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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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날이 급격히 추워졌다. 겨울 잠바 몇 벌을 꺼냈다. 기모가 든 청바지를 살까 고민했다가 작년에 입던 바지의 먼지를 털고 그냥 입기로 했다. 아직 눈다운 눈은 내리지 않은 상태. 첫눈이 오고 겨울일까. 두꺼운 옷을 꺼내기 시작하면 겨울일까. 눈과 겨울의 인과 관계를 헤아리는 일도 피곤해진 지금은 제대로 된 시간인 걸까. 금요일 밤이면 주말에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야지, 처리해야지 건설적인 마음이 든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한 일이란 누워서 김금희의 연작 소설집 『크리스마스 타일』을 겨우 읽어낸 일뿐이다. 크리스마스라는 시간적 배경을 두고 아주 작은 사소한 인연들로 모인 인물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담은 소설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남을 반복하는 일. 영영 보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며 결별했지만 일 때문에 지금 먹고사는 일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서 불면의 밤에 건, 조, 하, 게 이메일을 쓰며 만남을 갈구하는 일. 


김금희가 그려내는 소설 속 인물들은 다들 한 번씩은 망가지고 훼손되지만 끝내 자신을 폐기처분하지는 않는 강철 같은 체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힘이 아주 없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일을 할 때는 상식 있는 사회인인 메소드급 연기를 하다가도 삐딱하고 자기 비하가 심한 본캐가 나와 상대가 당황하기도 전에 나부터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반만 순수한 인물들. 『크리스마스 타일』에는 주말 내내 이불 밖은 위험해를 중얼거리며 밥을 시킬 기운도 없어서 냉장고에 있는 음식 아무거나를 꺼내서 먹을 것 같은 그러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씩씩하게 일어나 세수를 하는 당신과 나들이 등장한다. 


일하다가 병을 얻고 병명은 숨긴 채 수술을 받고 다시 복직하는 사람. 대학 내내 함께 했지만 나의 원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사람. 의욕을 내기 위해 중국 유학을 가서 관계가 파탄 나는 걸 보는 사람. 어린 시절 오해와 몰이해로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 방송국 막내 작가로 온갖 굴욕적인 일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 반려견을 잃고 도저히 일상을 살아갈 힘이 없어 개가 있는 지인들을 연락해 심지어 첫 직장 사수와도 만나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사람. 


처음에는 자신의 모서리를 드러내다가 끝내는 그 모서리를 자신 쪽으로 돌리며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기로 한다. 일이 잘 안될 때도 잘 될 때도(잘 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지만) 있다는 걸 아는데도 일이 엎어지면 나를 탓하다가 결국에는 마음에 내상까지 입고 만다. 후회를 반복하다가 인류애를 잃어버리고 자기애마저도 쓸쓸히 떠나보낸다. 김금희 소설에서 일상은 타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쉬워 보이다가도 나를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면 소설 속 인물들이 망치는 것보다 더 심한 강도로 관계를 끝장내고 마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들이 펼쳐지는 혼란극이다. 


크리스마스가 배경이니까 좌중우돌의 연속인 사건이 펼쳐지고 마지막은 홀리하고 해피한 결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기대감은 충족시켜준다. 눈이 내리고 산책을 하고 짝사랑을 끝내겠다는 다짐을 하는 마지막의 장면들. 대단한 결심 뒤에 오는 해내지 못할 거라는 한숨이 따라오겠지만 일단은 오늘은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생긴다. 얼마나 웃을 일이 없으면 일부러 웃음을 유발하는 영상을 찾아보며 이건 웃긴 거니까 웃어야 해 하며 나를 다독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하지는 않는지.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타일』을 순서는 상관없고 제목이 마음에 든다거나 끌린다거나 하는 단편 하나를 읽기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서로의 망가짐과 깨짐을 방치하지 않고 이상한 유머를 곁들인 치유책을 내놓으며 내일을 기약하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월요일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는 행성에 떨어져 있지만 부서지지도 어지럽지도 않은 평안한 웜홀 속으로 들어가 금요일 밤이라는 시간으로 『크리스마스 타일』은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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