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의 일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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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서련의 장편소설 『마르타의 일』은 문제작이다. 사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연년생으로 자란 자매의 이야기. 평범한 서사이지만 박서련은 독특한 결말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상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2019년을 살아가는 청년의 일상을 긴박하게 펼쳐놓는 솜씨는 훌륭했다. 임용 고시를 앞둔 주인공 수아는 자신의 동생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는다. 병원으로 달려간 수아는 동생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경찰이라는 사람에게 동생인 경아의 핸드폰을 받는다. 그때부터 경아의 죽음에 둘러싼 의혹과 맞선다.

사이가 좋기도 했다가 나쁘기도 한 자매였다. 경아는 얼굴이 예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언니 수아는 공부를 잘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두 자매에게는 선망의 눈길이 따라다녔다. 경아는 자신의 이름이 운이 없다는 이유로 리아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꿨지만 운은 따라주지 않았고 결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정황상 자살이 유력하다고 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수아는 경아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경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수아는 예감에 사로잡혀 경아의 죽음은 자살이 아님을 직감했고 경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SNS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자 확신으로 굳어졌다.

수아는 그때부터 경아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파헤친다. 익명으로 불리는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그가 전해주는 정보를 취합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나간다. 경아의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면서도 수아는 임용 고시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간다. 『마르타의 일』의 일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이 지점이다. 초수 합격을 하기 위해 스터디를 하고 면접 준비를 하는 수아. 시간을 분 단위로 끊어서 공부에 매진하는 수아. 그러면서도 경아가 살아 있을 때 처했던 상황을 파악해 나간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 『마르타의 일』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예수가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함께 일 할 것을 청하자 예수가 마리아의 편을 든다. 언니 마르타는 예수의 나무람을 들어야 했다. 언니 마르타는 일을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다. 수아는 익명과 경아의 일을 해결하면서 그에게서 마르타에 관련된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는 마르타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그 세계에서 마리아의 일이야말로 지켜주고 존중받아야 함을 마르타에게 알려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2019년을 살아가는 마르타들이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알려주는 소설이다, 『마르타의 일』은. 마르타가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 역시 나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일인 것이다. 『마르타의 일』의 장르를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임용 고시 스릴러? 초수에 합격하는 법을 알려주는 비결서?

『마르타의 일』은 인간 본성의 선함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며 인간애를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냉혹한 시선으로 죄를 지은 자는 용서가 아닌 당연하게 벌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용서란 개나 줘버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용서는 지옥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받아 보시지 하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을 경쟁 상대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2019년의 정글에 내던져진 고학력 고스펙 엘리트가 펼치는 잔혹한 복수극. 당신과 나의 일이란 루틴을 지키고 면접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

장황하고 현학적인 서술 없이도 인물의 감정을 풍부하게 묘사하는 박서련의 솜씨는 훌륭하다. 뻔한 이야기가 되기라는 예감 속에서도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건 세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능력의 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는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오히려 악인이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마르타의 일』에서 취해야 할 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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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마르틴 베크 시리즈 6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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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데 일단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렇다는 소리이다. 이후에 7, 8, 9, 10권이 남아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 여섯 번째 이야기는 내가 읽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최고의 소설로 꼽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건은 단순하다. 사건이 벌어졌고 범인을 잡으려는 수사가 느리게 진행된다. 마르틴 베크의 시리즈 특징 중에 하나는 이야기의 진행이 느리다는 것이다.

느리고 답답해서 도대체 언제 사건이 해결되는 거야라고 물어볼 때쯤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이다. 느리지만 복잡하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단서를 하나씩 제공하는 식이다. 그것에서 재미를 찾게 되면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최고의 경찰 소설이자 추리 소설이 되는 셈이다.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한 번 손에 잡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는 1970년대의 스웨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복지 국가라는 이면 뒤에 숨겨진 어두운 스웨덴의 현실로 말이다. 물가는 높아지고 자본주의 사업가들 몇에 의해 돈이 움직이는 암울한 시절. 경제는 성장했지만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각종 잔혹 범죄가 연이어 일어나고 좌우 대립의 이념 갈등이 심화된 곳. 초저녁 한 호텔 식당에서 부유한 사업가 빅토르 팔름그렌이 총에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

총에 맞은 팔름그렌은 바로 죽지 않았다. 말뫼의 경찰들은 목격자들 증언을 듣기 위해 호텔로 향한다. 식당 직원, 팔름그렌 주변에 있던 사람들, 손님들 다수의 목격자를 확보했지만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에 띄는 특징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이 배를 탔다는 첩보를 받아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우둔한 순경 둘이 포타티스모스를 대낮에 즐기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 소설은 제목이 다 했다. 소설의 전반부를 읽으면 제목의 뜻을 알 수 있다. 읽고 있으면 마이 셰발, 페르 발뢰가 경찰을 향한 풍자를 세련되고 노련하게 했음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팔름그렌이 국가 경제의 그것도 지하 경제에서 특출나게 활동했음을 상관에게 보고받은 마르틴 베크가 빠르게 범인 검거를 하기 위해 말뫼로 간다. 그곳에서도 수사는 진척이 없다. 베크는 상황을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하지만 그의 노련한 지휘 아래 범인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난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단 한 발로 팔름그렌을 죽인 자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소설은 씁쓸한 결말로 향해 간다.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에 짓눌린 한 개인의 슬픈 얼굴을 드러내면서 정의의 정의를 묻는다. 사건의 진상을 따라가는 유희를 선사하면서 묵직한 한 방으로 주제를 압축 시킨다. 베크와 그의 동료들이 하는 수사를 따라가다보면 경찰이라는 조직의 이중성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 또한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소설을 통해 표현하려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박하고 스릴 넘치고 긴장이 가득한 구성과 표현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시리즈 중 유머와 풍자가 제일인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앞의 다섯 권을 읽지 않아도 이 소설로 먼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시작해도 좋다. 그렇게 되면 열렬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신봉자가 되어 시리즈 전체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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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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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中에서)

우울한 기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이다, 11월은. 날은 조금씩 추워지고 한 해가 이제 저물어 간다는 기분에 그리고 어떤 상실의 기억 때문에. 문득 비어 있는 시간 속으로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온다. 음악을 찾아 듣고 책을 펼쳐서 읽는다. 지금의 나의 기분을 설명해 주는 글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기운을 차려야지. 걱정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은 없고 그저 마음의 온도만 낮아질 뿐이다. 지식보다는 지혜로 자신의 삶을 꾸려간 이의 글이라면 읽으면서도 힘이 난다.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가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을 읽으며 11월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원고가 발견되어 따뜻한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 컴퓨터를 믿지 못해 종이에 자신의 글을 프린트해 두었다고 한다. 평생 소설의 길을 걸어온 그이답게 글은 정갈하고 읽는 재미가 넘쳤다. 어린 시절 신여성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으로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꽃 피는 5월 졸업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시절에 6.25가 터졌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학을 하는 국어 선생님이 계셔서 그때 문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해방이 되고 우리말로 읽는 고전 문학이 좋아서 국문과에 지원했지만 전쟁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역사의 굴곡 앞에서 꿈이 좌절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식구들이 잠잘 때 몰래 쓰던 소설 『나목』으로 등단했다. 이런 박완서 소설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매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늦게 작가가 되어 지면을 얻기가 힘들었지만 부지런함과 근성으로 인간과 삶에 대한 유머와 비판을 잃지 않는 소설을 써냈다.

『세상에 예쁜 것』 안에는 그리운 시절에 대한 회고와 문학을 해야 했던 이유, 먼저 떠나간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편지가 들어 있다. 초등학생이 보내온 질문지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고 토지문학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작가 박경리에 대한 다정한 기억을 풀어 놓는다. 마당에 피어 있는 꽃, 그 마당으로 놀러 오는 고양이. 가장 힘들었을 1988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한 사연을 읽으면 지금의 쓸쓸함과 불안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원래 힘들다고 느끼면 그 감정에 함몰되어 나만 제일 힘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소설가 박완서는 글로써 지혜를 나누어 주고 소설로써 문학의 열정을 타오르게 한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사랑과 소설, 문학의 향기를 남겨 두어 따뜻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기 남아 그가 두고 간 문학을 오래도록 읽을 것이다. 버티기가 힘겨울 때.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주저앉고 싶을 때. 박완서의 문학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준다. 문학의 이유를 『세상에 예쁜 것』을 통해 알아간다. 그의 말대로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소유물은 없다. 단지 사랑의 기억을 챙길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기억을 가져가고 사랑했던 기억은 놓아두고 간다. 남아있는 자들이 그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우리가 이 생에서 인연을 맺어 한 시절을 함께한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추억은 남은 내가 간직하겠다.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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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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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나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까. 가까운 이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거나 혼자 삭히거나 그럴까. 대체로 그 고민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 놓고 보면 굉장히 사소한 일일 때가 많다. 섣불리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 말보다는 생각을 오래 해 보는 것. 내가 대충이나마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소설을 읽는 것.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펼쳐 놓는 인간사의 시시함이나 쩨쩨함이 소설 안에는 내가 표현하지 못한 감정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2019년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고민, 걱정, 불안이 담겨 있다. 그것에 함몰되지 않도록 건강하게 버티는 인물의 씩씩함까지도. 여덟 편의 소설 안에는 사소하지만 지금은 그게 제일 중요해서 남에게는 말하지는 못하지만 어떻게든 고민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에게 오랜만에 연락해 오는 직장 동료의 안일하고 무심한 행동. 인스타 중독 회장에게 찍혀서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회사원. 한때 짝사랑했던 동료와 산뜻하게 밤을 보내볼까 하는 궁리를 하는 자뻑에 빠진 남자. 전기세가 밀렸는데 덜컥 강아지를 사 오는 록 가수.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며 자신의 삶이 이제 좀 편해졌으면 하는 새댁. 중고 신입으로 첫 정규직 직장에 첫 출근하며 하루 만천 원을 써야 하는데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 회사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을 오로라 엽서를 통해 발견하며 우는 직장인. 장류진 소설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현실의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은 호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자신만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구는 이에게 산뜻한 복수를 해주는 활달한 인물이 『일의 기쁨과 슬픔』에 있다.

치사한 고민에 빠진 소설 속 화자를 대하는 장류진의 방식은 신선하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준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을 비꼬지 않는다. 그가 몰랐다면 가르쳐 주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겠냐며 다소 능청스럽게 상황을 돌파한다. 결말을 비관적으로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장류진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조롱하거나 우울하게 그리지 않는다. 결혼식에 오지도 않을 거면서 밥만 얻어먹은 동료의 미래를 걱정해 준다. 월급 님이 입장했다는 문자를 받고 비행기 표를 결제한다. 첫 정규직 직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다.

일상의 우울을 산뜻하게 날릴 수 있는 힘이 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을 보여주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의 기쁨과 슬픔』 속 인물의 고민을 통해 나를 투영해 본다. 그들이 가진 고민의 크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대체 누가 월급을 포인트로 주는데 씩씩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집이 성매매 하는 곳으로 알려져 새벽마다 남자들이 누르는 벨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단 말인가. 이력서 넣은 곳마다 서류 심사에서 탈락해 백한 번째 프러포즈도 아니고 백한 번째 이력서를 쓰면서 겪은 수많은 실망과 기대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실린 소설을 통해 장류진은 괜찮다고 사는 게 그렇게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열 명도 되지 않은 직장 동료들 틈에서 그들이 내는 한숨 소리까지도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내일을 기대하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꿈이 없어서가 아닌 꿈이 있어서 슬픈 지금, 여기. 내가 가진 꿈의 크기를 통장 잔고와 똑같이 일하는데도 차이가 나는 연봉의 현실 앞에서 이리 재고 저리 재봐야 할 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일상과 희망을 조율하는지 알고 싶을 때.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으면 아주 큰 힘은 아닌데 미세한 기운이 솟아올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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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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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보다 여행기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짐을 싸는 일부터 예산을 짜고 여행 경로를 탐색하는 그 모든 일이 내겐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거기보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에는 게으름이 한몫한다. 그곳만의 공기와 바람의 질감을 오로지 상상으로만 느낀다. 그래도 떠나보라고. 분명 다른 감성이 있다고 적힌 여행기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떠나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가 보다. 10년짜리 여권을 만들어 놓고 스탬프를 한 번도 찍어 보지 못하고 유효 기간이 만료되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면 나는 그것밖에는 할 말이 없다. 유효 기간이 지난 여권의 빈 페이지에 대한.

이다혜의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는 인상적인 여행기로 남았다. 여행 경로에 대한 이야기보다 여행을 떠나고 준비하는 자의 설렘과 여행지로 떠날 때의 요령 사항이 감각적으로 적혀 있다. 월급 생활자로서 길게는 떠나지 못하지만 금요일 연차를 써서 떠나는 짧은 여행에서 삶의 고단함과 피로감을 조금씩 엿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몸의 신호에 맞춰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방법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 가족 여행 시 주의 사항을 알려주기도 한다.

대부분 혼자 여행을 떠나지만 어떤 해에는 아는 이들과 떠나기도 했단다. 혼자여서 혼자가 아니어서 얻게 되는 여행의 낭만을 읽는 게 좋았다. 자유여행이냐 패키지여행이냐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각자 장점이 있으니 알아서 잘 골라가면 된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마음 밖에는 없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당장 떠나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자기의 내면 안으로 끌고 들어온 자의 기록은 여기가 아닌 그곳의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행을 떠나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비상 약품으로 읽을 수 있는 책.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에서 솔직하고 자유로운 여행 낭만자의 지나온 시간을 만난다. 혼자 떠나면 무섭지 않냐고 하지만 이다혜는 혼자 떠날 수 있어서 당황했던 경험의 순간도 '여행의 재미'라고 말한다. 같은 도시를 반복해서 가지만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여행의 풍경. 매일 마주쳐야 하는 일상이 지겹다고 느껴져서 떠났지만 놔두고 온 그곳의 시간이란 소중한 것임을 여행은 깨닫게 해준다.

오늘은 청소를 하고 커튼을 걷어 놓았다. 노을이 지는 걸 보기 위해서. 파란 하늘은 아니었지만 해가 얼굴을 비쳤고 공기는 시원했다. 내일이 월요일라고 믿기 싫지만 남은 일요일 오후가 조금씩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비행기를 타고 기차에 몸을 싣는 자의 기록이 있어 여기가 아닌 낯선 장소를 동경해 볼 수 있었다. 여행기를 읽으며 떠나고 싶은 마음이 무거워질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이다. 팡팡 터지는 순간 떠나는 거다.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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