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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 관계, 그 잘 지내기 어려움에 대하여
정지음 지음 / 빅피시 / 2022년 2월
평점 :
우울증자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나의 우울부터 떨치고 싶으니까 나는 나쁘고, 그래서 우울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 별로여서 우울할 의무가 있다. 나는 나를 버티기가 힘들어 우울을 씻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한다.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中에서)
내가 전 직장에서 이상한 인간을 만나 겁나 힘들다고 느꼈을 때도 누군가는 고작 그런 일로 힘들다고 징징대고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하며 비난할까 봐 참았다. 실제 그런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실체 없는 누군가의 시선, 누군가의 말을 생각하느라 우울을 드러내지 못했다. 참아야지. 참아봐야지. 이러다가 결국엔 참을 수 없는 지점까지 왔고 나는 그 길로 짐을 쌌다. 비유적인 게 아니라 진심 빡쳐서 모든 짐을 챙겨 나왔다.
후회하느냐고? 놉. 전혀.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아무도 들을 수 없게 나에게만 말해준다. 일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땐 들을 수 있게 잘했다고 말해준다. 잘한 겁니다. 쌔하고 이상한 낌새가 있다 싶으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버텨야 한다. 참을성이 없다고 가스라이팅을 당하기 전에 재빨리.
정지음의 에세이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는 인간관계의 오묘함과 복잡함을 유머러스하게 파고든다. 인생사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고 매일 고성과 윽박과 가스라이팅을 당하다 이제는 은은하고 은근한 압박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일을 한다. 업무가 많아서 인간관계를 생각할 틈이 없다는 건 다행인 거,겠지? 책은 작가 정지음이 겪은 인류애가 사라진 에피소드와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시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문장을 읽고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너무 별로여서 우울할 의무가 있다'니. 힘들다고 다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그 정도면 너는 살만하지 않느냐. 다른 힘든 사람도 많은데 호강에 겨워 요강 차는 소리 한다는 위로 같은 비난을 받고 나면 그래 난 우울하면 안 돼 이겨내야 해 아자아자 혼자 청춘 드라마를 찍었다.
나도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내가 너무 별로라는 거. 영화 《미쓰 홍당무》에서 공효진이 외치는 것보다 크게 외칠 수 있다. 별로인 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요행이나 바라고. 매일 드러누워 있으면서 잘 되기를 바라고.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를 보며 나의 미래를 대입하며 좋아하기만 하는. 나는 별로니까 우울해도 된다.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는 엉망진창인 나를 그럼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늘을 잘 지내보자고 한다.
별로인 거 받고 우울해도 되니 그 상태여도 너는 너라는 것. 책을 읽으면 엉망진창인 인간관계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어도 좋고. 기대했지만 묘수는 없네 실망해도 좋다. 나 말고도 인간을 대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 망한 인간관계 에피소드 모음집이라 나만 망한 게 아니었네 미안하지만 안도할 수도 있는 책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요즘은 가끔이 아니라 내내 광기를 발하고 있는 것 같아 조심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