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박서련 지음, 최산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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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여기 있을게요. 여기까지 물 차기 전에는 구조되겠죠."


"그렇겠죠?"


(박서련,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中에서)



금요일 밤에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원래는 퇴근하자마자 벨 소리를 무음으로 돌려놓는데 일이 있어 깜빡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그 전화를 받기 위해 건망증 세포가 활약했나 보다. 유일하게 전에 일했던 곳에서 알게 된 사람 중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듣고 이해 못한척하고 싶어서 일부러 통화 소리를 줄여 놓은 탓에 귀를 바짝 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빨리 전화기 옆에 달린 볼륨 버튼을 누르면 될 텐데 순발력이 부족한 탓에 그마저도 못했다.


내 블로그를 보고 있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그렇구나. 글을 쓰고 있다는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구나. 그래놓고 잊어버리고 주절주절 내 일상을 쓰고 있었구나. 책 리뷰를 틈틈이 쓰면서도 나를 아는 누군가 혹은 모르는 누군가 관심 있게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애가 심한 편인 나는 그저 기록 보관용으로 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문법에 맞든 안 맞든 글쓰기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마음산책에서 나온 짧은 소설 시리즈 중 박서련의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서점 사이트로 들어갔다. 예스24는 구매 리뷰를 쓰면 적립금을 준다. 짧은 평은 50원, 긴 평은 300원. 리뷰를 쓰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350원 벌어야지 하면서 쓴다. 차곡차곡 모아서 5,000원이 되면 환전을 한다. 작품 설명을 보다가 소설가 박서련이 홍보용으로 출연한 영상을 보았다. 에고 서칭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본다고.


독자들의 후기를 꼼꼼히 본다는 말에 얼른 내 블로그로 돌아와서 박서련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 5건. 뭐야. 나 박서련 좋아한 거야? 허접하고 제멋대로인 리뷰를 봤을까 싶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설마 이런 것까지 봤을까 싶은 독자 후기도 읽었다고 하니 봤겠지. 보면 어때. 전체 공개로 해 놓은 글을. 혼자만 보고 싶었으면 비공개로 해놔야지. 나도 참 이중적이다. 써 놓고 읽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읽으면서 빡쳤으면 어쩌지 하는 소심한 마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이런 분석 밖에 못해? 책 이야기는 없고 순전히 지 이야기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전 한국문학을 애정 하는 독자랍니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의 첫 문장. '그만둘 거야. 진심. 하루 이틀 하는 생각도 아니지만 이번엔 진짜로.' 뭐야, 나 지금 사찰당한 거야. 홀리듯 읽어 버렸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가 나왔을 때 고민했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는 화가와 콜라보 한 작품이다. 소설과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이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종이책을 사야 컬러로 된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 산 이유는 완전히 누워서 보고 싶어서이다. 옆으로 누워서 따뜻한 색온도를 즐기며 오늘 하루도 잘 참아냈네 다독이면서,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었다. 첫 이야기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에서 주인공은 만화 카페에서 진짜로 때려치울 각오로 일하고 있다. 오늘은 그만둔다고 말해야지 하면서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다. 서비스직의 비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비가 오고 카페에 물이 차면서 손님과 주인공은 고립된다.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냥 남아 있기로 한다. 나가봐야 갈 데가 없다. 카페니까 먹을 것도 넉넉하겠다. 물에 잠기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죽으려고 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그만두려고 해도 자본주의 미소 날리며 일을 하는 반어의 상황을 그려낸다. 그러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는 「제자리」였다. 박서련은 나를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내가 왜 탈출해야 할까 하는 이유를 나도 정확히 몰랐다. 「제자리」는 나 대신 탈출의 이유를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같은 팀 장이고 주임이고 대리고, 다들 말을 윽박지르듯 해서 지수 씨는 매번 약간 울듯한 심정으로 대화에 임했는데, 종종 남자 직원들은 여자 직원들이 울어버릴까 봐 무슨 말을 못 하겠다며 엄살을 피웠다.' 출산휴가를 간 심 대리의 책상을 옮겨 놓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 지수 씨.


좋은 소설이란 무얼까를 생각하다가 김중혁의 산문집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그렇다. 나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독서를 했다.)에서 답을 찾았다. 주인공의 내일이 궁금해지는 소설. 이야기는 끝나도 주인공의 내일과 모레가 궁금해지면 좋은 이야기가 된다는 답. 「제자리」는 그런 점에서 위로가 되는 좋은 소설이다. 심 대리와 지수 씨의 내일이 평탄하지는 않겠지만 응원한다. 윽박지르듯 말하는 사람들이 득실대는 그곳에서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종영이 된 《무한도전》의 짤을 경전 읽듯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없는 게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절을 예상하기나 한 듯 그들의 말, 자막은 어느 상황에 갖다 놔도 꼭 들어맞는다. 그중에 하하의 짤. '정신 차려 각박한 이 세상 속에서'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으며 떠올라서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는데 웃음이 났다. 각박한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놓고 싶은 소설 속 세계 때문에. 놓친 정신줄을 들고 웃고 있는 나를 만난다.


다시 금요일 밤의 통화로 돌아오자면 내가 어디에서 일해요라고 하니까 단박에 그곳의 빡셈을 알아주었다. 우리를 일으켜 주는 건 말 한마디와 이야기 한 편에 담긴 공감이다.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해 주고 말이 되게 설명해 주는 일. 전자책으로 읽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는 멍청하고 무력한 나를 일어나게 해주었다. 비록 예쁜 색감의 그림을 즐기지는 못 했지만. 내가 약한 게 아니라 그들은 약한 나를 더 약하게 만드는 이상한 인류라고 말해준다. 누구든 코믹 헤븐에 들어가는 순간 뭉친 어깨가 풀린다. 다정과 공감과 이해가 판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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