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건너는 소년 사계절 1318 문고 108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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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너희들을 잊지 못하겠다. 얼마 전 새로 산 경추 베개는 만족스러워.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들어. 잠이 들고부터가 문제야.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현실의 일이 잠 속으로 달려 들어와. 잠깐씩 깨곤 해. 여기가 어디일까. 몇 시쯤 됐을까. 나는 일어나야 할까.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나지. 이불 속이 따뜻해서라고 농담해도 할 말이 없네. 겨우내 자면서 식은땀을 흘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철진, 재민, 박쥐, 시온. 너희들을 만나는 시간에는 어땠을까. 『밤을 건너는 소년』 속 너희들이 꾸는 꿈을 알고 싶어. 소설이 끝나면 나는 책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소년, 너희들은 어쩐지 계속 그 골목에 서성이고 있을 것 같아. 춥고 냄새나는 골목에서 사나운 마음이 되어 있을 것 같아.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해. 어른이 되어서 일도 하고 은행 업무도 보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지. 나의 처지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하면서 건네는 농담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밤이야.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할게. 자기 전 책을 읽으려고 노력해. 단어와 문장이 춤을 출 때까지 읽어. 잠이 가득 몰려오기 전에 보이는 증세. 마술사 부자가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일을 하는 장면을 읽다가 잠이 들었지.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꾸고 일어나 맞은 아침. 그래 맞아. 아침이야. 커튼 사이로 얇게 비치는 햇살에 아침이라는 걸 깨닫고는 안도했을까 아니면 한숨을 쉬었을까.


파라다이스 클럽에서 일하는 박쥐는 아버지가 늘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돈을 가져가. 고시원에 숨겨둔 돈을 가져가고 미성년자를 일하게 했다며 사장을 협박해 석 달 치 월급도 가져가버려. 박쥐는 절망해. 철진이는 재민이에게 이상한 쇼를 보여주면서 돈을 얻어내지. 공부 스트레스로 힘든 재민이는 철진이의 쇼를 보면서 어두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해.


너희들 앞에 마술을 하는 시온이가 나타나면서 일은 흘러가. 생기는 게 아니라 흘러가지. 『밤을 건너는 소년』을 다 읽었을 때 반전이 있어 놀랐어. 너희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겨내고 희망을 가지며 끝을 맺겠구나 하는 기대가 어긋나버리지. 알고 있어. 희망과 같은 단어는 너희들의 세계에서는 사멸된 언어라는 거. 희망 아닌 것들에 너희들의 세계가 물들어 있다는 것도.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는 있는지.


슬프니.


철진이가 박쥐에게 이상한 배신을 때리고. 박쥐는 저항 없이 순응하고. 삶은 자주 너희들의 기대와 희망을 배신할 거야. 야속하게 들리겠지만. 그렇더라고. 원하는 건 이루어지지 않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서 너희들의 시간을 끌고 갈 거야. 끌려간다는 게 맞을 거야. 너무 애쓰지 마. 절망도 힘이 된다는 걸 알기 되기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밤을 건너 아침이 되면 식은땀을 흘리고서도 살아 있으매 안도하는 어른의 시간. 절망을 절망으로 놔두지 않고 너희들은 걸어가야 해. 따뜻한 물을 끓여서 청귤 차를 타 마시고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봐. 아무 책이나 읽어봐. 제목이 끌리는 책. 연예인이 읽고 있는 책. 자격증을 따기 위한 수험서도 좋지.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을 사서 책에 밑줄을 치면서 읽었으면 해. 소년들. 야망보다는 책을 가졌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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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마음산책 짧은 소설
조해진 지음, 곽지선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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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10년 단위로 바뀌는 걸까. 음악을 들으려고 스포티파이 앱을 열었을 때 놀랐다. 홈 화면에 추천 음악으로 90년대 베스트가 떡 하니 올라와 있었다. 가입할 때 생년월일을 적으니까 나이대를 아는 건 당연한데. 그래도 어떻게 내가 90년대에 테이프와 시디를 사서 열렬히 음악 들은 걸 알고 추천을 해준다는 건지. 유튜브 알고리즘 신기한 것도 알지만. 새삼 자주 놀랍다. 스포티파이 검색했는데 얘네들 카피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네.


90년대 베스트를 듣는 지금은 2020년대. 가사 없이도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니. 대체 얼마나 음악을 들었던 건지. 네이버 블로그 기능 중에 하나가 몇 년 전 오늘 내가 작성한 글을 보여주는 게 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코로나 시대 전에 쓴 글이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돌아다닌 그때가 까마득하다.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좀비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재난에 닥쳤을 때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보면 나의 어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 용감해지기를 바라며 과학 선생이 만든 바이러스가 학교 내에 퍼진다. 한 번 물리면 좀비로 변해 사람을 공격한다. 감염 속도가 빨라 대처할 수 없다. 아이들은 살기 위해 뭉치고 옥상으로 올라가 구조 헬기를 기다린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헬기. 프로펠러 소리. 아이들은 곧 어른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는다. 그 믿음은 보기 좋게 깨지고 무증상 감염자일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이들은 헬기에 타지 못한다. 주인공 온조는 말한다. 어른들에게 협조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배에 탄 아이들 역시 하늘을 날고 있는 헬기를 보고 프로펠러 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곧 우리 나간다.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집으로 갈 수 있다.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잠을 잘 것이다 하는.


조해진의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2020년 이후를 다룬다. 근미래.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이라 믿는 미래. 어느 날 관측된 소행성은 지구와 가까워지며 충돌한단다. 지구는 사라지고 한마디로 멸망, 끝. 디데이를 설정해놓는다. 그럼에도 출근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새로 개업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곧 망한다는데 가게를 여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한 채.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서로를 물어뜯는 건 드라마와 영화로 학습해서 현실에서 그런다 해도 잘 피해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운전면허가 없어 버려진 차를 타고 도망가는 건 못 하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직업 정신이 투철한 버스 기사님의 버스를 탈 수는 있을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처음에는 뭔지 몰라 두려웠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할까.


불편하지만 마스크를 챙기고 마스크에 끼울 줄을 색깔별로 사는 걸로 코로나 시대는 일상화되었다.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인류가 갖은 고초에도 망하지 않고 버티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처음에는 이게 뭐지,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놀라면서도 검사받으러 가고 요일별로 마스크를 사라고 하니까 줄을 서서 산다.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망해가거나 망한 지구의 시간을 그린다.


지구가 끝장날 거라는 뉴스에도 출근을 하고 바이러스가 퍼져도 상사의 지시에 상자를 배달하러 길을 떠난다. 문명이 발달된 어느 미래에서는 사고로 뇌를 다쳐도 칩을 이식해 살아갈 수 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지구에 남아 있어도 미리 세팅해 놓은 프로그래밍으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상상력으로 쓴 미래의 지구는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가 아닌 정말로 일어날 수 있어서 진짜 일어나고 있어서 소름이 돋는다. 좀비가 돌아다녀도 소행성이 충돌한다고 해도 방사능이 유출되었어도 수능을 걱정하고 출근 알람을 맞춰두는 일.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에 실린 소설은 묻는다. 오늘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가.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세상이 망하기 한 시간 전 소설 속 인물은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확인하며 기분 좋음을 느낀다. 현재가 있으면 좋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거고 확실한 건 우리의 과거뿐인 현실에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오늘 말이다. 세상은 망한다.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미래가 허락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누가 허락을 해서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나만은 죽지 않을 것처럼 구는 인간들이 문제다. 우리에게 허락된 건 죽음이고 그걸 잊지 않는다면 평화롭게 오늘만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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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지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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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의 소설집 『산 사람은 살지』의 주인공 기분이 쓰는 일기대로 쓰자면 어제는 이러했다.


2022.1.31


조남주의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를 읽고 리뷰를 썼다. 냉장고에 있던 오징어와 쥐포를 꺼내서 구워 먹었다. 입이 텁텁해 양치를 하고 있는데 거대 춘식이 인형을 들고 벗이 찾아왔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창피했단다. 자꾸 쳐다봐서. 택시를 탔단다. 요금은 만 원 조금 넘게 나왔다고. 차마 인형을 들고 버스를 탈 수는 없었단다. 잘했다고 말해줬다. 커피 한 잔 먹고 쇼핑몰에 갔다. 코로나가 심해져 안 가려고 했는데 잠깐만 갔다 오자 했다. 설이라고 벗이 20만 원을 줬다. 그 돈으로 염치없이 옷을 샀다. 이제 돈도 벌고 하니까 살 거 사면서 살라고 하네. 걸어서 식당에 갔다. 길을 잘못 골라 도로변 갓길을 걸었다. 차가 무서우니 한 줄로 걷자고 했다. 불고기 3인분과 후식 냉면, 음료수 두 병을 시켜서 먹었다. 빵과 아이스크림을 샀다. 돈 버는 건 어려운데 쓰는 건 쉽다. 쇼핑몰에서 그 많은 옷을 보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비싼 옷 사 놓고 입지도 않고 떠난 엄마.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학교 다닐 때 김종광의 단편으로 수업했다. 내가 선정해서 복사를 해 갔나 교수가 추천해서 공부를 했나. 기억이 가물거린다. 읽기에 수월하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능청스러운 충청도 사투리가 소설 곳곳에 있어서 킥킥거리면서 읽었다. 서점 굿즈 받으려고 금액 맞추려고 신간 목록을 훑던 도중 『산 사람은 살지』라는 제목으로 김종광의 신간이 나온 걸 발견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이 정도의 제목을 쓴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무엇이?


누가 읽어도 쉽고 납득이 되는 언어로 책의 제목을 짓는다는 건 내공이 쌓였다는 뜻이다. 일부러 있어 보이는 척 어색한 제목의 책들. 이제는 제목만 봐도 안다. 몇 십 년 책 읽다 보면 사이즈가 나온다. 이 인간이 어떤 상태로 글을 쓰고 있나. 김종광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읽기를 잘했다. 역시 제목을 보는 내 안목은 틀리지 않지. 『산 사람은 살지』는 그런 책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뿌듯함을 안겨주는 책. 세상이 바이러스로 뒤덮이든 말든 산 사람은 살고 그렇게 하고 있다면 대단하고 멋지다고 말해준다.


스물두 살에 광산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시집온 기분이 쓴 일기와 뒤섞여 소설은 흘러간다. 몸이 시원찮아서 병원 다니고 그 와중에도 자식 키우고 농사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기분이었다. 젊은 날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처녀 때 쓴 일기는 있었는데 남편이 볼까 봐 불태웠다. 글자라는 걸 쓰고 싶어도 쓸 새가 없었다. 딸애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좀 썼다. 힘들다 힘들다 하는 신세타령의 글이라서 아궁이 속에 던져 버렸다.


2010년에 실컷 쓰기 시작했다. 기분의 일기는 남편이 아파서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 쓰인다. 자식들이 용돈 준 이야기, 병원 다니고 절에 가서 치성 드리는 이야기, 집이 오래돼 공사하면서 겪은 이야기, 친척과 조카들이 찾아온 이야기. 온갖 썰들이 『산 사람은 살지』에 펼쳐진다. 남편한테 생활비 타면서 겪은 서러움, 옷 한 번 마음대로 사서 입어보지 못한 슬픔, 하루에 얼마 썼는데 너무 많이 썼다는 후회. 죽은 자들이 꿈에 나와 기분에게 털어놓는 살아생전의 아픔.


김종광은 기분의 시간을 농사철로 나누어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농촌 소설의 대가답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는 농촌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농사짓는 이의 품과 고됨을 모른 채 마트에서 집어 든 채소를 보면서 비싸네 어쩌네 이러고 있다. 딱밤 맞기 좋게 말이다. 『산 사람은 살지』를 읽으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못하겠다. 고추 농사짓는데 기분의 다리와 허리가 아작이 난다. 일하고 있는 자식들이 시간 내서 와주지 않으면 시도도 못한다. 남편은 광산에 다니면서도 농사일을 했다. 노인회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항암 치료받던 남편을 두고 경로당 청소를 하러 간 기분이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죽어버렸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기분은 내내 마음이 아팠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픈 사람들 두고 청소하러 갔을까. 기분은 그런 마음도 일기에 쓴다. 젊은 시절에는 몸 아파 가족에게 폐만 끼치는 자신이 미워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그때 죽지 않아서 기분은 자식이 구해다 준 줄로 마스크를 겨우 쓰고 병원에 다니고 목욕도 다닌다. 기분의 일기에는 오늘 얼마를 썼고 자식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소상하게 적혀 있다.


그걸 읽으면 참. 가슴이 뻐근하다. 비 오는 날 돈 아낀다고 버스도 안 타고 집까지 걸어온 누군가가 떠오른다. 자기 죽으면 자식에게 손 벌리지 말라고 알뜰하게 돈을 모아둔 남편. 농협을 믿지 못해 창고에 돈뭉치를 숨겨둔 남편. 기분은 아파도 살아 있으니 살아야지 어떡하겠어 한다. 예전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책 내는 그런 꿈을 꿨다. 염세적으로 변한 게 아닌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남한테 악한 소리 안 하고 안 듣고 돈이 생기면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며 사는 게 만고 땡.


산 사람은 사는 데 어떻게 살지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는 게 『산 사람은 살지』의 주제다. 종결어미를 주제의식으로 쓰려다가 참는다. 주제나 주제의식이나 똑같은 말인데. 남의 잘난 척은 꼴도 보기 싫어하면서 꼭 있어 보이고 싶은 척에 어려운 말을 쓰려고 한다. 이 또한 『산 사람은 살지』를 읽고 고쳐야겠다고 다짐한 바다. 일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도 책을 읽어보겠다고 『산 사람은 살지』를 집어 들었다. 웬걸. 어지럽던 마음이 기분의 일기와 하루를 보면서 사라졌다.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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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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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있는데 자꾸 뭐 하냐고 물어서 웃었다. 조남주의 연작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에 실린 마지막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재개발 지구에 집을 얻은 아영은 결국 집에서 나와야 했다. 아영이 학원에서 몰래 잠을 자다 원장에게 들키고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탄다. 스마트폰에서 마주한 기사를 보고 아영은 웃는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기지는 않았는데.


속으로 말했다. 일하러 왔으니까 일하고 있지.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네. 제발 관심 좀 꺼주삼.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은 몇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챙긴 시세 차익으로 집을 마련한다. 희진은 '생각이야 참을 수 없지만 말을 가릴 줄 알거든요. 이게 현대인의 교양이죠.' 생각하며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할 말을 참는다. 쓸데없는 질문에 웃으며 속엣말을 하지 않은 건 현대인의 교양을 갖춘 자의 덕목이라니 나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남주의 『서영동 이야기』를 읽으면서.


1980년대에 원미동이 있었다면 2020년대는 서영동이 있지 않을까. 부동산 광풍, 영끌, 갭투자, 역세권 『서영동 이야기』에는 포털 뉴스 메인에 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한다. 반영론적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서영동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가지는 문제를 그대로 끌고 들어온다. 문학이 무슨 힘이 있을까 의문하는 자들에게 『서영동 이야기』는 위로가 된다. 여기 집 한 채를 갖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집 앞에 지하철이 들어오는 건 괜찮은데 요양병원은 안 된다고 시위하는 사람들. 비싼 값에 집을 팔기 위해 인터넷 카페에 선동 글을 올리는 사람. 양도세보다 증여세가 싸니까 집을 자식에게 주는 사람. 아이가 혼자 겉도는 것 같아 일부러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그곳에서 만난 엄마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영어 스터디는 꼭 하는 사람. 『서영동 이야기』에는 악인이 없다. 살아봐서 알겠지만 우리 사는 세계는 드라마와 영화와는 다르다.


사건을 일으키고 분란을 만들어 다음 편 예고를 기다리게 만드는 인물이란 여기 이 세계에는 없다. 완전히 나쁜 놈도 완전히 착한 놈도 없는 여기. 『서영동 이야기』는 그런 세계를 그린다. 여러 채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입주자 대표까지 하는 안승복 씨도 집에서는 딸의 말을 경청하는 다정한 아빠다. 젊은 나이에 집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유정은 남편에게 묘한 자격지심을 느낀다. 원장과 학원연합회 회장을 겸하는 경화는 요양원 반대 시위를 벌이다 현타가 온다.


서영동은 실제 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 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곳이 서영동이다. 경비 근무자에게 상한 과일을 골라 주고 집값이 올라갈 수만 있다면 몸싸움도 불사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지만 뉴스에 나와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하면서 본 사건들. 서영동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소설이 현실을 그리는 역할에 충실할수록 세상은 아주 느리게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빚도 자산이라면서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은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남편은 그런 희진에게 고마워한다. 좋은 아내의 기준이 10억을 만들 수 있냐 없냐인 것 같아 남편의 고마움이 달갑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물과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라도 가지고 싶은 인물이 공존한다. 안승복 씨, 경화, 아영, 희진, 보미, 유정의 바람과 욕망이 이해가 간다. 원장 경화는 몰래 학원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영을 돕고 싶어 한다. 도움을 주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줘야 할지는 모른 채.


그런 도움이라도 건넬 수 있다는 어른이 있으매 『서영동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안심하며 덮을 수 있었다. 서영동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내일이 아닌 오늘이 있었으면 한다. 내 앞길도 건사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나 하지만. 조남주의 인물들에게는 대책 없는 응원을 해주고 싶다. 행복동, 원미동, 서영동까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키 작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간절한 희망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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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정세랑 외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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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거 아세요. 처음 만나 밥을 먹을 때 호칭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물어봤잖아요. 그냥 언니라고 해요. 해서 그렇게 부를까 하다가 반감이 들었어요. 다른 직원들은 있지도 않은 직급을 만들어서 성 뒤에 붙여 부르는데 왜 당신만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동안은 언니라고 부르다가 다른 직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직급을 붙여 불러요, 이제는.


정세랑 작가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책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먼저 읽었더라면 당신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게 괜찮을지도 몰랐겠어요. 그랬다면 지금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아시죠. 직장에서의 관계란 일시적이고 사나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웃긴 글을 봤어요. 직장에서의 정신 승리법. 9시에서 6시까지 힘든 약속 있다고 생각하며 가기. 컴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가기.


직장에 관한 유머를 읽어도 좀처럼 좋아지질 않아요. 나는 감정이 없다. 이 사람과는 저녁 6시 이후에 볼 일이 없다. 되뇌어도 화나고 억울한 마음은 사라지질 않아요. 언니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나요.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하진 않을래요.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갈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까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일주일 내내 읽었어요. 언니의 나라에서도 행운의 편지라는 게 있었나요. 어느 날 문틈에 끼인 하얀 편지 봉투를 발견했어요. 누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두근거리며 봉투를 열었을 때. 손글씨로 쓰인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던져 버렸어요.


행운은커녕 짜증만 나는 편지였어요. 행운이라는 게 운이라는 게 7통의 편지만 써서 받을 수 있다면 7통이 문제겠어요. 앉은 자리에서 70통이라도 쓸 수 있겠지요. 장난과 익살이 담긴 한때의 유행 같은 거였어요. 요즘에도 행운의 편지를 쓰는지. 편지를 받고 고민에 빠지며 7통의 편지를 쓰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주고 싶어요. 그만큼 절박하고 외로운 이일 테니까요. 정세랑 작가는 언니들의 연대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언니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곳에 남아서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언니들의 미약한 힘이 모여 용기와 온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건네주고 있다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는 언니가 언니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글로 가득해요. 여기에서 말하는 언니의 성별은 전부 여자예요. 책을 읽으면서 만약에 이런 형식의 글을 쓴다면 누구를 호출할까 생각해 보았어요.


여자만 언니가 될 수 있을까. 아니에요. 채만식의 소설 「이상한 선생님」에는 성별이 다른 형제를 언니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와요. 그러니까 남자인 동생이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르지요.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남자 형을 대석 언니라고 불러요. 언니라는 호칭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는 거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다양한 언니들을 부를 수 있구나 즐거웠어요.


창비에서 이걸 알았다면 언니, 오빠, 형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쓴 편지를 책으로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요. 저는 좀 무식해서 논쟁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어요. 싸우고 분노하는 일에 소질이 없어요. 감정을 숨길 줄 만 알았지 드러내는 법을 배우질 못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날 싫어하지 않을까는 걱정으로 의견을 내는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해요. 남녀 구별하지 않고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이런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버텨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읽는 순간에는 온갖 상념이 떠올라서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걸 써야지 했어요. 막상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니. 휴. 한숨만 나오네요. 어두운 길을 걸어 올라와 집에 불을 밝히고 씻고 누웠을 때 언니들의 곁에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가 있었으면 해요. 짧은 에세이 형식이라 길어야 5분 정도 시간을 들이면 한 편씩 읽을 수 있어요. 오지은 님의 글이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의심이 들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네요. 알지요. 말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태반이라는걸. 그럼에도 말을 하면 나의 슬픔이 옅어질 수는 있어요. 나만이 나의 어려움을 알아선 안된다는 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쓰레기장을 청소하다가 책 몇 권을 가져왔어요. 아주 오래된 책 들인데요.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 때문에 그냥 놔둘 수가 없었어요.


먼지를 털고 물티슈에 소독약을 묻혀 닦았어요. 종결어미가 -읍니다로 끝나는 책. 쓰레기장에 앉아 문학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책을 읽고 버리고 그걸 나 같은 사람이 주워가고. 문학은 책에만 학교에만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부끄러웠어요. 얼른얼른 배워서 작가가 되겠다는 쓰레기 같은 마음을 먹었던 시절까지도요. 문학이 아니면 안 되는 시간에서 문학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지금 여기까지. 도착했어요.


내가 말하지 못한 감정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요.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못할 듯해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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