을 맞았다.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준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문항을 시작으로 하나하나 읽다가 나를 사찰하고 있는 건가 무서워졌다. 


요리인지 조리인지 모를 식사 준비를 한다고 하면 나는 당황하고 허둥지둥한다. 옆에 이선균 셒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음식을 흘리고 그릇을 깨부순다. 그래봤자 완성된 음식의 종류는 김치를 가득 넣은 라면, 양파 무덤인가 의심될 정도의 계란찜, 도시락으로 싸갈 김치볶음밥. 다 하고 나면 개수대에는 그릇과 조리도구들로 산을 이루고 있다. 상에는 겨우 두어 개의 그릇에 담긴 음식뿐인데. 


많이 누워 있다. 정지음도 그렇다고 한다. 기분이 좋을 땐 사회성 없는 인간처럼 나름 위트가 있다고 생각한 농담을 하고 후회하기 일쑤다. 순서대로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이거 하다가 저거 하다가 그러다 중요한 일을 놓치고 만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젊은 ADHD의 슬픔』에서 정지음은 자신이 ADHD 진단을 받기 전까지와 받고 나서의 일상을 웃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슬픔을 이길 강력한 수단은 자신을 갈아 넣은 농담과 해학이라는 듯이. 


가끔은 슬픈데도 잡생각을 한다는 것 때문에 슬픔의 진위를 의심하게 되었다. 너무나 궁금해 한달음에 달려온 병원이면서, 진료 자체를 지루해하는 내가 남처럼 낯설었다. 남 같은 나를 되돌리기 위해, 하루빨리 지루해하는 내가 남처럼 낯설었다.

(정지음, 『젊은 ADHD의 슬픔』中에서)


59세에 죽은 엄마를 생각하면 슬픈데 내일 해야 할 업무가 떠올라 울적해진다.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지 속상하다가도 집에 가면 바로 눕지 말고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지 한다. 뻔히 보이는 약은 행동을 하는 인간을 보면서 재수 없네 그러다가도 카카오프렌즈에서 보내오는 신상품 톡을 보면 행복해진다. 『젊은 ADHD의 슬픔』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나에게 덜 불행해질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한다. '타자와 상황을 인식할 땐 '나'라는 주어를' 빼라는 것. 


순간순간 우울해지는 때를 복기하자면 나는 나라는 자의식을 과장하고 과몰입해서 드러내놓고 있을 때였다. 그냥 저 인간은 저런 인간이라는 식으로 나를 빼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에 하이파이브. 집중력과 노력이 부족한 것일 뿐 결국엔 일어나서 생각했던 일을 하나씩 해내는 나. 다들 괜찮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노력 중이라는 걸 알고 나면 괜히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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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 관계, 그 잘 지내기 어려움에 대하여
정지음 지음 / 빅피시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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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자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나의 우울부터 떨치고 싶으니까 나는 나쁘고, 그래서 우울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 별로여서 우울할 의무가 있다. 나는 나를 버티기가 힘들어 우울을 씻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한다.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中에서)


내가 전 직장에서 이상한 인간을 만나 겁나 힘들다고 느꼈을 때도 누군가는 고작 그런 일로 힘들다고 징징대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할까 봐 참았다. 실제 그런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실체 없는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말을 생각하느라 우울을 드러내지 못했다. 참아야지. 참아봐야지. 이러다가 결국엔 참을 수 없는 지점까지 왔고 나는 그 길로 짐을 쌌다. 비유적인 게 아니라 진심 빡쳐서 모든 짐을 챙겨 나왔다. 


후회하느냐고? 놉. 전혀.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아무도 들을 수 없게 나에게만 말해준다. 일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땐 들을 수 있게 잘했다고 말해준다. 잘한 겁니다. 쌔하고 이상한 낌새가 있다 싶으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버텨야 한다. 참을성이 없다고 가스라이팅을 당하기 전에 재빨리. 


정지음의 에세이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는 인간관계의 오묘함과 복잡함을 유머러스하게 파고든다. 인생사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고 매일 고성과 윽박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다 이제는 은은하고 은근한 압박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일을 한다. 업무가 많아서 인간관계를 생각할 틈이 없다는 건 다행인 거,겠지? 책은 작가 정지음이 겪은 인류애가 사라진 에피소드와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시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읽고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너무 별로여서 우울할 의무가 있다'니. 힘들다고 다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그 정도면 너는 살만하지 않느냐. 다른 힘든 사람도 많은데 호강에 겨워 요강 차는 소리 한다는 위로 같은 비난을 받고 나면 그래 난 우울하면 안 돼 이겨내야 해 아자아자 혼자 청춘 드라마를 찍었다. 


나도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내가 너무 별로라는 거. 영화 《미쓰 홍당무》에서 공효진이 외치는 것보다 크게 외칠 수 있다. 별로인 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요행이나 바라고. 매일 드러누워 있으면서 잘 되기를 바라고.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를 보며 나의 미래를 대입하며 좋아하기만 하는. 나는 별로니까 우울해도 된다.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는 엉망진창인 나를 그럼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늘을 잘 지내보자고 한다. 


별로인 거 받고 우울해도 되니 그 상태여도 너는 너라는 것. 책을 읽으면 엉망진창인 인간관계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어도 좋고. 기대했지만 묘수는 없네 실망해도 좋다. 나 말고도 인간을 대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 망한 인간관계 에피소드 모음집이라 나만 망한 게 아니었네 미안하지만 안도할 수도 있는 책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요즘은 가끔이 아니라 내내 광기를 발하고 있는 것 같아 조심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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