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박서련 지음, 최산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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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여기 있을게요. 여기까지 물 차기 전에는 구조되겠죠."


"그렇겠죠?"


(박서련,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中에서)



금요일 밤에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원래는 퇴근하자마자 벨 소리를 무음으로 돌려놓는데 일이 있어 깜빡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그 전화를 받기 위해 건망증 세포가 활약했나 보다. 유일하게 전에 일했던 곳에서 알게 된 사람 중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듣고 이해 못한척하고 싶어서 일부러 통화 소리를 줄여 놓은 탓에 귀를 바짝 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빨리 전화기 옆에 달린 볼륨 버튼을 누르면 될 텐데 순발력이 부족한 탓에 그마저도 못했다.


내 블로그를 보고 있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그렇구나. 글을 쓰고 있다는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구나. 그래놓고 잊어버리고 주절주절 내 일상을 쓰고 있었구나. 책 리뷰를 틈틈이 쓰면서도 나를 아는 누군가 혹은 모르는 누군가 관심 있게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애가 심한 편인 나는 그저 기록 보관용으로 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문법에 맞든 안 맞든 글쓰기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마음산책에서 나온 짧은 소설 시리즈 중 박서련의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서점 사이트로 들어갔다. 예스24는 구매 리뷰를 쓰면 적립금을 준다. 짧은 평은 50원, 긴 평은 300원. 리뷰를 쓰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350원 벌어야지 하면서 쓴다. 차곡차곡 모아서 5,000원이 되면 환전을 한다. 작품 설명을 보다가 소설가 박서련이 홍보용으로 출연한 영상을 보았다. 에고 서칭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본다고.


독자들의 후기를 꼼꼼히 본다는 말에 얼른 내 블로그로 돌아와서 박서련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 5건. 뭐야. 나 박서련 좋아한 거야? 허접하고 제멋대로인 리뷰를 봤을까 싶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설마 이런 것까지 봤을까 싶은 독자 후기도 읽었다고 하니 봤겠지. 보면 어때. 전체 공개로 해 놓은 글을. 혼자만 보고 싶었으면 비공개로 해놔야지. 나도 참 이중적이다. 써 놓고 읽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읽으면서 빡쳤으면 어쩌지 하는 소심한 마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이런 분석 밖에 못해? 책 이야기는 없고 순전히 지 이야기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전 한국문학을 애정 하는 독자랍니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의 첫 문장. '그만둘 거야. 진심. 하루 이틀 하는 생각도 아니지만 이번엔 진짜로.' 뭐야, 나 지금 사찰당한 거야. 홀리듯 읽어 버렸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가 나왔을 때 고민했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는 화가와 콜라보 한 작품이다. 소설과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이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종이책을 사야 컬러로 된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 산 이유는 완전히 누워서 보고 싶어서이다. 옆으로 누워서 따뜻한 색온도를 즐기며 오늘 하루도 잘 참아냈네 다독이면서,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었다. 첫 이야기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에서 주인공은 만화 카페에서 진짜로 때려치울 각오로 일하고 있다. 오늘은 그만둔다고 말해야지 하면서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다. 서비스직의 비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비가 오고 카페에 물이 차면서 손님과 주인공은 고립된다.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냥 남아 있기로 한다. 나가봐야 갈 데가 없다. 카페니까 먹을 것도 넉넉하겠다. 물에 잠기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죽으려고 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그만두려고 해도 자본주의 미소 날리며 일을 하는 반어의 상황을 그려낸다. 그러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는 「제자리」였다. 박서련은 나를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내가 왜 탈출해야 할까 하는 이유를 나도 정확히 몰랐다. 「제자리」는 나 대신 탈출의 이유를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같은 팀 장이고 주임이고 대리고, 다들 말을 윽박지르듯 해서 지수 씨는 매번 약간 울듯한 심정으로 대화에 임했는데, 종종 남자 직원들은 여자 직원들이 울어버릴까 봐 무슨 말을 못 하겠다며 엄살을 피웠다.' 출산휴가를 간 심 대리의 책상을 옮겨 놓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 지수 씨.


좋은 소설이란 무얼까를 생각하다가 김중혁의 산문집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그렇다. 나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독서를 했다.)에서 답을 찾았다. 주인공의 내일이 궁금해지는 소설. 이야기는 끝나도 주인공의 내일과 모레가 궁금해지면 좋은 이야기가 된다는 답. 「제자리」는 그런 점에서 위로가 되는 좋은 소설이다. 심 대리와 지수 씨의 내일이 평탄하지는 않겠지만 응원한다. 윽박지르듯 말하는 사람들이 득실대는 그곳에서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종영이 된 《무한도전》의 짤을 경전 읽듯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없는 게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절을 예상하기나 한 듯 그들의 말, 자막은 어느 상황에 갖다 놔도 꼭 들어맞는다. 그중에 하하의 짤. '정신 차려 각박한 이 세상 속에서'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으며 떠올라서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는데 웃음이 났다. 각박한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놓고 싶은 소설 속 세계 때문에. 놓친 정신줄을 들고 웃고 있는 나를 만난다.


다시 금요일 밤의 통화로 돌아오자면 내가 어디에서 일해요라고 하니까 단박에 그곳의 빡셈을 알아주었다. 우리를 일으켜 주는 건 말 한마디와 이야기 한 편에 담긴 공감이다.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해 주고 말이 되게 설명해 주는 일. 전자책으로 읽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는 멍청하고 무력한 나를 일어나게 해주었다. 비록 예쁜 색감의 그림을 즐기지는 못 했지만. 내가 약한 게 아니라 그들은 약한 나를 더 약하게 만드는 이상한 인류라고 말해준다. 누구든 코믹 헤븐에 들어가는 순간 뭉친 어깨가 풀린다. 다정과 공감과 이해가 판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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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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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2022년 새해 첫날 한 일은, 두둥. 전달 실적에 따라 멤버십 등급이 올라간 걸 확인하고 환호. 새로 주는 쿠폰을 다운받아서 물건을 사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걸 샀냐면 그것도 아니고 진짜 필요한 거다. 나랑드 사이다, 이디야 오리지널 아메리카노 150T·오리진 브라질 180T, 아토베리어 365 크림, 바디피트 한결 슈퍼롱 40개. 원래는 한 품목만 사려고 쇼핑앱에 접속했다. 다들 그렇지요?


그게 될 리가 있나. 새해맞이, 감사맞이, 호랑이해 맞이, 온갖 맞이의 기념으로 싸게 판다니까, 쌀 때 사 놓고 계속 쓰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얼마 이상이면 쿠폰이 된다니까, 통신사 할인도 된다니까. 샀다는. 그러고 정신 차리고 책을 읽었다. 누워서 하는 일이라고는 쇼핑과 책 읽기니까. 쇼핑했으니까 책을 읽어야지의 수순. 방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버렸나. 소비 지옥에 빠진 나를 친절한 얼굴로 꺼내준다. 하라다 히카의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그런 책이다.


할 말이 있는 게 위에 적은 품목을 봐서 알겠지만 생필품이다, 사치품이 아닌. 물론 보디로션 큰 거 한 통 사서 몸과 얼굴을 바르면 되지 않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겨울 보습에 짱 좋다는 점원의 말을 믿고 산 크림은 훌륭했다. 한 번 그걸 썼으니 내 얼굴도 크림의 효능을 기억하고 있을 테지. 몸의 주인인 나는 발라서 지친 얼굴을 달래줘야지. 커피는 무슨. 보리차 끓여서 이건 커피다, 쓰다 생각하고 먹어라 하면 먹겠지만. 슬프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단순히 절약해, 지금부터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해, 강압하는 책이 아니다. 삼대에 걸친 세 여성과 주변 인물들의 절약 일상을 보여준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은 미호,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학자금을 모으고 싶은 마호, 일흔이 넘었지만 구직 활동을 시작한 고토코, 갑자기 병에 걸리자 현재 삶의 위치가 불안한 도모코, 프리터로 돈이 모이면 여행을 떠나는 야스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왜 돈을 모을까. 원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빌린 집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울 수가 없다. 남편 혼자 돈을 벌기 때문에 아이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연금만으로는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면 힘든 일도 참고할 수 있다. 그들이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함을 느낀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과감한 투자를 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근로 소득에 기대야 한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소개 글에서처럼 일상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한 번 잡으면 나의 현실을 사찰한 듯한 현실감에 손을 놓을 수 없다.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게 낙인 미호. 은행 금리를 따지며 남아 있는 돈을 헐어 쓰지 않도록 노력하는 고토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저하는 야스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3천 엔이라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달려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행복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중에야 알려준다.


속보로 뜨는 소비자 물가 지수 상승률의 숫자를 보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마트에 가서야 깨닫는다. 딸기 한 판에 이만 원이 넘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몸집이 커지는 세포를 재치있게 보여주었다. 연초가 되면 유미가 결심하고 작정하면 그에 따라 커지는 세포들. 그중에 자린고비 세포가 커지는 걸 보고 환호했다. 이를 어쩌냐. 커진 세포들은 3일이 되면 다시 원래의 크기대로 돌아온다. 작심삼일의 풍자.


고토코 할머니는 가계부를 쓰라고 말해준다. 쓴 돈을 파악하는 일만으로도 절약이 된다고. 그리하여 팔랑귀인 나는 버거킹에서 만 원 이상 사면 주는 달력에 오늘 쓴 돈을 적기로 했다. 아뿔싸. 달력의 칸이 모자라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책상에 앉았다. 똑똑한 나의 컴퓨터는 지난번 내가 방문한 사이트를 기억해 내고 화면에 띄워주었다. 각종 서점사들. 알라딘, 뭔데. 왜 또 유리컵을 굿즈로 주는 건데. 내열 유리컵 받으려고 9 권의 책을 지른 지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엊그젠데.


어린 왕자 유리컵은 특별하니까. 소혹성 B612호에서 혼자 사는 그 애는. 근데 왕자님은 좋겠다, 별 하나가 자기 소유인 거 아니야. 컵을 사면 책을 준다기에 굿즈의 노예는 오후에 종이책 4권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열 유리컵 사고 싶은데. 컵만 사면 좀 그러니까. 이왕이면 책도 사고 컵도 받을 수 있는. 여기까지, 새해가 되자 카카오뱅크 저금통까지 헐어 물건을 산 자의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진짜 왜 그랬냐면요.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절약해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행복해야겠다 낙관적인 올해의 바람이 생기게 되었거든요.


종이책 5만 원에만 해당하는 줄 알았는데 전자책 3만 원도 유리컵 굿즈를 준다는 거 방금 알았네요. 알라딘, 내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러 온 나의 구원자. 그래서 얼마면 돼? (애처롭게 쳐다보며) 3만 원이요.


정말이었군요. 할머니. 할머니 말이 맞았어요. 3천엔(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31,020원)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 어린 왕자님 유리컵에는 시원한 보리차 따르고요. 고흐의 그림이 그려진 컵에 아침에 산 이디야 커피 타서 마시면 성공한 사람의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커피 타서 책상에 앉으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건 아니고 내가 쓰고도 우와 내가 이걸 쓴 거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놀라운 글을 쓸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다음 리뷰 글 사진에는 보일 듯 말 듯 책 옆에 유리컵 두 개가 찍혀 있을 것 같다는 예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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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정화 지음, 최환욱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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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것보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높아지고 감정은 쉽게 상했다. 여름 오후에 놔둔 떡처럼.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좀 있다 먹어야지 해놓고 잊어버린 떡. 결국엔 먹지 못하고 버렸다.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내뱉는 말 때문에 마음이 자주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화장실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변명 대신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다. 자신을 이해 달라는 듯 쏟아 놓는 말 앞에서 할 말을 하지 못했다. 집에 와서 등신 같다고 되뇔 뿐이었다.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야 하는데 그냥 이제는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선을 그었다. 일정 거리가 필요해. 거리 두기를 지키자. 최정화의 짧은 소설을 모은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을 읽으며 그간의 상황에 대해 크게 억울해 할 것도 없다 싶었다.


상대 역시 나의 어떤 모습에 답답해하고 싫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대체로 나는 억울하고 피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영화에서처럼 슝 날아가 그 상황을 멀리 떨어져 지켜봐보자. 두 사람이 있고 대화를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쪽은 듣고 있다. 듣고만 있던 이가 결국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감정을 토로한다. 그러고? 달라진 건 없다.


나는 임우현에게 말한다. "우린 정말 다른데도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임우현이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 둘 중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었을 겁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의 배려와 희생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낭비라고 느껴진다. 음, 그러니까 누군가 닭을 싫어하면서도 자기가 싫어하는 '닭곰탕'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임우현인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닭곰탕은 역시 맛있어, 이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고.

(최정화,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세 번의 겨울」中에서)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 속 소설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서사를 다룬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남편의 다른 모습을 보고 재혼한 아내의 성격이 일순간 기묘해 보인다. 늘 예의 바른 사람이라 여겨왔던 이가 감내했을 슬픔을 마주한다. 우연히 만난 지인이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깨닫는다. 나, 저 사람에게 이상한 짓을 했을지도 몰라. 잠든 아내에게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이웃이 내 집에 들어와 있는 걸 본다.


죽음 보다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건 건강한 일일까. 살아가는 건 지치고 막막한 일이 되니까 오히려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의문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은 삶이라는 건 피곤하고 역겨운 일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소설 곳곳에 숨겨 놓았다. 행복하고 즐거워 죽겠다는 이야기는 읽기가 힘들다. 대신 텔레비전을 틀어 놓는다. 그곳에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게임하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지. 대화를 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가야지.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 가야지. 뭣 같은 소리. 내 마음이 꼬인 탓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변명을 듣고 있을 때 의자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든다. 최정화는 현실에서 지겹도록 경험해 봤을 오해로 빚어진 난감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현실에서는 그러겠지. 오해를 하고 있는 네가 잘못이라고.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에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너의 분노는 충분히 납득될 수 있다고 박력있게 말해준다.


「K씨가 도망간다」를 읽고 무릎을 쳤다. 나의 화남 뒤에 너의 화남도 있다. 우리는 서로 잘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너무 억울해할 것 없다. 두 사람이 있다. 관계가 원만하다고 해보자. 가짜다. 소설 속 문장처럼 한 사람의 희생으로서 이루어지는 거다. 원만한 관계란 그렇게 믿고 싶은 환상이다. 타인끼리는 오해가 정상이고 이해는 희생의 결과이다. 이해하기 싫어서 오해하는 세상. 이해보다는 오해가 나를 덜 힘들게 하니까 그러고 살고 있는 세상. 지치는 것도 지친다. 『오해가 없는 완벽한 세상』은 이상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거, 너도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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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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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세대주 오영선』을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의 제목과 작가 이름을 적다가 깨달았다. 주인공 영선의 중간 이름의 모음을 옆으로 돌리면 양선이 된다는 것을. 소설 속 영선과 현실의 양선은 문예 창작을 전공했다. 집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 있었고 어찌어찌 집을 구했지만 그닥 내일이 희망적이지는 않다. 최양선은 오영선을 통해 꼭 간절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에 자신과 비슷한 이름을 부여하고 세상에 내보냈다. 가라, 영선!


이 미친 부동산 열풍. 자고 나면 수천씩 올라가는 집값. 숨 쉬는 비용 빼고 모은 돈 1억이 우스워지는 세상. 집이 있는데도 집을 얻기 위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얼굴. 술 대신 대출을 권하는 사회. 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썼던 소설가는 집을 구하다 지친 고단한 현실을 사는 어른들을 만난다. 『세대주 오영선』은 오늘을 사는 이라면 꼭 읽어야할 우리 시대의 필독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현실에 뿌리를 둔 소설이다. 내가 난감해 하는 장르가 있다면 SF인데 어쩐지 나는 환상과 우주와 몇 백 년 후의 미래 사회에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다. 지금 힘들어도 버티면 밝은 미래가 있을 거야 어쩌고 하는 개소리로 나를 달래는데 당장 1분 후도 장담하지 못하면서 자신 있게 말하는 그 입을 한 대 치고 싶다. 우선 지금, 당장, 오늘이다. 『세대주 오영선』은 지금과 당장과 오늘을 그린다.


89년생. 수도권의 사년제 문예 창작학과 졸업. 한 달에 150만 원 받는 사무직 아르바이트생.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여동생 한 명과 전세 1억 2천만 원 집에 거주. 그마저도 곧 있으면 나와야 하는. 오영선의 간단 이력이다. 감히 연민을 느끼지 말라. 금수저들 빼면 우리 사는 모습 이렇지 않을까.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고생 배틀에 참여 할까 말까 할 프로필 정도이다.


그저 열심히 살려고 애쓰면서 꿈을 놓지 않으려는 평범한 내 주변의 친구. 오영선. 엄마가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청약통장 하나로 영선의 심심한 하루가 스펙터클하게 바뀐다. 청약통장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어른이, 있겠지, 있어, 토론에 나와서 무식함을 드러내는, 어른. 영선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은행에 가서야 알게 된다. 엄마가 아빠 빚을 갚으면서도 깨지 않고 남겨둔 청약 통장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다. 『세대주 오영선』은 누구라도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나 지금 독서하고 있다아, 하는. 그니까 건들지 마. 집 위에 동그라미, 그 안에 쓰인 숫자가 우리 삶을 어떻게 쥐고 흔드는지 탄식하면서. 한숨은 기본.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영선이 어떤 선택을 할까.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답게 문장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설을 끌고 나간다. 잠시도 딴생각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제의 피로와 내일의 걱정을 잊게 만든다. 영선, 경민, 휴. 나이대가 다른 세 여성이 집 때문에 겪는 상황이 기막히고 서글프다. 나의 단점 중에 하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남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세대주 오영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저 유명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있지 않느냐고 알려준다. 내가 좀 유명한 사람이면 최양선의 『세대주 오영선』을 읽으라고 하고 그러면 갑자기 판매량이 늘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우리 영선이가 알려지고 따라서 양선도. 한숨.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라 죄송. 『세대주 오영선』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에 작가의 다른 책을 사서 읽으며 다음 작품에 힘이 되는 것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옆을 걷고 있는 영선에게 바닐라 라테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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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1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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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소설 보다 : 가을 2021』을 펼쳐 들었다. 오늘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야 하는 생각과 함께. 토요일은 내내 자고 그나마 일요일이 되어야 책을 펼칠 힘이 난다, 요즘에는. 숫자 강박이 있는 나로서는 한 달에 열다섯 권 정도를 읽자는 다짐에 그걸 지키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지금은. 포기했다. 한 달에 다섯 권 읽으면 많이 읽는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다섯 권 밖에 읽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에 위축이 된다. 그게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아서.


『소설 보다 : 가을 2021』에 실린 세 편의 소설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했다. 순서대로 읽긴 싫었다. 경험상 보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보단 후루룩 넘기다가 어떤 문장이 눈에 들어오면 그 소설부터 읽으면 된다. 그러면 실패가 없다. 내 기분과 내 취향이 맞지 않는 소설이 간혹 있어서 인내하듯 읽었다, 몇 편은. 환한 낮의 독서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위로받기 위한 소설이 필요하다.


우주가 도왔을까,는 아니고. 세 편의 소설 모두 마음에 들었다. 너덜거리는 정신을 구해주었다.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손뼉을 치며 말해주는 것 같은 세 편의 소설이었다.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는 소설도 좋았지만 평론가와 작가가 대담을 나누는 부분이 더 좋았다. 권혜영의 말. 본인은 상근직 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글은커녕 책을 읽을 힘도 쓰지 못한다고. 등단기를 읽는 걸 좋아한다.


일하고 퇴근하고 와서 글을 써 등단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대단하고 부럽다. 씁쓸하기도 하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는데 대체 너는 뭘 하고 있냐는 질책을 받는 것 같아서. 이런 감정 느낄 필요도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느끼는 자기혐오의 마음. 권혜영은 그런 마음을 엷게 해 주었다.


나는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은 자야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도는 사람인데. 다섯 시간 자도 괜찮다. 미라클 모닝, 이러니까. 겨우 '워라밸'을 맞춰서 저녁에 여유가 좀 생길라치면 취미를 만들래요.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래요. 아니, 저녁 먹고 늘어지게 있다가 그냥 씻고 자면 안 되나.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데.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의 이런 지점들이 숨 가쁘게 다가오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소설 보다 : 가을 2021』中에서, 권혜영의 말)


권혜영의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 없다」는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나'가 화재 경보 소리를 들으면서 경험하는 대략 난감한 상황을 그린다. 통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돈을 위해 뼈가 녹도록 일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불이 난 건지 잘못 울린 건지 모를 소리에 계단을 향해 내려가면서도 일층에 도착해 다시 올라가면 몇 시간을 잘 수 있는지 생각한다. 지독한 현실이다.


「시트론 호러」에서 구소현은 귀여운 귀신을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귀신. 도서관과 서점을 부유하면서 책을 읽는 누군가 옆으로 간다. 귀신 공선은 독서 메이트를 찾아 방황하다가 효주를 발견한다. 효주는 한 번 잡은 책은 재미가 있든 없든 끝까지 보는 성격이다. 나 같다. 어느 날부터 효주는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고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공선은 착잡함을 감출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쓰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소설의 원형이다, 「시트론 호러」는.


이주란을 왜 좋아할까를 생각한다. 「위해」를 읽다 보니 알겠더라. 이주란은 어려운 마음을 설명하기 힘든 기분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 가난의 마음과 가난 때문에 힘든 기분. 도움을 받고 싶지만 받으면 안 될 것 같기에 망설이는 하루들. 친구 집에 찾아갔다가 어렵게 길을 찾아서 돌아오는 하루. 옆집에 사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하루. 위로받고 싶어서 타인을 먼저 위로하는 하루. 「위해」에는 그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가을 지나 겨울. 메일로 『소설보다 겨울 : 2021』이 나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번 주는 기쁘고 슬펐다가 다시 기뻤다. 감정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실체도 없는 감정과 기분 때문에 나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책을 많이 읽고 꾸준히 글을 쓰는 일의 생각. 위해의 마음은 그걸로 된다. 맛있는 거 먹고 청소하고 책 잠깐 읽다가 낮잠을 길게 자는 하루. 내가 기대하는 건 그런 하루의 축적이다.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인간이라서 좋은 시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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